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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5-6절 성취자 - 최동규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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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 2장 5-6, 15, 17-18, 23절
설교제목 : 성취자 
설교자 : 최동규 목사님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에 대한 인용과 언급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습니다. 유대 그리스도를 일차적인 독자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구약과의 연관성 속에서 제시하고자 한 노력들이 현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은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지만 마태복음에서 이 주제는 훨씬 강조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몇몇 구절들을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구약의 인물과 사건과 제도 등 구약 전체의 영역에서 ‘성취자’가 되신다는 것을 다양한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장치들 중에 마태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라는 ‘형식 인용구’입니다. 이런 형태의 인용구는 11번 등장하는데(1:22-23; 2:5-6;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8-10), 특히 2장에서 집중적으로 4번 언급됩니다. ‘형식 인용구’들은 삭제되어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진행 중에 논평처럼 삽입되어 있어 자연스런 흐름을 단절시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구태여 이런 형식 인용구를 사용한 것은 그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야기 자체 보다는 인용구들에 담겨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태가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구절은 생략하거나 삽입하고, 어떤 단어는 다른 용어로 대체하고, 때로는 여러 말씀을 통합하거나,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창의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가 자기 주관대로 말씀을 마구 뜯어고쳤다고 비판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영감에 의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생애가 구약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로 규정되지 않도록,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을 새롭게 조명하도록 마태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약의 말씀을 역동적으로 인용하게 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이 가지고 있던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태가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인용했으니까 우리도 나름대로 성경에 더하고 빼고 해서 필요한 말씀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성경은 그런 행위에 대해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고 엄히 경고합니다. 우리는 마태처럼 영감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사상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마구잡이로 생략하거나 삽입하거나 대체하고 통합해서는 안 됩니다. 주어진 말씀 그대로 겸손히 받아서 이 문맥에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점은 마태 당시 독자들에게도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 계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고 해서 구약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구약에서 제시되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신약으로 올수록 그 의미가 점점 명확해지고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 것이지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해서 질이 떨어진 2등품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구약 성경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2장에 등장하는 4개의 ‘형식 인용구’들은 모두 지명(베들레헴, 라마, 이집트, 나사렛)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예언을 익히 알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의문에 대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분이 어떻게 나사렛에 사시게 되셨는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나사렛에 사신 것까지도 예언의 성취임을 밝힙니다. 또한 지리적 이동을 통해서 예수님이 단지 팔레스타인에만 국한된 메시아가 아니라 당시 온 세계라고 인식되었던 동방과 애굽까지도 포괄하는 메시아 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취 인용구는 2:5-6절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 말씀을 인용출처인 미가서 5:2절과 비교해보면, 베들레헴의 옛 이름인 ‘에브라다’가 ‘유대 땅’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유대 땅 베들레헴과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두 지역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또 ‘가장’(“결코”라는 뜻)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원래는 하찮은 동네였던 베들레헴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지위가 현격하게 반전된 성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미가서 5:2절의 말미부분은 사무엘하 5:2절의 예언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미가서 5:4절의 목양 주제를 함축하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분이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형식 인용구는 호세아 11:1절을 인용한 2:15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난한 것이 호세아의 예언을 성취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세아서의 문맥에서 볼 때 11:1절의 ‘아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는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마태가 본래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잘못 인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종종 하나님의 아들이라 언급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에 대한 모형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모형론’적인 관점은 마태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도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으며 일에 대한 성취로 제시합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출애굽 사건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애굽 피난은 사소한 집안일입니다. 규모를 놓고 비교해도 200만 명과 갓난아기 한 명입니다. 그러나 마태가 볼 때는, 200만 명의 출애굽 사건도 예수님 피난 사건의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마태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 200만 명보다 더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태의 관점이면서 동시에 그를 영감 시켰던 성령님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치적인 비교를 통해 많은 숫자와 거대하고 웅장한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공과 성취’를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큰 일’과 연관시킵니다. 물론 많은 숫자나 거대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소한 것에 담긴 중요성을 놓쳐버린다는데 있습니다. 출애굽은 선명하게 각인하면서, 갓난아기 예수님의 피난은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입니까? 웅장하고 화려한 출애굽입니까? 아니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 날을 사는 것보다 귀하다’고 말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예수님을 주목하며 사는지, 얼마나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지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마음과 힘과 정성을 드리며, 또 그것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것입니까? 집을 사는 것입니까? 무엇이 가장 위대한 일이며, 누가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까? 어떻게 되면 자신의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평가하시겠습니까? 저는 갓난아기 예수님의 피난을 200만 명의 출애굽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한 마태의 관점이 부럽습니다. 두렵기도 하지만 그런 관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기고 싶습니다.

세 번째 인용구는 예레미야 31:15절을 인용한 2:17-18절입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을 라마에서 생겼던 일의 성취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두 지역은 라헬이라는 인물을 통해 쉽게 연관 지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 전통에는 라헬의 무덤이 라마에 있다는 설과 베들레헴에 있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는 주전 586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집결했던 장소입니다(렘 40:1-2). 라마에 있었던 라헬의 통곡은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통곡의 원인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땅을 떠난 것과 관련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로받을 수 없는 절망을 안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적 상황 속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자식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어머니들도 위로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그 땅에 돌아오심으로서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통곡하는 사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네 번째 인용구는 2:23절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심각한 것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이 구약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보면 다른 형식 인용구와는 달리 ‘선지자’가 복수형으로 쓰였고, 직접인용이 아닌 간접 인용의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선지자에 의해서 말해진 특정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어진 공통적인 사상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출신성분에 있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며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 여러 번 예언되었습니다(시 22편; 사 53장; 슥 11:4-11 등). 한편 나사렛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무시 받을 만큼 구약 성경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무명 산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위로 받지 못한 슬픔이 있다면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될 것임을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작정 지난해를 잊고 새해를 계획하기보다, 과연 나는 예수님께 얼마나 주목하며 살았는지, 예수님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들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새로 시작될 한 해는 더욱 예수님을 잘 배워서 마태의 관점을 여러분들의 관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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