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5-10절
설교제목 : 꿈꾸는 이 사람들
설교자 : 최덕훈 목사님
은 유다서의 말씀이지만, 대단히 귀중하고도 힘 있는 말씀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축복의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3절,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말씀과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말씀은 기막힌 주의 축복을 나타냅니다. 다시 한번 5절의 말씀을 잘 새기면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의 뜻이 무엇입니까? 지식을 ‘한꺼번에’ 주셨기 때문에 다 알고 믿음 생활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지식의 내용은 고정된 것입니다. 물론 그 지식이 나타나는 양상은 늘 새로워야 합니다. 이런 성도의 지식은 오래된 것이요 동시에 날마다 새로운 진리입니다. 성도는 항상 ‘일반으로’ 즉 동일한 방법인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는 ‘단번에’ 첨가할 것도, 삭제할 것도 없는 믿음의 도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성도는 신앙에 필요한 지식에 대해 ‘범사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유다는 세 가지 심판사건을 예로 들면서 성도들의 귀중한 믿음을 잘 지킬 것을 부탁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믿음을 해하려고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8절,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날마다 근신하며 살 것을 교훈합니다. 이 ‘꿈꾸는 사람들’은 4절의 ‘가만히 들어온 자’들입니다. ‘가만히 들어와서’ 일반으로, 단번에, 범사를 알게 하신 믿음을 무너뜨리는 그 경향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꿈꾸는 이 사람들’은 이단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롬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하셨습니다. 유다는 꿈꾸는 이 사람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의했습니다. 10절,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꿈꾸는 이 사람들의 지식은 ‘이성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들이 안다는 것은 ‘짐승처럼 본능으로 아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들의 지식이 영적이며, 사실적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요, 단지 감각적이요, 감정적이며, 지극히 본능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지식에 유혹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잘 말씀합니다. 벧후 2:12,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꿈꾸고 있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믿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결국 세 가지 심판으로 교훈합니다. 이 사건들은 거울입니다. 7절,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신실한 믿음의 모습으로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첫째, 출애급 사건의 교훈입니다.
5절,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출애굽사건을 제일 먼저 예로 듭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종종 교회와 믿음생활에 비유됩니다. 출애굽은 구원이요, 광야는 믿음생활이요, 가나안 입성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유다는 8절에서 이런 세 가지 교훈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은 ‘영광을 훼방하는 방법’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하셨습니까? 출 12:27-2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중다한 잡족이 함께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중다한 잡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출 9:10,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에서 보는 것처럼,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따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믿은 자들 모두라고 해야 옳습니다. 민족적으로, 인종적으로 구분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믿음으로써 출애굽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멸망되었습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불신앙 때문입니다. 시 106:25-26,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어지게 하고’ 말씀합니다. 길 때문에, 음식 때문에, 물 때문에, 지도자문제로 계속적으로 원망하면서 그들은 불신앙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민 14: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알았으나’ 즉 신앙의 지식은 있으나, 원망과 불평과 감사치 않음의 이런 행위로써 불신앙에 나아가도록 꿈꾸는 자들이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면 곤란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현실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도록 인도하실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단지 지금 나타나는 잠간 동안의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가지고 불신앙의 모습을 가지는 자들은 ‘본능으로 아는 지식’에 의존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승리해야 합니다. 불신앙과는 싸워야 합니다. 믿음은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둘째, 천사 사건의 교훈입니다.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권위를 업신여기는 죄악’입니다. 8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벧후 2:4, ‘범죄한 천사’라고만 밝혔는데, 유다는 그 천사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습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죄’ 그리고 ‘자기 처소를 떠난 죄’입니다. 한마디로 여러분이 표현한다면, 어떤 죄악입니까? 그렇습니다. 교만입니다. 꿈꾸는 자들은 스스로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교만한 자리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로 이끌고자 합니다. 사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목표는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유혹할 때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시험할 때의 그의 마지막 요구가 무엇이었습니까? 마 4:9,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노골적인 교만이 드러난 곳이 어디입니까? 사 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입니까? 15절,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살후 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각기 임무와 사명과 지위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이며, 감사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마는 이런 지위와 처소에서 떠나는 교만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심령의 문제입니다. 교만하다는 평가는 사람이 하기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만을 느낄 수는 있으나,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의 말씀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천사장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미가엘(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도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미가엘은 자기의 지위를 지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판결하시도록, 자신의 할 일만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교만의 죄를 부추길 때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신앙의 거울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위와 처소에서 충성하기도 바쁘다고 고백해야합니다. 겸손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믿음 지키는 귀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셋째, 소돔과 고모라 사건의 교훈입니다.
7절,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육체를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이제는 육적인 문제입니다. 8절,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인 죄악은 유명합니다. 롬 1:26-27의 고발이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의 폭로와 같아 보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보면, 요즘의 AIDS같은 병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보면, 불로 심판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성적인 죄악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오히려 구분하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육체를 더럽히는 죄악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압니다. 마치 우리는 벧후 2:7-8에서의 롯처럼 되었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와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꿈꾸는 자’들의 유혹은 육체를 더럽히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결정적인 올무가 됩니다. 통일교가 주관하는 소위 지도자급을 위한 선심행사에는 반드시 미인계가 들어있다는 근거 있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다. 이 미인계에 걸리면, 아무도 통일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단종파 가운데 ‘육체를 더럽히는 성적인 죄악’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과연 10절,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결국 멸망당합니다. 우리는 경성해야 합니다. 꿈꾸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숨어 들어와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멸망의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멘. 우리의 육체를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보배로운 예수를 모시고 있는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십시요.
말씀을 맺습니다.
출애굽 사건 교훈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불신앙을 배격해야 합니다.
천사사건 교훈에서 자리를 떠나는 교만의 심령적인 죄악을 조심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교훈에서 육체를 더럽히는 육적인 죄악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꿈꾸는 사람들의 유혹을 과감하게 배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일반으로 얻은 구원, 단번에 주신 믿음, 범사에 아는 지식을 가지고 승리의 길을 걸어나가야 합니다. 언제나 풍성한 축복 속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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