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16편
설교제목 : 아도나이 (하나님의 이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미국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자로서 미 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미 국방성 경제고문을 지낸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화두를 우리 시대에 던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교수의 저서 “A Life in our Times”라는 책에 보면 그는 자기 집에 고용되어 일하던 가정부 에멜리 윌손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급한 일로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에밀리라는 가정부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백악관이오. 급한 일로 통화할 일이 있으니 갤브레이스 교수를 바꾸시오“ 이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는 지금 피곤하셔서 낮잠을 자고 계십니다. 지금은 바꾸어 드릴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상기된 음성으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이오. 당장 깨우시오“ 에밀리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의 주인은 갤브레이스 교수이고 저는 그를 위해 일하도록 고용된 사람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나중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겔브레이스 교수를 만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정부에게 내가 그 여인을 백악관에서 고용하고 싶다고 전해 주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면 ‘아도나이’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아도나이)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주님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y)는 주로 영어번역에서는 ‘Lord'(대문자 L에 이어 소문자 -ord)로 번역되고 여호와는 ’LORD'(모두 대문자)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약 340여회 등장하는데 본래 이 단어의 어근은 ‘아돈’(adon)입니다. 아도나이는 아돈의 복수형(마치 엘의 복수형이 엘로힘인 것과 유사하다.)으로 인간적 주인과 구별하여 쓰여진 단어로서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주재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16편을 통하여 시편기자가 어떤 의미에서 여호와를 자기의 주님으로 혹은 주인으로 고백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분일까요?
1.행복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행복의 반대어는 불행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구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갈구하지만 한국인의 행복의 열망은 특별하게만 느껴집니다. 그것은 불행한 역사의 질곡을 겪어온 민족이어서 더 절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새해만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예로부터 새해가 되면 문을 열고 대문에 “개문만복래”(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고 써 놓기를 즐겨한 민족이었습니다. 우리말에는 유난히 복을 사용한 언어가 많습니다. 복이 들어온다, 복이 달아난다, 복을 타고났다, 복 터진다, 복스럽게 생겼다,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린다는 등의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옛날 분들의 이름에도 복동이, 복실이 , 복순이 등이 많았고, 복덕방, 복권, 복주머니, 복 덩이등의 표현을 지금도 자주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누리는 복을 묘사할 때도 돈 복, 건강 복, 인복, 자식 복, 여복, 아내 복, 관복등의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온갖 사용하는 물건들마다 복자를 써놓고 복을 갈구했습니다. 심지어 태어나는 아이들의 강보에도, 베개에도 , 그릇에도, 수저, 소반에도, 상에도, 문갑, 떡판, 옷무늬에도, 방석에도 복자를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시편 16편에 보면 시편기자는 1절에서는 모든 불행과 죽음의 위협에서 피 할 곳은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2절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선과 행복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RSV는 이 대목을 “나의 주님이신 아도나이 당신을 떠나서는 나에게 행복이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모든 좋은 것은 선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사실 ‘福’이라는 한자어의 구조를 살펴보아도 ‘보여준다’ 혹은 ‘내린다’는 의미의 ‘示’가 그 앞에 붙어 있어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는 행복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편기자는 참된 행복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돈’은 사실 부부관계에서도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깊은 애정으로 하나 된 부부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향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야 말로 행복의 절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행복한 부부의 이미지를 연상하며 본문 3절을 읽어 보십시오. “땅에 있는 성도들은 나의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그대는 나의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대에게 있도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접하는 인생들의 하나님을 향한 타당한 응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2절의 고백이 아닙니까? “주는 나의 주님(아도나이)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아도나이로 계시되신 하나님-그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인이십니까?
