설교본문 : 시 95편 1, 6-8절
설교제목 : 여호와 수리호세누(하나님의 이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 대처법은 주로 그 개인이나 공동체가 가진 신앙관이나 세계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내가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안 좋아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체념한 채로 세월 좋아지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소위 운명주의의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간 이성이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이성주의의 세계관을 갖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이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고 이성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사람들이 이성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는 일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위기를 맞아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일찍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 영 제국의 왕실은 당시의 존경받던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윌리암 템플에게 대 국민 방송설교를 요청하게 됩니다. 당시의 영국은 나치 독일의 기세에 대항할만한 객관적 전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채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대 영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끓고 그분을 경배하며 그 동안의 우리의 죄,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들은 전쟁 가운데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비통에 젖은 민영환은 조국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몇 개의 유서를쓰고 주머니 칼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아 조국의 수치를 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총독으로 취임했고 국민들은 깊은 절망속에 1906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1906년 봄부터 이 땅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선교사 하디(Robert Hardie)라는 분이 봄 학기 시작을 위한 부흥회를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 열었는데 거기에 부흥이 임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놀라운 흡인력으로 말씀을 받아드리게 되었고 학생들 사이에 죄를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부흥운동은 제물포로 이어졌고, 이어서 다시 서울지역에 연동 교회, 상동교회, 정동교회, 자교교회등에서 각 교회 부흥회로 이어집니다. 이 때 부흥회의 공통현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회개와 자복현상이었습니다. 총신대학 박용규 교수가 쓴 “평양 대부흥운동”에 보면 1906년 2월의 자교 교회 신년 사경회중 아침예배에 갑자기 한 남자가 일어나 “자신은 술꾼에다 노름꾼, 사깃꾼”이라고 자백하지자 온 회중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아래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불길은 다시 북으로 가서 선천, 개성, 그리고 마침내 원산으로 옮겨갑니다. 1906년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원산에서 열린 원산 지방 사경회에서 하운셀(C.G.Hounshell)(감리교), 펜윅(M.C.Fenwick)(동아 기독교-침례교)등이 인도한 이 집회에서 강사, 선교사들이 먼저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면서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강력한 심령의 부흥을 경험합니다. 1906년 10월에는 같은 유형의 부흥이 목포에서 일어납니다. 프린스톤 출신의 남 장로교 선교사 프레스톤(John Preston)은 300여명이 모인 감리교 선교사 저딘(J. L. Gerdine)이 인도한 이 모임에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강력한 부흥을 체험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 교회에 통성기도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해가 저물어가면서 다시 밝아온 1907년 1월 소위 평양 대 민족 부흥이 폭발한 것입니다.
내년(2007년)이 그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두 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 약 1,000명이 모인 이 모임(중간에 1,500명 나중에 2,000명으로 증가)이 바로 대 부흥의 진원지가 된 것입니다. 1월 14일 저녁집회에서 백낙준 박사는 성령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이후 성도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년 내내 교회로 교회로 모여들어 새벽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하나님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기도하고 일어설때 마다 그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새로워지는 대 영적 각성운동이 전국으로 번져가게 됩니다. 백낙준 박사는 “이것은 장차 한국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자 그리스도인이 직면해야 할 더 큰 시련의 때(일제 식민 통치시대)를 예비하려는 깊으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일제 치하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처방이 영적 부흥이었고 그 핵심에 예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위기를 만날 때 예배하십니까? 오늘의 시편에서 시편기자는 위기를 만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해야 할일이 바로 예배라고 말하며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본문 1절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자”는 초대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시 6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시편이 대부분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후 겪어야만 했었던 광야에서의 방황과 시련의 시대를 돌아보며 비슷한 또 한번의 역사적 고난의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95편 10절에서는 과거에 사십년 동안의 광야의 방황을 회고시키며 하나님이 그들을 인하여 얼마나 근심했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할일이 바로 예배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시편기자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두 가지 이름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두 가지 이유-무엇입니까?
