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3-4절
설교본문 :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설교자 : 이장우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사람들이 다들 새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가 새해입니까? 사람들은 2007년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에서 땡 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면서 새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서울 사랑의 교회 송구영신예배를 생방송 한다고 해서 보았더니 찬양을 하고 있다가 2008년 9초전부터 전교인이 카운트다운을 하고서는 박수를 치고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송구영신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동진에서 새 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 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새해라는 인사말을 문자로 보내셨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새해라는 말보다 의미를 둔 내용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새 해라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하지만 저는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멀쩡한 하늘과 땅을 두고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악이 관영하게 된 천지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예수님이 주인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양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45:18절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도 이런 말을 하면서 삽니다. 스바냐 2:15절입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구스만 이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이러한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선지자는 외칩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장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사람만 들어가게 하시는데 그 새 사람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직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모든 구원 얻는 자들은 은혜로 얻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구원에 대하여 인사말에서 보았듯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는데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것인데 이 구원의 도가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몇 년을 노력하여야 된다는 그런 조건이 아니라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도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 버리고 홀로 주재이신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방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주어진다고 하였습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공통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단번에 얻은 구원이기에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애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구원도 단번에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6:10절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7:27절에서도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제사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일어난 엄청난 일이 죄 사함과 거룩함과 영생을 다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려다가 이제는 이 놀라운 소식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한번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살더라도 구원은 따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지만 얻은 것은 죄 짓는다고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어차피 썩어질 것이니 육체를 가지고 온갖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가지고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은혜를 주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까지 않고 바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고서도 뻔뻔스럽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든지 그렇게 이용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교회역사에서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오직 믿음만이라고 하니 방종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종하게 하지 않도록 율법이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 생활의 규범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중에서도 제사법이나 시민법은 또 아니고 도덕법만 유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을 묶어두지 않으면 방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3-5절입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무엇을 노립니까? 복음의 진리로만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두 가지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쪽은 모든 것이 은혜이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편에는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율법의 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둘 다 결국은 무엇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까?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일을 하고자 오직 은혜이기에 내 육체의 욕망대로 살겠다는 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율법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래도 복음만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율법적인 행함이 있어야겠다는 식으로 나옵니까? 아마 이 둘 사이에 왔다 갔다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니 내가 좀 편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나의 모습을 보니 너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율법적인 열심을 내려고 하니 그것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갈등이라도 있기는 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논쟁을 살펴보면 그 안에 무엇이 중심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의 구원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만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율법적인 행위를 강조하거나 간에 결국의 중심은 내가 구원받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파 같은 이단도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구원을 받고 싶었으면 이름이 구원파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구원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접촉하는 자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것입니다만 구원파의 주장들이 유다서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에 구원을 얻었는데 왜 또다시 속죄에 대한 찬송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왜 또다시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단번에 구원을 얻었기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중심내용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유다서에 나온 그런 이단들처럼 자기 구원확신 얻고서 자기 육체의 정욕대로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기록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며(요5:39). 천지만물의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골1:16).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따라 일반으로 구원 얻은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구원이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은혜가 임한 자는 그 은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은혜 받은 자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7-12절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승천하셔서 은혜를 주신 분이 지금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계시기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히 은혜를 받았다는 자들이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부분입니다. 아니 옛적부터 심판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받기로 작정된 자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1-12절입니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보전하는 자가 있고 멸망의 자식이 따로 있다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9절입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은혜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신약 > 유다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다서 1장 8-11절 꿈꾸는 사람들 - 이장우 목사 (0) | 2023.02.17 |
---|---|
유다서 1장 5-7절 다시 생각나도록 - 이장우 목사 (0) | 2023.02.17 |
유다서 1장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이장우 목사 (0) | 2023.02.17 |
유다서 1장 20-21절 자기를 세워 나간다는 것 - 성완석 목사 (1) | 2023.02.17 |
유다서 1장 17-23절 사랑하는 자의 일 - 김창인 목사 (1) | 2023.02.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