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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유다서

유다서 1장 5-7절 다시 생각나도록 - 이장우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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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유다서 1장 5-7절  
설교제목 : 다시 생각나도록
설교자 : 이장우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유다는 일반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습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란 인간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편지를 쓰려든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이런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는 자들이 나타났기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편지를 한 것입니다.

이런 은혜로 인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철저한 율법주의자인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얼마나 복음이 좋았으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순간에 가슴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인하여 복음의 내용보다 먼저 찬송의 말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14절을 봅니다. “봉독”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를 하는데 인사말이 끝나자 말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복음의 내용을 전합니다. 이 내용 전체를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나 바울이나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은혜를 입고 나니 그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 그것을 전하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오해하고 이용하는 무리들이 항상 등장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그러면 은혜를 더하려면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복음이 전하여지고부터 계속되어온 싸움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은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은혜만이 아니라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리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둘을 절충하는 것입니다. 신인협력설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볼만한 구절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유다서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면서 구약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다가 말하는 구약의 예들이 행함이 없어서인지 믿음이 없어서 인지를 추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다고 합니다. 이 범사를 알았다는 말은 그들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쓴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듣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니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곧잘 하는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정말 잘 잊어먹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행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원수도 오래도록 기억하면서도 받은 은혜는 얼마나 잘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어떻게 구원하여 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따라 때가되어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구원받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피 안에 있었던 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피의 능력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는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고서는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은 다 어디로 잊어버리고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 속에서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종이 되어 그들을 섬겼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고서 여호와의 구원을 찬송합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라고 모세가 찬송하고 백성들이 다 화답합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큰 구원을 보고서도 3일 만에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 동안은 믿음 없는 자들을 멸하시는 기간이 됩니다. 왜 멸하셔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출애굽한 후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사람들과 강한 성벽으로 되어 있기에 그들과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당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또 원망하면서 장관을 세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민수기14: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출애굽부터 홍해를 건너 시내산의 강림을 보고 지금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작은 글씨로 생각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뜻을 이해하도록 첨부한 글씨이지만 믿음과 연결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은 행함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은혜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한 것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렇게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셨기에 가나안도 은혜로 들여놓으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무엇을 생각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들의 손익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하고 중도에서 멸망당하였는가? 하고 물으신다면 역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시 나의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관심사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다 멸망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반석에 물이 나오도록 명하라는 것을 지팡이로 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않았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출애굽의 과정을 통하여 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가 이 편지를 쓰면서 왜 출애굽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생각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2-4:2절을 봅니다. “봉독” 광야 40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12절에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있을까 하여 매일 서로 피차 권면하라고 합니다.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처음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자들이 순종치 아니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6절입니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심판의 날까지 영원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합니다. 천사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일을 위하여 시중드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천사조차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처소에서 쫓겨나서 영원한 심판의 날까지 흑암에 가두어 두셨다는데 이 흑암의 세계가 이 땅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은 캄캄한 흑암의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이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싸움이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신은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비쳐졌다면 그것은 천지창조의 능력처럼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7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과 그 이웃의 도시들이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희와 같이’라는 이 저희들이 바로 거짓 선생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자들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에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 다른 색을 따라가고 음행한 소돔과 고모라성과 그 주변의 도시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여 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내용을 통하여 성경을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7절 끝에 보시면 거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거울을 왜 보는 것입니까?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봅니다. 머리나 몸을 살핍니다. 옷매무시를 살펴봅니다.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 자신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비추는 거울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날마다 거울을 보듯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서도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1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도 바울사도도 광야생활을 거울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이 되어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한번 따 놓은 면허증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필요할 때만 꺼내 써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은혜가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날마다 생각하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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