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1장 23절
설교제목 : 성탄의 기쁜 소식
설교자 : 양인국 목사님
1.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나님” 으로 오신 날이며 “하나님께 영광이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는 평화”가 임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매년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고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새롭게 하는 날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여호와께서 너희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 “나의 평생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23: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이 말씀들을 보면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 주고 있다. 요즘 창세기에서 야곱의 생애를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고 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태어날 때에도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아버지 이삭을 속일 때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다. 그리고 형 에서를 피하여 홀로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동행 하셨고,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일하고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해 주셨다. 또한 그가 외삼촌 집에서 도망쳐 고향으로 향할 때에도 그와 함께 해 주시며 모든 위기의 때마다 구원해 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전에도 우리와 함께 해 주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장래에도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신하고 있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을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그분과 교통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행위와 입술의 말 등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다는 의미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장 잘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애굽에 노예로 팔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인도해 주셨는지 생각한다면, 강에 버려진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됨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지도자가 되기까지 어떻게 그를 인도하셨는지 생각한다면, 박해자 바울을 불러 이방의 사도가 되기까지 어떻게 그를 인도하셨는지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계시므로 우리를 가장 잘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므로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시31:22)”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9)”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116:1)”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드릴 때 그것을 들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응답해 주신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들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다는 의미고 우리에게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무엇을 구한다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는 있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은 더 이상 그와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의도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할 때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기보다는 먼저 그의 말을 듣는다. 이것은 그를 위해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가 원하는 것이 그를 위하여 최선의 것이 아니라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듣는 것은 응답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간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말해 줄 것이다. 『한 신학생이 농촌에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성도가 없어 몇 개월 동안 가족들만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언제나 성도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5개월 정도 되는 어느 주일날 부인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오셨다. 너무 반가웠지만 그 할머니는 정신이 온전한 분이 아니셨다. 예배를 마친 후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목욕을 시켜 드린 후 잠자리를 마련해 드렸다. 이렇게 날마다 기도해 드렸는데 5일 만에 할머니로부터 귀신이 떠났고 정상이 되었다. 그 할머니는 25세 때 처음 귀신 들린 이래 47년간 귀신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사신 분이셨다. 그 목회자는 할머니로 인하여 마을에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을 기대했는데 이 할머니는 치유함을 받은 후 대구 아들집으로 가셨다. 그 후 한 주일이 되었을 두 사람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종 오누이 간이었는데 30대 여자는 귀신이 들려 18년 동안 고통당하고 있었고 오빠인 40대 남자는 38년간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할머니로부터 이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목회자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이틀 째 되는 날 여동생이 치유함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벙어리도 말하는가 보려고 교회로 몰려왔다. 그 날 밤에 강대상 밑에서 기도하던 벙어리 남자가 갑자기 ‘주여!’ ‘주여!’라고 외쳤다. 벙어리가 말문이 열렸을 때 동네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서 그 사람에게 가보니 그가 졸도해 있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또 다시 주여! 주여! 라고 외쳤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을 때, 기도 중에 멀리서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그곳에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오시더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는데 자기 몸이 점점 뜨거워져서 소리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 소리친 것도 천사 둘이 날개 치며 자기에게 다가오는데 불덩어리가 자기 뱃속으로 들어와서 뜨거워 소리쳤는데 그것이 주여! 라는 외침이었다는 것이다. 이 역사 다음 주일 마을 사람들 15명이 교회에 나왔다. 이렇게 하여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마을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다(예도해, 구름이 가면 나도 가고, 도서출판영성네트워크, 2005, P90-97)』하나님은 이 목회자가 교인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했을 때 그 기도를 5개월 동안이나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는 들어 주신 것이다. 만일 처음에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더라면 그곳에 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그리스도교를 너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도가 즉시 응답되어 몇 사람이 교회에 나왔을지라도 그들이 계속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을이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어떤 반대도 하지 못하도록 환경을 준비 시킨 다음 특별한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심으로 이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기도의 응답을 5개월이나 지연시키신 것이다. 이처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그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조각가에 비유했다. 조각가는 아무 모양도 없는 나무나 돌을 가지고 그곳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형상을 새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작품으로 완성될 때까지 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톱으로 잘라내기도 하고 때로는 도끼로 찍어내기도 하고 망치와 끌로 쪼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조각가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은 작품을 완성해 가기 위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도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시기 위한 일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강에 버려진 모세를 취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됨으로부터 구원해 낼 인도자라는 작품을 완성하시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으셨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작품을 완성하시기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으셨고, 박해자 바울을 택하셔서 이방의 사도라는 작품을 완성하시기까지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시골에서 한 아이 하나를 택하셨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 외에 읽은 책이라고는 보물섬과 서유기 그리고 성경뿐이었다. 성경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가까이 할 수 있었고 초등학교 때에 이미 신구약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디모데 후서 3:14-16절을 읽으며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거룩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훌륭한 성경학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소유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중학교를 보내 주는 대신 성경 신구약 한권을 사달라고 하여 부모님께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이 아이가 성장하여 스스로 진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원대로라면 당연히 신학을 공부해야 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공계 학교로 가서 전기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학교에 가서도 전공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도서관에서 주로 보았던 책들은 신학, 철학, 그리고 농업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째든 전기를 공부했기 때문에 졸업 후, 대학 전기 실험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은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도서관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또한 시간적인 여유도 주어져서 하고 싶었던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유롭게 학생들을 만났기 때문에 마음만 있으면 그들에게 언제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11년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완성하고자 하시는 작품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시는 기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장래 목회 사역을 위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자로 스스로를 훈련 할 수 있었고 또한 후에 함께 사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11년 후 하나님을 그를 직장으로부터 떠나 새로운 환경으로 인도하셨다. 이 기간 중 하나님은 그에게 학문에 능한 한 사람을 인도해 주심으로 그로부터 성경 연구에 필요한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들과 언어들을 배우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추천으로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는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주역이 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목회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필요한 교과 과정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신학의 여러 영역들을 연구함으로 성경연구를 위한 기초를 더욱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런 인도하심 가운데 성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신학교와의 관계를 끊게 해 주시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 연구에 보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를 작품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미완성으로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 가운데 이루어 놓으신 모습을 보며 장내의 완성될 작품의 모습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실 때까지 일하기를 멈추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다. 여러분들도 스스로를 돌아볼 때 이와 동일한 간증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가운데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한 번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들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실 때 까지 결코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것처럼 생각 될 그 때에도, 그리고 답답한 일을 당한 것처럼 생각될 그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성탄의 첫 소식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번 성탄은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고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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