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20-21절
설교제목 : 자기를 지킨 사람들(1) 요셉
설교자 : 이민재 목사님
[도입: 남과 여]
오늘은 최근에 제게 강한 인상을 남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남자: 전직 검찰. 현직 국회의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1야당 사무총장 및 공천심사위원장.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당내 모든 직책 사임. 이어서 탈당. 심지어 현재에는 국회의원 사임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음. 한때 사임이 임박했다는 보도들이 있었으나, 다음 주에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겠다는 말과 함께 일단 유보함. 그 이유는 함께 지내던 동료 의원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그랬다고 함. 이 남자가 이렇게 된 것은 술자리에서 한 여기자를 성추행했기 때문. 그러나 술에 취해 음식점 주인인줄 알고 그랬다는 그이의 얼빠진 해명에 요식업 주인들이 항의하는 웃지 못할 희대의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정리될지 귀추가 주목됨.
한 여자: 전직 법무장관. 현재 정부 여당의 서울시장후보 1순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서울 시장 출마 요청을 선뜻 수락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함. “서울시장 출마 여부는 공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사회활동에서 내가 드러냈던 철학, 성격, 언행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게 흔들리면 당락 여부와 상관없이 패배라고 본다. 그러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더라도 아름다운 패배일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흔적이 보임.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함. “당선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과대포장하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하거나 하는 추한 꼴을 보이면 안 되는데 새로운 영역, 그것도 매우 위험한 영역(선거)에서 나를 지킬 수 있겠느냐.”
[자신을 지킨다는 것의 중요성]
먼저 말씀드린 남자는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평생 쌓아올린 업적과 명예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는 그 분이 상습적으로 그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을 뽑아준 지역구에 있는 성폭력상담소 이사장이고, 1997년에는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에 힘쓴 공로로 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일도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중에 말씀드린 여자의 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많은 사람이 자천 타천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있는 서울시장후보 수락을 선뜻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 참 신선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 쌓아올린 업적과 명성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고,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자기 지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의 본문인 유다서 1절을 읽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1)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지키심을 받은 자’입니다. 사랑은 지조와 절개를 지킬 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봉헌되기에 알맞은 상태로 우리를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흠없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죄와 불의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우리를 표현하면서 편지를 시작한 유다서는 말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21)고 적극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지키고 있습니까? 자신을 지키려고 날마다, 매순간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지킬 것을 이 시간 진지하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거니와,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 쌓아올린 업적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을 지키게 합니다.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합시다. “이제부터 나는, 나를, 지키겠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로 정했는데, 그러기 위해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가, 자기긍정, 둘째는 자기성장! 셋째가 무엇이지요? 네, 자기유지입니다. 자기유지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기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나중엔 자신을 증여하고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이기적이며 사악한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고 증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유지에 힘써야 하고, 자기 지키기에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작은 일로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자신을 지키지 못합니다. 너무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한다고 따라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먹칠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술]
자신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중 으뜸은 술입니다. 첫 번째 말씀드린 남자의 경우도 폭탄주를 많이 마셨다고 합니다. 술이 웬수라는 거죠. 그래서 며칠 전에는 어떤 퍼포먼스까지 있었느냐 하면, 폭소클럽(폭탄주소탕클럽) 회장이라는 박 아무개 의원이 기자들을 불러놓고 폭탄주를 망치로 깨는 의식까지 치렀다나요?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린 걸 제가 봤습니다. 애꿎은 술잔 깬다고 술을 안 마시나요? 자신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폭탄주 술잔 수백 개 깨봐야 다 웃기는 쑈에 불과합니다. 정말 폭소개그에 허무개그가 겹친 짬뽕개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그런 폭소개그하면 국민들이 감동을 받을 줄 아는 겁니까? 머리가 나쁜 건지, 국민을 졸루 아는 건지. 정말, 왜들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런 퍼포먼스를 보도한 기자가 자기도 답답했든지 기사 말미에 이런 추신을 달아놨습니다. “추신: 참 박 아무개 의원님, 기자회견장에서 폭탄주 잔 깨시고 왜 그냥 가십니까. 깨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더군요.” 한 마디로 진정성이 없다고 꼬집는 말입니다. 쑈 그만 하라는 얘깁니다.
