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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23절 임마누엘 주로 오신 주님 - 양인국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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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23절
설교제목 : 임마누엘 주로 오신 주님[성탄절]
설교자 : 양인국 목사님  

1. 이번 성탄절에 주신 말씀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들에 대한 것이었다. 12월 셋째 주 주일 설교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복스러운 소망의 주로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말씀해 주셨고, 넷째 주 주일 설교를 통하여 주님은 대속의 주로 우리에게 오셨음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24일 말씀을 통하여 좋은 소식으로 오셨음을 말씀해 주셨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임마누엘 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한다. 이처럼 이번 성탄절에 주신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임하게 된 모든 은혜가 넘치기를 원한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셨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세상의 구주로 오실 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말해 주었다. 여기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의미다. 세상에서 이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는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 영원, 편재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영원 무궁히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또한 기쁨의 소식인지 알기 원한다면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마다 언제나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한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해 주시기 위하여 주신 약속들을 살펴볼 때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말씀에 따라 행할 때 형통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형통의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형통한 삶을 산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버지조차 속일 수 있었던 야곱과 같은 사람도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린 요셉이 모든 불행을 극복하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가 모세의 생애를 돌아볼 때 감동을 받는 것은 철저한 실패자로서 살던 자가 다시 일어나서 가장 위대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근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애굽의 왕궁에서 바로의 후계자로 촉망 받던 자였지만 한 사건으로 인하여 애굽에서 쫓겨나 사십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았다. 이때의 그의 삶은 철저히 실패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고 또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이들 모두가 처해 있던 환경은 서로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말씀에 따라 살 때 형통하게 된다는 의미다. 주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로 오셨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말씀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는 곳에 말씀도 함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를 형통으로 인도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치유의 은혜가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6백 년 전에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 이 예언의 말씀대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주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병든 자들을 치유해주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실제로 주님은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셨고 특별히 주님은 오랫동안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던 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이 주님으로 인하여 치유함을 받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리고 치유의 희망조차 없는 상태에서 38년 동안 베데스다 못가에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자가 주님께 치유 받은 일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라사인 지방 무덤 사이에서 귀신들의 통제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치유함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들이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주님께서 이처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그들이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의 삶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질병은 우리의 삶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게 하고 또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받은 수많은 내적 상처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들로부터 오는 염려와 두려움들 불확실한 장내에 대한 두려움 등을 우리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무감각해져서 기쁜 일을 보아도 기뻐할 수 없고, 슬픈 일을 보아도 함께 울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갈 뿐 행복과는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질병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누가 이와 같은 질병을 치유해 줄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12년 동안 또는 38년 동안 치유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아갔던 사람들처럼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함을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이것은 주님만이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치유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셨다. 즉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의미다. 치유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병이 무엇이든지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소외된 자들이 자유함을 얻었다. 주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믿는다면 어떤 소외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외란 무리나 또는 무엇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시다면 따돌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소외라는 말은 인간관계에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 사용된다. 우리는 주변에서 소외 계층, 소외 지역, 소외 의식, 소외 감 등과 같은 말들을 쉽게 들을 수 있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관계로부터의 소외, 문화로부터의 소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등과 같이 개별적인 대상과 관련하여 소외라는 말을 사용하는 예들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더불어 살도록 창조된 인간에게 소외는 그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주님 당시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소외를 당하였고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소외를 당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했고, 죄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이처럼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해 주셨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주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했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신 주님은 모든 사람과 함께 해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소외된 자들이 자유함을 얻었다. 특별히 주님은 만유의 주로서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므로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인간관계로 인한 소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소외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는 기도의 약속을 믿는 자가 소유로부터 소외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는 사실을 믿는 자들이 신분이나 계급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주님이 계시는 곳에는 모든 관계로 인한 또는 보든 것들로 인항 소외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오는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 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고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우리가 바울을 통하여 주신 가르침에 따라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믿는다면 가르침이 필요할 때는 주님께 말씀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고, 치유가 필요할 때는 주님께 치유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을 때에는 주님을 친구로 삼음으로 소외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님은 임마누엘로 오셨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믿는다면 비로소 주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이 교통함은 우리를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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