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22-23절
설교제목 : 임마누엘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서 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입니다. 성탄 시즌이 다가오면 이모저모 많은 점들이 생각나지만, 무엇보다 신자로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오신 그 분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고 그 분을 높여드릴 지에 대해 살피고, 또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좀 더 풍요로워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름인 ‘임마누엘’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말은 영어의 with에 해당하는 ‘임’,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 그리고 ‘우리’를 뜻하는 접미사인 ‘누’가 합쳐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명될 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가 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살펴보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1)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도 있고, 2)그 하나님이신 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날 아기가 임마누엘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을 때는, 그분이야말로 바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성막 중에 임재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몸을 입고 오신 분이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땅에 오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연약한 우리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내려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를 떠올려야 합니다. 특별히 이런 질문은 성탄주일에 걸맞고, 또 이 ‘임마누엘’이 나오는 본문에 걸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임마누엘 이름의 의미를 이사야 본문과 관련하여 살펴보면서 성탄을 맞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묵상하고 높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지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본문 안에서의 ‘임마누엘’의 배경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유다가 처한 상황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된 배경은 이사야 7장 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7장의 상황은 1절에 나오듯이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였습니다. 열왕기에 의하면 아하스는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한”(왕하16:2)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다 나라는 오늘 본문 1절에 나와 있듯이 북이스라엘과(‘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 아람의(‘아람왕 르신’) 연합공격으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은 후였습니다.1) 비록 1절 말씀에 “이들이 침입했으나 이기지 못하니라”라고 되어 있고, 열왕기하 16장 5절에도 “이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싸움에서 유다가 지킨 것은 겨우 예루살렘 성과 왕의 목숨이었을 뿐,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같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하 28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만 못했을 뿐, 유다는 겨우 하루 만에 용사 12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고(6절), 왕의 아들과 궁내 대신과 총리 대신이 죽임을 당하였으며(7절)2), 무려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고 재물이 노략 당하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유다는 대패하여 크나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다 왕 아하스는 이들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마치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습니다.
세탁자의 밭
그런 상황에서....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만남의 구체적 장소를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이라고 지정해 주셨고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이란 기혼 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의 북동쪽 외곽 기슭에는 기혼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이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물의 공급지였습니다. 이 샘이 흘러내려가서 실로암을 이루기 때문에 기혼 샘을 ‘윗 못’, 실로암 못을 ‘아랫 못’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샘이 유일한 식수원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물을 보급하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유적으로 남아있는 터널 수로를 팝니다. 이 일은 역대하 32장 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3)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히스기야의 이 수로터널을 본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대단한 수로입니다.
이곳이 ‘세탁자의 밭’이라고 불린 이유는 기혼에서 실로암으로 흘러가는 길목에 아낙네들이 세탁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황에서 약간 궁금증이 들지 않습니까?
왜 아하스는 왕궁에 있지 않고 샘에 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사야에게 굳이 다른 곳이 아닌 이 기혼 샘에 가서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거기에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을까요?
1) 먼저 왕이 거기에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쟁을 대비하여 수원을 보호할 수로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에서 수원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물 보급로가 차단되면 가장 단시간 안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하스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로를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리고 나머지 두 질문, 즉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굳이 다른 곳이 아닌 그 샘에서 왕을 만나라고 하셨는지, 그리고 왜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데리고 가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두 질문은 사실상 같은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아하스
먼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아하스 왕을 수로 공사를 살피고 있는 때에 만나게 하신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으셨습니다. 그가 지금 ‘인간적 방편’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적 방편’을 살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록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여도, 수로를 살피는 일은 해야 되는 일이니까요.
진정한 문제는 그 인간적 방편과 함께 과연 더 중요한 것이 있느냐는 점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하스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뒤의 본문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네가 나를 의지해야 한다”였습니다.
그러면 뒤의 말씀 전개를 보십시오.
