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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12절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사람들이 반응 - 김영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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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12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사람들이 반응 
설교자 : 김영하 목사님

성경본문 : 마 2:1-12(이사야 62:10-12, 디도서 3:4-7)  

들어가면서

대신문이나 방송국은 그날그날 최고의 뉴스를 보도합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Time이나 News Week같은 세계적인 주간지는 그 주간에 최고의 뉴스를 보도합니다. 그리고 연말이면 그해의 top news가무 엇인가 하고 보도를 합니다.  

금년도 최고의 뉴스는 지구촌의 독재자들이 여섯 명이나 죽든지 권좌에서 물러난 이야기가 Top News로 등장하였습니다. 이집트의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튜니지아의 벤 알리, 예멘의 압둘라 살리, 이북의 김정일등이 물러났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연사도 있지만 많은 독재자들이 카다피처럼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반도의 최고의 뉴스는 김정일의 사망입니다.  

여러분들의 생애 속에서 최고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분명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난 것만으로는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 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애에 있어서 그 다음 최고의 top news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내 생애 중에 없을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최고의 뉴스는 무엇일까? 이것은 당연히 천지 창조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똑 같이 중요한 최고의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구촌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류가 되었겠는지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지구촌의 최고의 뉴스를 다루는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저자 누가는 목동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눅 2:1-20). 이들이 한 밤중에 양을 치다가 천사들이 들려주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는 사건을 다룹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3종류의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첫째는 가장 폭군인 헤롯왕과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동방박사들입니다. 미국의 최고의 매스콤은 NBC(Nobody knows Christ), CBS(Christ has born Saints), So ABC(Anybody knows Christ), Fox News run by King Herod tried to wipe out Christ라고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송사들은 과연 어떻게 이 사건을 보도할 것인지? 만약이 여러분이 기자라면 이 사건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


1. 반대세력

헤롯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공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아주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대 성전을 지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헤롯의 놀랄만한 건축술에 현대인들도 그의 탁월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금이나 보석을 내다 팔아서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는 정치적수완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와 장모 그리고 아들까지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아내는 10여명이 되었으며 근친상간까지 하는 정신이상적인 면을 보여주었던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주전 40년에 분봉왕이 되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여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주전 4년에 죽었으니 예수님이 실제로 태어난 것은 주전 5년 내지 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지금까지 계속하여 존재합니다. 구약의 역사는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이 계속하여 존재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까지 로마제국은 얼마나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를 하였습니까? 사자 굴에 던져 넣고 톱으로 사람을 잘라서 죽이고 짐승의 가족을 씌워서 사자에 잡혀 먹히게 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달아서 운동경기용 횃불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독도 교도들은 초기 300년간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카타코움에서 숨어서 살아야 하였고 여기저기 피해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모슬렘들은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싫어합니까? 현재 인도네시아나 레바논 같은 데로 서로 성전을 불태우고 죽이면서 그 적대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섬멸하겠다고 교회를 불태우거나 무기창고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기독교인들은 숙청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헤롯왕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괜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잘못 행동하여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들의 내면을 보면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은 돈을 숭배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쾌락을 자신의 신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공의의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키워 가십니다. 핍박이 강할수록 기독교는 계속하여 성장하여 왔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핍박을 해도 기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번져 나가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2. 무관심한 반응(3-6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 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날 줄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어느 때보다 더 메시아에 대한 대망사상이 강렬한 때였습니다. 말라기 이후에 4백년간이나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고달픈 식민지 생활이요 경제적으로 초근목피할 정도로 비참하였습니다.

