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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12절 교회를 위한 왕(1) - 윤석준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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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12절
설교제목 : 교회를 위한 왕(1)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성탄 주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는 성탄절의 기운을 교회에서보다 바깥에서 더 잘 느끼는 것 같습니다. 미처 12월이 온지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작 12월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곳은 시내에서입니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등장하고, 넓고 큰 광장마다 길게 조명줄이 드리워진 성탄트리가 세워지는 것을 보면, 그때서야 “아....12월이 왔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성탄절을 세상이 주도하고 교회는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단지 규모가 조금 작은 세상이랄까요. 대규모 쇼핑센터에서는 20층짜리 건물을 다 치장할 정도의 규모로 화려한 조명을 달지만, 교회에서는 재정문제 상 작은 규모의 조명을 단다는 것 뿐, 세상에서는 성탄절을 맞아 시립회관, 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대규모 뮤지컬을 상영하고, 오케스트라들이 기념 공연을 하는데, 교회에서는 자기 교인들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 뿐, 오늘날 교회들은 ‘약간 규모만 작은 세상의 성탄절’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성탄의 본 위치를 찾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나신 이야기, 특히 동방박사 이야기 속에서 교회가 성탄절을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주님의 나심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인가?

동방박사 이야기는 성탄주일에 새로운 것이 아닐뿐더러, 많은 분들에게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탄절만 되면 선생님이 부직포로 열심히 만들어주신 옷을 입은 세 친구가 아기인형을 담아 놓은 바구니 앞에 서서 대사를 하고, 선물을 주고, 절하는 연극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동방박사”하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런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우리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사실 마태복음 2장을 잘 읽어보면 이 질문은 성경 자체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질문입니다. 본문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했는데, 이 인용이 이 질문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하려고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우리가 평소 하지 않는 질문이어서 그렇지, 유대에서 왕이 난다면 예루살렘에서 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다윗이 도읍을 정한 후 천 년 이상을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왕의 도시였고, 그런 의미에서 비록 악한 헤롯이 다스리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에 왕이 태어난다면 당연히 예루살렘이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온 까닭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당연히 왕궁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사실은 동방박사들이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역시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절에 보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1)고 되어 있는데, 그 뒤에 헤롯이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해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다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물으니(4절), 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그렇지요? 사실은 성경에 나와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왕이 예루살렘에서 날 것 같지만,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말씀을 잘 몰랐기 때문에 왕궁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시는 것이 자명했던 것입니다.


왜 베들레헴인가?

왜 오실 왕이신 분이 베들레헴에서 나는 것이 자명한가요? 6절 말씀에 보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한 본문을 인용하면서 왕이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합니다. 즉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 예언되었습니다. 6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즉 구약성경 미가서에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메시지 안에 왕이 탄생하실 도시가 나타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중점을 가지고 살펴야 할 내용은 분명합니다. 왜 미가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왕이 나실 것이라고 말씀해야 했는가? 구약성경의 이 내용을 잘 알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가서의 베들레헴 : 교회의 영광의 회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1. 예루살렘의 회복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5장의 메시지는 미가서 전체에서 보자면 4장부터 시작되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라는 큰 주제의 한 부분입니다. 미가서는 1장부터 3장까지가 심판에 대한 예언이고, 4장 이하는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이 포문을 여는 미가서 4장 1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 2장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이 말씀이 어떤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인지는 바로 그 앞 3장 마지막 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가서 3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임할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온산이 밭처럼 갊을 당하게 되고, 예루살렘은 전쟁의 포화에 무너져 무더기처럼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전이 서 있었던 산은 수풀이 우거진 폐허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4장부터 회복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일이 되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 이 “여호와의 전의 산”이 바로 3장 마지막 절에서 갊을 당하고, 무더기가 되고, 수풀더미가 되었던 바로 그 산, 성전이 있던 시온산입니다. 즉 미가서 4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과 시온산이 폐허가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를 회복시키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회복의 장인 4장에서 회복의 모습들은 뒤이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성전이 있던 산, 곧 시온산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말했는데, 3절과 4절을 보면 낭만적인 장면이 이어집니다. 무리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입니다. 보습이란 소 뒤에 메어서 밭을 갈 때 쓰는 농기구입니다. TV등에서 아마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칼이 필요 없게 되니 농기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전쟁하는 기구가 필요 없는 때가 옵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4절에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번 배운 적이 있듯이, 자기 소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갖는다는 것은 안식이 도래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 없을 것이고, 안식과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말일에! 여호와의 날이 도래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미가서 4장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3장에서 갈아엎음이 되었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금 회복을 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전이 있던 산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열방들이 몰려와서 이 산에 이르게 될 것이고!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가득하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식을 즐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미가서 4장이 그리고 있는 예루살렘 회복의 날입니다.