2. 예배의 주인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지음 받은 이들로 하여금 지으신 이를 경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무엇을 예배하든 예배의 흔적이 없는 문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대리-하나님을 만들어서라도 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아닙니까? 바울 사도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롬 1:22-23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현대의 우상은 더욱 간교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가시적인 우상을 예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대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 일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나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내 인생의 주인을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까지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삼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 이르러 그는 다른 신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 증거로 그들에게 어떤 예물을 드리지도 않을 것이며 내 입술로 그들을 나의 주인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한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인생의 주인 아도나이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는 바로 동일한 신앙의 고백을 드린 믿음의 선배들의 피 흘린 발자취이었음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후 1-3세기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순교자를 많이 낳았던 시대에 로마제국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길에서 한 로마의 시민이 다른 로마인을 만나면 그 인사가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였습니다. 그러면 이 인사에 대한 대답이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입니다.”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기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대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혹은 형장에서 야수의 밥으로 칼날의 이슬로 사라져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아도나이는 한분 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시오, 예배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도나이 하나님-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인이십니까?
3. 평생의 주인이십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그것은 그가 우리의 평생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그는 우리의 살 곳(기업)을 기업으로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7절에서 그는 밤과 낮으로 우리를 훈계하시고 교훈하시는 분이십니다. 8절에서 그는 내 앞에 내 곁에 계시며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9절에서 그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함께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10절에서 그는 마침내 우리가 인생의 길을 다 가고 무덤으로 갈 때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고 무덤 저 건너편의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11절에서 그는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세상에 이르러서도 주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는 분-진실로 그는 우리 평생의 주인 되신 분이십니다. 자, 11절의 이 빛나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자, 이렇게 우리의 평생을 인도하시는 분을 우리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행복을 느끼십니까? 8절의 고백을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웃 사랑 축제는 이런 행복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그들 인생에서 평생에 주인 될 분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내가 경험한 영원한 행복의 길을 이웃들에게 소개하는 이 커다란 특권과 기쁨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내가 먼저 진정한 삶의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분이 계시지는 않으시는지요? 일찍 Fuller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 교수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담은 그의 역작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Christ's Home)이라는 작은 책에서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는 믿지만 그를 온전히 주님으로 모시지 못한 까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주재권(Lordship)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내가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님삼은 삶이 없으면 아직도 나는 온전한 삶의 기쁨, 삶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멍어 교수는 우리가 마음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만드는 첫 단계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면 그는 손님 되시길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는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주인 되시기를 원하신다고 지적합니다.
이제 그의 안내를 따라 우리의 집의 여러 방들을 둘러보며 과연 그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 되셨는가를 점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서재-내 서가 책들 가운데 주님 마음에 들지 않으실 책들은 없는지요? 탁상 위에 잡지들은? 벽에 걸린 그림들은? 그 책들 중에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역할은? *주방-음식을 만드는 곳, 우리의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곳--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식욕을 채우고자 했는가? 주님이 준비하신 양식인가? 아니면 세상의 메뉴들인가?(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거실-텔레비전(어떤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가? 주님과 같이 볼 수 있겠는가? 그분의 눈이 피하는 프로그램은 없는가? 컴퓨터-인터넷-당신의 즐겨찾기에 들어 있는 목록들은? 당신이 즐겨 듣는 음악은?) *작업실-공구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주께서 허락하신 재능, 은사로 우리가 날마다 만들고 있는 것들은? 그것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아니 주님을 떠나서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인생을 사는 결과들은 아닌지? *오락실-나의 여가 활동들, 내가 즐겨하는 운동들, 오락들은 얼마나 건강한 것들인지? 나를 중독 들게 하고 나의 자유를 빼앗고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을 앗아가는 오락들은? 부끄러운 오락들은? 도박, 춤, 술, 담배로 중독된 것은 아닌지? *침실-침실의 사진은? 침실의 즐거움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 나눈 일은 없었는지? 침실에 무례한 폭력은 없었는지? 부부의 회복을 위해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벽장-자물쇠로 잠가둔 비밀의 방/여기에 내가 불 들고 있는 옛사람에 속한 과거는?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는 없었는지? 부끄러운 습관은 없었는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는지? 이제 내 방의 모든 열쇠를 그에게 드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로버트 멍어 교수는 이제라도 서둘러 당신의 집의 명의 이전을 하라고 도전합니다. “이제 나의 집, 내 마음, 아니 내 인생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의 주인, 아도나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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