종교적으로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급절한 상황에 수많은 사람들은 메시아의 출현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던 분위기 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나타났다고 하는데도 가까운 베들레헴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관심입니다. 현재 기득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뜨뜻미지근한 성도들과 비슷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4절에 때가 차서 예수님은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4천 년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전 330년경에 헬라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나와서 철학 문학 언어등 문화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루 있었던 헬라가 전 세계를 통일 하였습니다. 특히 헬라어는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발명한 언어 중에 최고로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입니다. 모든 명사는 중성 남성 여성으로 나누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관사도 형용사도 똑같은 3가지 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주격 여격 호격 소유격 목적격등으로 세밀하게 분류가 되어있습니다. 동사는 시제 무드 분사 부정사등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동사 하나가 옷을 50번 이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놀라운 고도화된 언어였습니다. 이러한 언어로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는 로마가 전 유럽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황제들은 세계를 정복한다는 꿈을 가지고 세계 각국으로 길을 만들었습니다. 세계로 뻗어난 그 길로 복음은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되는 완전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왔다는 데 소동만 하고 가까운 베들레헴에 가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오는데 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는 오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정말 그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해 본 적이 있는지?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었다고 찬송은 하는데 과연 구속에 죄용서의 확신과 감격이 있는지?

지금 죽어도 기쁨으로 천국 간다고 기뻐할 수 있는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이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있는지? 지금이라도 선교지를 향하여 가서 헌신하라고 하면 죽음도 불사하고 봉사할 준비는 되어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는 하고 있는데 진정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의 그 사역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심각하게 조용히 생각해 보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온전한 삶을 살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은 다음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용서 되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증거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갈 때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놀라운 사실에 우리는 늘 감사하고 감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지 못한 사람들은 심각한 고민을 해 보시고 기도하시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예수님의 모실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은 탄생할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지구촌에 오셨는데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기에 가실 곳은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이 먹는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타락한 후에 영이 죽어있고 영적으로 장님이고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 있으니 짐승과 같은 수준의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짐승보다 더 못한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현재 불신자들의 삶입니다. 짐승은 배부르면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더 먹고 더 쌓아놓고 더 욕심을 부리니 짐승보다 더 못한 것이지요. 짐승의 맨 처음은 입이요 맨 마지막은 항문입니다. 먹고 싸는 것이 짐승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사람은 바로 짐승수준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짐승과 같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구간으로 오셨을 뿐만이 아니라 인간세계에서는 자신의 주권을 내어놓고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드릴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짐승들이 사는 곳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하는 곳에는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싸우느라고 예수님의 설자리가 없습니다. 욕심으로 장사하는 사람들 속에는 예수님이 설자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교육하는 곳에는 인본주의 교육에만 정신이 팔려서 예수님의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고뇌와 아름다움만을 생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 개인들은 돈 행복 쾌락 명예를 좇아가면서 예수님을 몰아내었습니다. 돈이 없고 억압을 당하였을 때는 그 대상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먹고 살만하니 내세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종교는 하나의 사치품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이 누구한테 종속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삽니다. 이제는 내가 신이다 주장하는 세대 속에서 삽니다. 누구의 간섭도 원치 않는 세대입니다. 이것이 New age movement 요 postmodernism적인 사고입니다.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 나오는 것이 바로 synchrotism(동형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지 표현만 다르고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 모두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Relativism(상대주의)입니다. 이것은 진리란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자신에게 맞으면 진리라는 실용주의적인 발상입니다. 또 하나는 Pietism(경건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가 거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저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이다. 더 거룩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좀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입니다. 죄인은 선한 일을 통해서 신을 달래려고 하는 본능이 경건주의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경겅주의자들은 자신을 학대하면서 고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예수님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건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경건주의를 벗어나서 주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경건주의는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서 남을 정죄하고 교만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의에 사로 잡혀서 살기 쉽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사 64:6). 이러한 것들이 모두 예수님의 한 일에 대한 무관심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마음에 없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나님은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마당만 밟은 뿐이다. 나는 너희들이 가져온 제물에 신물이 낫다고 한탄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만 이용하려들고 형식적인 제사만을 드리고 지식적으로만 알려고 하니 하나님은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3 적극적인 반응 (1-2절11-12절)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한 사람들입니다.동방에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가까운 동쪽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의견은 바벨론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들이 바벨론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전 586-516년까지 유대의 유력한 인사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을 잘 압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높은 관직에 있었고 그 밑에는 점성가들이나 많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환상까지 보고 많은 예언하였던 다니엘의 영향을 받은 많은 바벨론 학자들이 있었을 것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특히 다니엘을 모함하려던 사람들이 사자 굴에서 죽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용광로에 던져 졌지만 살아남은 사실을 모두 잘 아는 터에 이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바벨론 학자들은 많은 관심을 가졌던지 믿었던지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특별히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인자는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동방박사들이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마침 큰 별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인도로 메시아를 경배하러 온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바벨론에서 왔다면 목숨을 건 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여행을 생각해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이들은 목숨을 건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분명한 헌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길에서 사나운 짐승을 만날지 강도를 만날지 도둑을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2절에 이들은 메시아를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러 온 것은 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참된 헌신이 없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여기서 우리는 배울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라는 것입니다. 등산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까? 자녀들 때문이 할 수 없이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축복을 받기 위해서 나와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상하고 평가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설교를 듣느냐가 은혜를 받고 안 받고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떠한 태도로 설교를 듣느냐 예배를 드리느냐도 중요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곳을 여행을 하면서 메시아를 경배하겠다고 기대를 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기대를 하시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어떤 설교를 해도 은혜가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설교를 대강하기를 원하겠습니까? 목사는 설교 한편을 작성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합니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친정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심정입니다. 시집간 여인들이 고달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문제가 있으면 친정에 갑니다. 푹 쉬었다가 시집으로 돌아갑니다. 친정에 오면 신랑흉보고 시어머니 시누들 욕하면서 스트리스를 풉니다. 그리고 푹 쉬었다가 다시 갑니다. 아니 시집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갈 때는 이것저것 싸가지고 갑니다. 이 때 부모님은 자기 것이 없어지는데도 저것이 욕심이 많아서 잘 살 것이라고 만족스러워합니다.