4절에서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7절을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였을지라도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그들이 패망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굳게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절 말씀에서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라고 말합니다. 즉! 선지자가 지금 아하스 왕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정황은 “내가 너의 무엇을 보고 네가 신실하면 승리를 주겠다”가 아니라, “네게 승리를 주겠다”라는 것을 먼저 선언하신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걸고 그를 지키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하스 편에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먼저 하나님께서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군이 너를 칠찌라도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다 선언하시고 난 후에 “너는 그저 내 말을 믿는다는 표시로 징조만 하나 구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문제와 아하스의 반응은 매우 기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아하스에게는 가장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문제가 벌써 풀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의 아하스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삶의 문제인 “두 연합군의 침략”이라는 문제에 대해 답을 주어 버리셨습니다.
사실상 이 대답은, 받는 아하스의 입장에서는 “이게 왠 떡이냐!” 할 일입니다. 내가 지금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내 편에서 하나님께 가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오셔서 “그래! 내가 해결해 주마”라고 한다면, 더 이상 더 좋은 대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모두 주시고, 아하스에게는 그저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12절). 비록 여호와를 위하는 척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의 뜻은 사실상은 완고함입니다. 선지자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아하스의 반응은....사실상은 “하나님 따위는 필요 없어”입니다.
이것을 한 번 우리의 입장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회사의 사장인데, 어음의 만기일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걱정마라! 내가 만기 전에 모두 해결해 주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시험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인데,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합격할지 불합격할지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걱정마라! 내가 붙여주마!” 하십니다.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수술이 잘 되면 좋겠지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걱정마라! 내가 수술이 성공하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로 치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하스의 가장 큰 걱정인 연합군의 침입을, 아하스 편에서는 아무런 정성도 보이지 않았는데, 먼저 하나님 편에서 와서! “내가 막아주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거역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건....아하스가 하나님 따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복권을 사도, ‘혹시나....’ 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당첨될 확률이 내리치는 번개를 세 번 연속으로 맞을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그 복권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삽니다. 그 정도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밑져봐야 본전이니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거저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겠다’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하스는 복권이 당첨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을 더 믿지 않은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믿지 않더라도 점장이나 타로 카드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면 기분이 좋고, 그리 되었으면....하는 마음으로 돈도 쓰고 부적도 붙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뿌리쳤습니다.
어떻게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 따위 우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 정도로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고 나를 도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징조만 구하면 도와주겠다....라는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그 따위 것 필요없어!” 한 것입니다. 놀라운 불신앙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손을 뿌리 친 것은 그가 동맹한 앗수르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신흥 강대국이었는데, 북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앗수르를 섬기다가 1절에 나오는 베가 왕 때가 되어서 앗수르를 대적하고 돌아섭니다. 그래서 아람과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압박하여 같이 앗수르를 대적하자 했는데,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과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앗수르가 반드시 자신을 돕고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을 쳐 줄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정황에서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아하스에게 이사야의 말 따위는 우스운 것입니다. 눈에 뵈지도 않는 신이 나를 지켜준다는 걸 믿을 바에는 차라리 그 따위 믿음과 결별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진정한 구원자는 앗수르였습니다.
왜 기혼 샘인가?
이제....그러면 다시 한 번 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기혼샘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현저한 대조’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의 마음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전했을 때 아하스가 거부할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저한 대조’가 나타나는 장소를 택하셨습니다.
“너는 이렇게 샘의 물은 살피고 있느냐? 너는 마실 물은 의지하고, 너를 도울 앗수르는 의지하느냐? 너는 세상의 방책, 인간의 방편은 의지하느냐? 그러면서......나 여호와, 신국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인 하나님은 의지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기혼 샘으로 보내신 것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스알야숩인가?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게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은 이사야 6장 11-13절에 나옵니다. 이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이 패망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갈 것이 나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11-12절) 이것은 포로기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인 13절에 보면 이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두실 것이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스알야숩의 이름은 이 구절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6장 말씀의 1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이 주어졌던 때가 언제입니까? 웃시야 왕의 죽던 해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7장의 1절을 보면 아하스 왕은 웃시야 왕의 손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하스는 최소한 이스라엘에 ‘포로에 대한 예언’과 ‘그 포로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을 것에 대한 예언’이 있은 후의 사람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스알야숩’을 데리고 간 것은 이 불신앙적인 왕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지금 기혼 샘에서 열심히 수로를 정비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반드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스알야숩’이 증거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겨 남은 자를 두시고 포로로부터 돌리실 것도 이 ‘스알야숩’이 증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게 하신 것은 아하스에게 1)심판과 정죄를 떠올리게 하고, 2)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전혀 무시했습니다.