1.그가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6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굽혀 여호와를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앞에 무릎을 꿇자” 여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여호와 호세누(Jehovah Hoseenu)입니다. 4-5절에서는 그가 땅을 만드시고 산들을 만드신 분이시며, 바다도 육지도 그가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이 아름다운 땅과 신묘한 산들을 만드신 분, 저 푸르고 푸른 망망한 바다와 펼쳐진 저 육지를 만드신 바로 그분이 또한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메이커(maker)-여호와 호세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7절에서는 그는 그가 지으신 것들 가운데서도 인생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양육하며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7절을 읽어 보실까요?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왜 그렇습니까? 그가 우리를 책임지시고 양육하시겠다면 우리가 할일은 그분을 바라보고 그의 음성에 순종하면 그 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그는 다시 우리의 목자(여호와 로이)이십니다. 양의 모든 문제는 목자만 곁에 있어주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그를 따른다면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사 먹게 하시고 쉬게 하십니다. 목자가 양들이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며 방황할 때 가야 할 방향을 보여 주십니다. 두려워하는 양들 곁에 계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호세누-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그를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히 광야의 시련중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를 게을리 한 것입니다. 제대로 예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상 예배의 목적은 순종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다면 이제는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배 그 자체도 게을리 했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예배는 의식에 그쳤고 순종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 모임에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일의 예배의 장에서 들었던 주의 음성을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마음이 미혹되어(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근심하시고 그들에게 매를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당신은 어떤가요? 자, 그러면 이제라도 진정한 순종의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2.그는 우리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반석이란 말을 히브리어로 ‘수리’(SURI)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신 여호와-여호와 수리(Jehovah Suri)이십니다. 그는 우리 인생의 창조자이실뿐 아니라 우리 인생길에서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방황은 우리 스스로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닮은 고귀한 존재로 지어 주셨으나,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다시 우리를 찾아 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이제 우리 인생길에 반석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굳건한 반석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다시 지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반석의 그늘에서 참된 쉼을 얻게 되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우리를 초대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수리)을 향하여 즐거히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줄거이 그를 노래하자.” 한마디로 그를 예배하자는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우리의 노래와 시로 그를 경배하자는 것입니다. 왜요? 창조자이신 그분이 우리의 인생길에 반석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방황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크게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시62:1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조금은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흔들리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가 우리의 반석-여호와 수리이십니다. 흔들리십니까? 이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수리 수리 여호와!(“수리 수리 마하수리 사바하”가 아닙니다.)
수리 수리 여호와! 여호와 수리-그가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바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아래 방황하던 시절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셨고, 지금도 그는 여전히 오늘의 방황속에서도 우리의 유일한 반석이십니다. 지나간 세기에 영국에 가구점 목공출신으로 나이 16살에 예수를 영접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후 열심히 일하여 드디어 가구점 하나를 경영하는 일종의 중소기업 사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회사를 갖게 된 그날 그는 그가 일하면서 힘들고 어려운때 마다 늘 찾았던 가구점 뒤에 있는 홀본 언덕에 올라 그에게 성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마침 그가 앉아서 기도드리던 그 곳은 넓게 펼쳐진 바위 언덕이었습니다. 그는 이 바위 언덕위에서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는 바위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제가 조금 성공했지만 저는 이런 성공은 언제라도 흔들릴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의 인생의 흔들릴수 없는 반석은 주님 한분 뿐이십니다. 저의 평생에 저의 반석이신 여호와만을 의뢰하고 살겠사오니 제가 한 평생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의 마음에는 하늘의 기쁨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집에 돌아오는 즉시 한편의 찬송시를 기록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을 닻을 주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그는 가구점 경영을 청산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일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합니다. 그가 77세를 일기로 그가 섬기던 교회 강단에서 마지막 예배를 인도하던 날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찬송도 이 찬송이었다고 합니다.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히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하나님-여호와 호세누, 여호와 수리를 한 평생 예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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