목사도 친정 부모와 똑같은 심정입니다. 성도들의 세상살이는 시집가서 사는 것처럼 고달픕니다. 윗사람 눈치 보랴 밑에 사람 비위 마치랴 거래처 달래랴 여러 가지로 고달픈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세상을 결코 녹녹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속이 상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시기 질투도 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마음이 고달픕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지친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모든 죄 짐을 내려놓고 사죄선포를 듣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고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하면서 돌아가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목사의 심정입니다.

 

주일날은 은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보면 목사는 가슴이 아픕니다. 가난한 심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오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듬북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헌신된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무관심으로 온다거나 공격하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은 은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2) 교회에는 반드시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11절)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 약을 예물로 드리리라

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 약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먼 길을 오면서 자신들의 많은 경비를 썼을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합당한 선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황금은 왕권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제사장들이 예배할 때 사용하는 필수 품목입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적인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몰 약은 시체를 방부 처리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으로 수난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나의 모든 생명권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롬12:1). 예물을 드릴 때 마음에 없는 것 정성이 없는 것 형식만 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고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사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중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여러분의 예배와 헌금에는 감사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까? 학교에 등록금이나 공과금을 내듯이 어쩔 수 없이 내는 헌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낼 수 있다니 나에게 이렇게 축복을 주셨다니 내가 이렇게 드릴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예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있으나 마나 하는 정도의 물질을 준비 없이 그냥 드리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은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벌어 온 물질은 생명인 시간을 드려서 벌어온 생명입니다. 주님의 나의 생명을 드립니다. 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성의 없는 예배 정성이 없는 헌금을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많은 축복을 받고도 헌금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증스럽고 형식적이요 무성의 한 것을 보면 목사인 내가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을 어떠할까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하고 어떻게 자녀들이 복을 받기를 기대할까 참으로 안타까운 때가 많습니다. 자신에게는 부요하고 하나님께는 인색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모르드게는 에스더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4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필경 이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무엇인가 필요하여 이때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12절에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리라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헤롯왕은 이들에게 보고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들도 순종할 것을 다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다른 길로 갈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요한도 관원들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이성에 더 순종을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까? 늘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이 좋아할 대로 행하다가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을 조서에 어인 찍힌 것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다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해 주셧습니다.

동방박사를 통해서 예배에는 반드시 헌신이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물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될 것을 다짐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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