임마누엘은 “거역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임마누엘 예언은 바로 이 상황에서 주어졌습니다. 11절에서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했으나 12절에서 아하스가 거절했고, 그 거절에 대해 주어진 그 다음의 말이 14절 말씀,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인 것입니다. 임마누엘 예언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과 “그에 대한 거절”, 그리고 그 거절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거절에 대항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임마누엘 예언을 “거역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예언은...... 인간의 편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먼저 베푸신 호의도 거절하는 인간의 완악함”이요, 하나님의 편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결국! 아하스가 거절한 것은 “하나님과의 함께 거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고, 그것은 그들에게 ‘호의로’ 주어졌습니다. 인간 편에서 그것을 먼저 바란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신 것입니다. 친인척 중에 판사나 유력한 정치가, 심지어는 동네 파출소의 경찰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의 찌끼요 미물같은 인간에게 “그분께서 함께 계시며 우리의 벽이 되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편에서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이 하나님을 발로 찬 불의한 인생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주권적으로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일은 아하스에게만 일어난 일입니까?
우리는 이 본문의 아하스를 보면서, 그 거역이 바로 ‘아담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하스가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하였다고 한다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아하스의 반역이 임마누엘에 대한 반역이었듯이, 아담의 반역은 ‘임마누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는 것, 하나님을 “나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두는 것”을 거역한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이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계심)에 대한 반역의 피는 우리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1:28)(‘임마누엘’에 대한 거부입니다!)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임마누엘을 싫어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언이 임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발로 차버렸을 때, 그에게 주어진 선언은 놀랍게도 “한 여자의 후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하스가 1)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복을, 2)거절하였을 때, 3)‘임마누엘’로 응답하신 것은, 맨 처음 우리 조상 아담이 1)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복을, 2)거절하였을 때, 3)‘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으로 응답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하스가 먼저 베푸신 은혜를 거절하였음에도 그를 죽이시는 대신 ‘임마누엘’의 예언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말씀하신 것처럼,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다음 단계로 행하신 행동은 ‘멸망’ 대신에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한 한 후손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거역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은혜”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는 “자기 백성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에게 사랑의 선언을 먼저 주시는....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성탄주일을 맞아 마태복음 1장 23절에 나타나 있는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볼 때 그저 한 아기가 태어나겠고, 그 아기에게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주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심화해서 말하자면 이 ‘임마누엘 이야기’는 구약 백성들이 자신들을 건져 주시리라고 고대했던 ‘메시야의 탄생’을 보여주는 언약 성취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임마누엘’이라는 말 속에 쓰여진, 우리 하나님의 피묻은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명칭 안에는 “우리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세대를 살다 가지만, 우리 아버지는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하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거절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대단한 호의로 자기 자녀들을 방문하셨지만, 완악한 자녀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동산 안에 아담과의 자리를 까셨을 때, 아담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시고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 하나님께서 광야 시절이 다 지나고 난 후에 하신 말씀은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10) 였습니다.
왕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며, 관원과 백성들이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오욕의 역사는 나라의 대표자가 자신의 섬기는 신들이라고 생각한 이방 세계에서 볼 때 ‘이스라엘 신의 참패’ 였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감수하시고서도 자기 백성들에게 외치셨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시대는 “백성의 듣지 않음의 시대”입니다. 피를 토하는 선지자들의 음성은 너무나 쉽게 장삿꾼들의 속임수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날 밤, 작고 초라한 부부가 머문 외양간에서 임마누엘의 절정인 ‘하나님의 친아들’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를 거쳐 자신을 거역한 자기의 백성들, 하나님을 싫어한 인류들에게, 이전에 행하셨던 모든 임마누엘 방편들의 절정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기로 작정하시고 “자신의 사랑하는 친아들”을 보내심으로서 진정한 ‘임마누엘’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알려주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이름 안에 들어 있는 인류의 전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인 “하잘 것 없는 우리 인생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서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찌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찌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13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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