2. 그런데 왕이 어디에서 오시는가!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말한 이 4장의 회복, 즉 “여호와의 전의 산의 회복”, 곧 “시온산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누구를 통해서 회복되느냐?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5장의 메시지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바로 그 “누구를 통해서”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오늘 마태복음에서 동방박사가 왔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말했던 “왕이 날 도시”의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왜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4장까지 회복은 ‘예루살렘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런데 5장을 보면 이 회복을 가지고 오는 왕은 ‘예루살렘’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 회복을 가지고 오는 왕은 놀랍게도 ‘베들레헴’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베들레헴에서 왕이 오신다는 메시지 안에는 “예루살렘의 폐허화”와 “그 교회의 영광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겠다고 예언된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교회를 회복하시겠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 1)작은 성읍

그러면 왜 예루살렘이 회복되는데, 그 왕은 베들레헴에서 옵니까? 바로 이 사실 안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하시는 gorlta,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지가 들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 구절에서 베들레헴이 “작은 성읍”임이 강조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에서 “작다”를 중점으로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마태복음 본문에서 여기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본문을 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 베들레헴은 “너는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나옵니다. 왜 미가서에서는 “작을찌라도”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까? 작은데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베들레헴은 작은 성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성에서 왕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성은 작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가서와 마태복음을 비교해 보면 베들레헴에서 초점이 “작은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는데, 하나님은 그 회복을 작은 성읍에서 나온 왕을 통해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왜? 2)작은 다윗

그리고 이 사실은 곧바로 ‘다윗’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방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작은 성읍에서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 자체가 다윗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을 때의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16:1) 다윗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이 바로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났습니다. 정말 위대한 왕이 작은 성읍에서 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왕이 베들레헴에서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영광의 회복을 다윗에게서처럼 ‘작은 성읍’에서 시작하시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아들들 중에서도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1절에 보면 우리말 번역으로는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말째’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카톤’, 곧 ‘작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왕을 예선하셨습니까? 가장 작은 성읍인 베들레헴에서, 가장 작은 아들인 다윗을 통해 왕을 세우신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께서 왜 베들레헴인지를 이 관점 안에서 설명합니다.

      “베들레헴은 구석지고 작은 마을이었으며, 보편적인 구역으로 전혀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신실한 자들의 마음은 기가 꺾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이 작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도성에서 새 왕을 태어나게 하실 수 없던 것은 아니다......그토록 작은 마을에서 임금이 선택되었다는 것, 이 임금이 작은 오막살이에서 나온다는 것을 누가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그의 아버지는 양치는 사람이었고, 그는 자기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자였다. 그토록 구석진 곳에서, 그토록 비천한 시골 집으로부터 빛이 솟아나오게 될 것이라고 누가 도대체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는 어긋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둠속으로부터 빛을 끌어오셨으므로, 신실한 자들은 미래의 회복에 대해 절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왕국의 행복의 처음 상태가 미약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실한 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칼빈 선생님의 미가서 5장 2절의 주해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베들레헴에서 나온 왕을 통해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작고 비천한 곳에서 나라를 뒤흔들 왕을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곳에서 화려한 것이 나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셨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작고 초라한 성읍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왕을 통해 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적 왕이신 그리스도는 큰 왕궁에서 나지 않고 작고도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어디에서 회복됩니까? 교회의 영광이 화려하고 떠들썩한 네온싸인 아래에서 회복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목자들 가운데서의 탄생, 구유에 누이신 작고 초라한 아기로부터 옵니다. 교회의 영광은 앞다투어 세우는 거대한 성탄 트리에 있지 않고, 작고 연약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의 서두에서 ‘세상이 성탄을 기념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화려한 성탄’에 쉽게 현혹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육을 입은 자들이고, 그래서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시각을 뺏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할 왕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분”으로 오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소박한 성탄’에 만족해야 합니다. 떠들썩하고, 치장이 많고, 겉모습이 화려한 그런 성탄 말고, 참으로 ‘소박한 성탄’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치중하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꾸 왕궁에서 태어나야 할 것처럼 부추기고,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금관을 씌우고 금홀을 들게 한 것은 타락한 교회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왕이 회복시키는 “저는 자들”

그리고 여러분! 칼빈 선생님이 말씀했던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잠깐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미래의 회복에 대해 절망하지 말라!” 칼빈 선생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가서 본문을 보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신실한 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시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시는 왕께서 “누구를 대상으로” 역사하시는지 역시 미가서에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미가서 4장 6절과 7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가서가 말씀하는, 왕의 오심으로 인해 회복되는 자들은 “저는 자들”입니다. “환난 받은 자들”입니다. 저는 자와 환난 받은 자를 여호와께서 모으셔서 “남은 백성이 되게 하고”, 쫓겨났던 자들을 강한 나라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서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끌어모아서 자기 백성, 즉 베들레헴에서 나온 왕의 신민이 되게 하십니까? “저는 자들”입니다!

