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24-25절
설교제목 :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설교자 : 김태환 목사님
유다1: 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24 Now to Him who is able to keep you from stumbling,
And to present you faultless
Before the presence of His glory with exceeding joy,
25 To God our Savior,
Who alone is wise,
Be glory and majesty,
Dominion and power,
Both now and forever.
Amen. (NKJV)
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땅히 죽었어야 할 고라(Korah)의 자식들을 살려 주셔서(민수기 26:11), 그들로 하여금 훗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게 했습니다. 그 후손들 중에 훌륭한 음악가가 나오고, 시인이 나왔습니다. 그 후손 중에 한 사람이 쓴 것이 시편 42편,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한 영혼이 목마르게 하나님을 찾는 이 아름다운 시편을 고라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이 썼습니다.
오늘 읽은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다가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에게 남동생이 네 사람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마가복음 6:3)이었습니다. 그리고, 누이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예수님의 동생들이 별로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예수님이 사역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5).”
아마도 예수님의 동생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유다도 예수님의 사역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족을 책임져야 할 예수님은 그런 것을 안중에 없는 것 같고,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떠나지 않는 그의 형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후에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행적이 분명히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같은 형제였던 야고보는 이미 초대 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 크리스천이 된 바울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거기서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단 두 사람만 만나는데, 그 두 사람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갈라디아서 1:18-19). 이 말씀은 그 때 야고보의 위치가 베드로와 맞먹을 정도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 진 것이 없지만, 그는 유다서를 기록함으로써 크리스천의 믿음 형성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유다가 기록된 연대를 A.D. 70-80 사이로 잡습니다. A.D. 70년이면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완전히 파괴된 해입니다. 그 때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치명적인 해였습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이 극성을 부리면서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영지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록된 성경으로는 유다서가 유일합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은 영과 육으로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 위에 세워진 사상입니다. 영을 선이라고 하고 육을 악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상이 교회에 교묘하게 흘러 들어와서 복음의 본질을 흐려 놓았습니다. 그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에 영지주의의 공격으로부터 복음을 지키려는 시도가 있긴합니다만,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유다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유다 역시 초대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런 종류의 말씀을 우리는 “송영(Doxology)”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나 노래를 통틀어서 “Doxology”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영광을 찬송한다”는 뜻으로 “송영(頌榮)”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영광을 돌린다”는 뜻으로 “귀영(歸榮)”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는 많은 송영들이 있습니다. 이런 송영들을 교회에서는 주로 예배를 마치면서 “축복의 기도(Benediction)”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이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기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이런 축복 기도 역시 성경 고린도후서 13:13에 있는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 읽은 유다서 말씀도 “Doxology,” “송영”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죽을 고비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영광의 하나님 앞에 흠 없는(faultless) 사람으로 세우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질 고비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믿음을 포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싶은 유혹으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자신 앞에(to Himself) 흠 없는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이 안 되는 말씀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말이 되는 말씀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 되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to Him who is able to keep you from stumbling, and to present you faultless before the presence of His glory with exceeding joy.” 직역하면, “넘어짐으로부터 당신을 지킬 수 있는 분에게, 그리고 당신을 넘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현존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내 놓으실 그분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도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짐으로부터(from stumbling) 지켜 주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흠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흠(fault), 결점, 결함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흠 투성이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 자신은 그야말로 흠 투성이 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 날이 오면(when that day comes),”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현존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이 오면,”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 때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결코 완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우리는 아무 흠이 없이,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NKJV에 “넘치는 기쁨으로(with exceeding joy)” 그랬습니다. 이 기쁨은 누구의 기쁨입니까? 이 기쁨이 누구의 기쁨인지 알면 그 사람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한 것입니다. 이 기쁨이 누구의 기쁨인지 모르면 그 사람은 오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넘치는 기쁨이 누구의 기쁨입니까? 이 기쁨은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서게 될 우리의 기쁨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기쁨입니다.
말이 되든지 되지 않든지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우리에게 유효(有效)하게 되려면, 단 한가지 조건만 지키면 됩니다. 그것은 25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유효하게 되려면 이 조건만 지키면 됩니다. 우리가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속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유혹에서, 모든 넘어짐에서, 모든 절망에서, 모든 실패에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요한복음 18:9)”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0).”
이 말씀들을 한번 종합해 보십시오. 누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에게 주신 사람은 주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받으신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그리고 그 날에 그 사람을 흠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십니다. 그 때 우리의 가슴은 “넘치는 기쁨으로(with exceeding joy)”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던 기쁨을 그 때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약속이 우리에게 유효하도록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분과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가졌던 삶의 목적과 비전을 나의 것으로 삼으며, 그분의 신실한 제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그런 삶을 신실하게 살겠습니까? 말 그대로,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의 삶에 이런 결단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모든 위선을 벗어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에서 깨워주실 때 주님이 내 등을 떼미시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홀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 홀로 참 지혜자이십니다. 그분 홀로만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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