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16-25
설교제목 : 긍휼히 여기라
설교자 : 김영선 목사님
유다서(Jude)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snatch others from the fire and save them; to others show mercy, mixed with fear--hating even the clothing stained by corrupted flesh)” NIV
[가라지 마저도…]
어떤 이가 어린 딸과 산지에서 양을 칠 때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가시덤불을 떼어 냈으나 온 몸에 상처 입어 불쌍히 여긴 딸은 아버지에게 저 나무를 잘라 버리자고 제안한다. 얼마 후 도끼를 가지고 가니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나무 위에서 양이 남겨논 떨을 모아 물고 가는 것이었다. 새에게 집을 짓기 위해 떨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 자연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으며 우리의 수고로 얻은 것이 가시라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가라지도 가시 나무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세상 심판 날에 따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긍휼히 여기라’라고 말한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돕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 ‘엘레에모네스’입니다.
이 시대는 무한 경쟁 시대로서 긍휼을 베풀고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불이익이며 패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인 마저 긍휼을 단지 종교적 용어에 불과하여 양을 탈을 쓰고 살아가는 자가 적지 않으며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정죄하며 해치는데 익숙해 지지 않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마 18장,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어떤 부자로부터 빚을 갚을 길이 없던 자가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문을 열고 나갈 때 마침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강요한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만 가혹하게 감옥에 넣었다는 소식을 부자는 듣는다. 그래서 그를 불러 긍휼을 받은 자가 왜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지에 대해 묻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인다. 이처럼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긍휼로 마음과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가능합니다.
•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단 사설과 거짓 교사의 유혹이 있게 마련 입니다. 사도 바울도 옛 질서에 속해 회심하기전 율법에 헌신하며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였고 주님의 친 동생 유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사건 이전까지는 그의 신성을 부인한 자 였습니다.
이와 같이 저자 유다는 불신앙적 영적 무지에서 돌이켜 마침내 오순절 교회 중심으로 아내와 순회 전도 사역을 하게 됩니다.[행 1.14, 고전 9.5]. 이처럼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던 자가 새 사람이 된 것처럼 이단들에 대해 단호하고 철저히 경고 선포한 그가 갑자기 성도들에게 사랑을 권면하며 유혹에 넘어간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풀라고 권면함이 매우 자연 스런 것 입니다.
• 22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23절, “또 어떤 자들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여기서 ‘의심하는 자들’, 은 문자적으로 ‘다투는 자들’이란 뜻이며(9절 참고) ‘긍휼히 여길 자’는 ‘육체로 더럽힌 옷’ 즉 더러운 옷을 입고 살갓에 달라 붙게 입고 있는 상태로서 불 경건한 자들이 육체적 죄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을 의미하며,
• 복잡한 자를 회복시켜 주며
• 위험한 길에서 돌아오게 할뿐 아니라
• 죽음에 처할 상황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다른 가능성이 있는 자를 주께 돌아 오게 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구체적으로, 돌아 올 수 있는 자는 Weak person이라고 하며 나약한 자로서 시험으로부터 회심과 기도로 겸손하게 자신을 뒤돌아 보는 자 입니다. 그러나 돌아 올 수 없는 자를 willful person이라고 하며 그 자신만의 확신하는 길을 정한 자로서 마치 가인과 같은 자를 말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why should not we? 우리는 왜 포기해야 하는가? 라고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 over-do하는 경향이 있다
•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며 정직하다고 믿는다.
•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긍휼히 여기되 기억해야 할 교훈은,
1.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2. 거룩한 진리 위해 나를 지키라
3.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라
첫째,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합시다 (17-19)
• 17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주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 눅 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초대 교회 주의 제자들이 모두 예언 한 말 들 입니다.
• 벧후 3.2-3, “곧 거룩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무엇보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무서운 자들은 당을 짓는 자들이다.
•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는, 믿음의 확신, 견고한 믿음, 그리고 신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Not think it strange, 그러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Do not say that this will always be so, better than God himself.
둘째, 거룩한 진리 위에 있으라 (20-21)
• 20-21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1.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20절)
Building yourselves,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해야 하는 것처럼 자기의 것으로 자기를 짓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 즉 3절의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으로 지어야 할 것이다. 그 믿음을 주신 순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난다. 이전에는 느낄 수도 없었고 깨닫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 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알아보는 삶을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다.
금, 은, 보석이요, not wood, hay, stubble이다.
• 고전 3.12-1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2. 성령으로 기도하라(20절)
기도는 믿음을 돕는 것이다. 믿음의 건축 위에 계속 기도해야 한다.
•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 얼굴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 요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제일 많이 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열한 사도입니다. 그들은
• 직접훈련을 받았습니다.
• 절름발이가 일어나 걷고, 소경이 눈을 뜨며 더 나아가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 십자가 지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 그들 제자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 제자들이 부름받은 것으로, 교육 받은 것으로, 이름만으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 성령으로 기도하여 변화 받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1절)
예수 닮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예수의 종으로 나를 건축했다면 그 집을 바로 보호하고 유지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 있음과 같습니다.
영생의 완성은 장차 이루어질 때까지 부패한 세상에서 살아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긍휼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특히 2절에서처럼, 당시 상황으로 보아 긍휼을 의지해야 할 때 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자비(긍휼)을 통해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간청도 아닙니다.
이 긍휼은 주님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므로 마치 결혼 날을 기다리는 신랑처럼 여행 날을 기다리는 여행 객처럼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나를 건축하고 지키어 그날을 기다리는 것 입니다.
셋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24-25절)
•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마라톤 선수와도 같아 삶의 경주를 마지막까지 달려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작은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이미 우리 주님은 삶의 마라톤을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그의 경주를 마치셨다.
마치는 비밀은 앞을 잘 바라 보아야 한다. 기쁨의 상을 바라 보아야 한다. 삶의 경주를 해야 하는 그 상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그분과 함께 eternal life를 위해서 말이다. [The Christian’s race is not a competitive event but an endurance run]
지금 우리는 어떤가?
• 왜 Too many look하는가
• As it is uncertain
• But it will come, everyone shall wee him.
• 계 1.7, “볼찌어다 그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This is now the object of our faith
It will be the object of our sense
We now believe in,
Him we shall shortly see
•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거룩하고 완전한 기쁨이…[We may well, our heart Amen.]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거룩한 진리 위에 있으라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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