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1장12-16
설교제목 : 에녹의 예언
설교자 : 이장우 목사
1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받을 수가 없는 것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영적인 일에 대하여는 아예 감감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인 우리에게는 단번에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은 너무나 엄청나서 이 말을 하려고만 하면 가슴이 벅차서 찬송부터 터져 나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로 받고 그 다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이런 주장들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오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은혜로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은혜를 갚아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단번에 주신 그 믿음의 도는 은혜를 받고 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기에는 우리 평생에도 모자라기에 하늘나라 가서도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기쁨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나오는데 두 종류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우리가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다른 편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사람들 즉 은혜를 자기들의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리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서에는 어떤 자들을 경고하는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보고자 합니다. 왜 알아야 하는가 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는데 적을 알아야 싸울 것이 아닙니까? 다시 지난주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꿈꾸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행하여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가인의 길과 삯을 위하여 간 발람과 고라의 패역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12-13절에서는 이 거짓 선생들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며 애찬의 암초라고 합니다. 새 번역을 보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이 식탐이 많아서 마구 먹어대므로 분위기 망치는 사람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에 성도의 공동식사는 아주 중요한 교제였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단지 식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일 때 마다 애찬은 아주 중요한 성도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식사에 거짓 선생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와서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애찬의 암초라고 합니다. 그저 밥을 먹다가 돌을 씹은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배를 침몰시키는 암초와 같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암초는 아니지만 이번에 서해에서 유조선이 삼성의 크레인과 충돌하여 기름유출의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엄청난 피해가 왔는지 세 사람이나 자살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것처럼 단번에 주신 믿음을 버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비가 오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지난주일 오후에 스가랴서에서 늦은 비를 구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어서 제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와야 농사가 되는데 구름만 일고서 비가 오지 않으면 허망하겠습니까? 거짓 선생들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제에 뛰어들어서는 자기들이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인 양 큰소리를 치지만 그러나 빈말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나무인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나무는 거저 비바람에 썩어져갈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죽고 또 죽은 나무이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밥 먹고 활동한다고 해서 그것을 살아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의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시와 개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본능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본성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쓰기는 쓰지만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지 하나님의 은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은혜가 우리의 본성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24절에는 우리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들어오면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을 분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바다의 거품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를 때로는 교만한 세력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이란 무언가 거대한 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수치의 거품만 내는 거친 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들이 무언가 대단한 것 같고 위협적이지만 그러나 세상의 권세나 힘이라는 것은 얼마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시 지나고 보면 그 대단하다는 것들이 한낮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러나 영원의 빛에 비추면 그런 것들은 거품인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것입니다. 별들이란 각기 제 길이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5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제각각 창조주의 솜씨를 드러낸다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행성과 항성 모든 별들이 저마다 제 길을 돌면서 창조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제 길이 없어서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것입니다. 휙 하면서 지나가는 유성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흑암에 갇힐 운명이 거짓 선생들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유들은 결국 거짓 선생들의 허망함을 알게 하여 그들을 분별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는 이미 에녹 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것은 에녹 당시에도 예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는 지금도 해당되는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인간의 특징이란 언제나 같은 모습입니다.
창세기 5:21-24절입니다.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에 대하여서 이렇게 짧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유다는 에녹이 예언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창세기 설교를 할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봅시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렇다면 무드셀라를 낳았을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계시를 아들의 이름에 두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므두셀라는 무슨 뜻인가 하면 ‘창의 사람’입니다. 창이란 무기입니다. 창이 던져지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그것이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이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에 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이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에녹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신약이 유다가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봉독” 주께서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나타난 노아 홍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예언대로 므두셀라가 죽던 해, 노아 600세 되던 해가 홍수심판이 임하였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 300세 되던 해에 하늘로 들림을 받았고 므두셀라는 노아가 방주를 거의 다 만든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 죽던 해가 노아 600세 되던 해이고 그때 홍수가 났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죄악이 무엇이었습니까? 경건치 못함이었습니다. 경건이란 이 시대에 잘 사용하지도 않는 단어입니다만 글자 뜻은 정성껏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려 네 번이나 경건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 예언은 오늘 종말을 우리에게도 여전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1-7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 옛 선지자의 예언이 나옵니다. 노아 홍수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때나 지금이나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경건이란 바리새인 은 위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특징이 16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물로 심판하셨고 장차 불로 심판하실 것인데 그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특징들이 저에게 다 들어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보시니 해당되는 사항이 없습니까?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까? 불만이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다 원망과 불만이지 않습니까?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원망과 불만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원망과 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내 정욕대로 안 되니 원망과 불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영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자들이며 이익만 된다면 무슨 아첨이라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에녹의 예언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언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는 자들, 즉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불사르기 위하여 이 하늘과 땅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에녹처럼 동행하면서 그 분의 약속대로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어서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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