“저는 자들”이야말로, “작은 성읍” 베들레헴에서 나온 왕과 정확하게 일치가 되는 신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작은 성읍을 통해서 왕을 보내주시고, 또 작은 자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력 있는 왕도에서 왕을 부르시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세상의 권세자들과 힘 있는 자들을 건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작은 성읍에서 왕을 내어, 저는 자들을 불러모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의 대표로서의 동방박사

여러분! 바로 이 점에서 동방박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 왕궁에서 헤롯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경배 받게 아니하셨습니까? 그들이 “저는 자들”, “작은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작은 자들의 대표입니까? 우리는 구약성경 안에서 대표적인 작은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첫째가 고아요, 둘째가 과부요, 셋째가 나그네입니다. 약하고, 헐벗고, 힘없는 자들, 그 중에 특히 ‘나그네’ 혹은 ‘이방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취급받지 못하는 자, 이스라엘이 볼 때 성전 바깥에 있는 자, 유대인들이 볼 때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누구를 대표하고 있습니까?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많은 곳에서 “동방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입니다.

사 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 야곱 족속이 동방풍속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풍속에 물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겔 8: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 이 본문은 에스겔이 성전 안에서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본 장면입니다.

겔 25:4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붙이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 진을 치며 네 가운데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실과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하였을 때 그들은 에덴을 떠나서 점점 더 동방으로 갑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에덴을 지키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에덴의 동편에 배치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쪽으로 내어 쫓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보다 가인은 더 동편으로 갑니다. 가인은 범죄한 후에 에덴 지역 동편에 있었던 ‘놋 땅’에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창4:16). 바벨탑을 지을 때의 상황을 보면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창11:2) 시날 평지를 만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의 특징은 점점 더 동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동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성경구절들이 증거하는 바가 바로 이 사실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동방박사’란 ‘하나님을 반역하여 간 동쪽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반역했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주님을 찾아와서 ‘경배’드렸던 것입니다.

유업을 상속해야 할 교회의 큰 자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우리가 거듭 말했지만 이들은 유대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랍비들의 해석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이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온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가서의 해석을 통해서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크고 강한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고 약한 자들을 통해서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보게 되는 이들은 이 왕을 전혀 환영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동방박사는 아주 먼 곳에서 왔는데, 이들은 코앞에 왕이 있는데도 영접하거나 찾지 않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러한 심정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입증됩니다. 헤롯은 동방박사가 돌아오지 않자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큰 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대신 “학살”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동방박사들과 헤롯, 대제사장, 서기관 중 누가 유대의 왕께 경배해야 합니까? 왜 이방의 동방박사들이 유대의 왕을 경배해야 합니까? 유대의 왕은 유대인들이 경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유대의 왕을 경배하지 않았고,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 경배를 하러 가는 것입니까?

참된 교회에게 경배받으시는 왕

대답은 분명합니다. 미가서의 “저는 자들”이 적어도 헤롯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성읍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왕을 불러 세우실 때, 그들의 신민이 될 교회는 큰 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참 교회’가 될 것입니까? 이 왕을 경배할 진짜 백성들은 누구였습니까? 유대인들은 버림당하고 이방인들이 다시금 선택되어, 새 교회가 나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동방박사가 암시하고 있는 이후의 이야기들입니다.

과연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드러나시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명패를 달아서, 자신들의 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못박아 죽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잘 모르는 외국인물인 예수를 마음을 다하여 영접하고 받아들인 자들은 오히려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버림을 당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교회를 채우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옛 언약교회는 “저는 자들”이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먼저 초청받은 자들은 모두 왕의 혼인잔치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초청받은 이들은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눅14:21)이었습니다.

교회는 누구입니까? 교회가 저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작은 자들입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 선생님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노라”(고후11:30)라고 했는데,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고후12:9)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자신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도 역시 “약해지라”고 말씀합니다(고전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를 위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 때 교회는 “큰 자”들의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자들”의 교회입니다. 주께서 오셨음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뻐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교회들 속에 초대교회의 카타콤에서처럼, “저는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두를 버리고 지금은 집도 절도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저는 부모형제도 잃고, 친지들도 다 죽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의 박해에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제게 더 큰 위로를 주십니다.”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20층짜리 트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보다, “나의 모든 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참 저는 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는 자들이 참 교회이며, 이 교회 속에 주님의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오신 왕과 그를 맞는 저는 자들! 이것이 성탄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각인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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