차제에 술 얘기 좀더 합시다. 여러분 술을 우습게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술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사귀지도 말라”(잠23:20)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23:20-21) 잠언23:29-35는 압권입니다.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우리 사회는 술 권하는 사회입니다. 술 상무라는 말도 있듯이 술을 마시지 못하면 사업도 제대로 못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그래서 마시지 못하는 술도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문화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된 일이라고 박수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술 문화에 대해 관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주의자처럼 술을 율법적으로 엄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성경 자신이 술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술을 엄격하게 금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허용하는 듯한 경우 한 예를 들면, 잠언 31장 6절입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이때 허용하는 것은 치료의 의미에서만 허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경우가 딤전 5장 23절에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 사도께서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때도 치료의 의미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성경은 술에 대해 관대하지 않습니다. 술은 사람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의 완성과 성화를 목표로 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금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술은 경건생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제 친구 목사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좀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남선교회 회원들이 교회 모임을 하고 난 뒤에 종종 부부들이 모여 술 마시며 뒤풀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래방도 가곤 했다는데, 그때 그 모임에 참석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부가 그 다음 주로 교회를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무 근본주의적이고 율법적인 것 같아 술에 대해 엄격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이 생기고 보니까 고민이 되더라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건 고민거리가 못된다. 기독교는 한 사람의 소외된 사람을 위한 종교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 양 제쳐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 찾아나선 것 아니냐, 따라서 아무리 율법적이고 근본주의자처럼 보일지라도 술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술 문제로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99%라도 그것은 중단되어야 한다, 단호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술 문제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생활의 문제다, 술을 마시는 것과 마시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경건생활에 유익한 것이냐,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냐, 술은 경건생활의 독이다, 따라서 그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공적 모임이 술자리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뭐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가서 부흥회한 교회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남자 성도들과 친해지려고 자신은 마시지 않으면서도 술이 오가는 자리에 이따금 어울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주 인간적으로 친밀해지긴 했는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더라는 겁니다. 술자리에는 열일 제쳐두고 모이는 사람들이 교회행사나 기도회에는 가뭄에 콩나듯이 참석하는데, 이래서 되겠느냐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목사님께도 간단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당장 그만 두시라고요. 그리고 교회의 공적 모임이 술자리로 이어지는 것을 엄금하라고요.
이런 고민은 사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겪고 있는 고민입니다. 대개 남자 성도들이 겪는 고민일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목회경험을 통해 보건데 공적 모임이 술자리로 이어지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 공동체의 경건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대개 그런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게 마련인데,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영적 상태가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영적 상태는 무의식적으로 전염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 타락을 이기려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쓰여야 할 영적 에너지가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데 다 소모되기 때문에 교회는 성장은 둔화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통하여 사귀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신앙적으로 살려고 분투한 이야기를 서로 나눠야 하고, 신앙적으로 실패했다가도 그렇게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긴장하고 영적 고삐를 당기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술에 대해 결코 관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킨 사람 요셉]
이제 술 이야기 그만 하고, 요셉이 어떻게 자신을 지켰는지 살펴보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첫째, 요셉은 집단의 불의에 동조하는 것에서 자신을 지켰습니다. 창세기 37장 2절을 봅시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엇인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요셉의 형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무시했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렸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읽으면 요셉을 치사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이 다수, 즉 집단이 행하는 불의에서 자신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수가 항상 선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잘못하고 있을 때, 그것에 대해 ‘아니오!’ 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요셉은 그 ‘아니오’를 할 줄 아는 드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열한 명의 형제들이 한 통속이 되어 불의를 행할 때 그것의 잘못됨을 분명히 말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경우들이 닥쳐옵니다. 집사인줄 알면서도, 권사요 장로인 줄 알면서도 한 잔 하자고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 가자고 합니다. 좀 주저하기라도 하면, 어허 이 사람 소심하게 왜 그래, 다른 사람들 다 하던데 뭘, 그깟 것 갖고 뭘 그래, 하면서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 됩니다. 못합니다.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엔 그렇게 못했다 하더라도, 이젠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으니 믿음이 그만큼 자라지 않았습니까?
둘째, 요셉은 개인의 달콤한 유혹에서 자신을 지켰습니다. 창세기 39장 7절 이하를 읽어봅시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요셉은 달콤한 성적 유혹에서 자신을 지켰습니다. 요즘은 도처에 성적 유혹이 널려 있습니다. 요즘 따라 성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 만큼 성적 유혹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며, 그 성적인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을 통해 은밀하게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은 성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돈을 앞세워 유혹할 수도 있고, 승진을 미끼로 유혹할 수도 있고, 미래보장, 유학, 실적 등등 우리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는 모든 것들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쉬우나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꿀단지에 빠진 파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즉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셋째, 요셉은 마음의 악성감정에서 자신을 지켰습니다. 요셉이라고 마음에 상처가 없었겠습니까? 형제들한테 살해당할 뻔하고,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온갖 고생 다 하면서 요셉의 마음에는 원망이 없었겠습니까? 분노가 들끓었을 것입니다. 복수심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자세히 그런 보도를 하지 않지만,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악성감정에 사로잡혀 복수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요셉은 마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성경에 아름다운 말이 많지만 창세기 45장 5절 같은 구절은 정말 너무 아름다운 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같은 45장 7-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로마서 12장에 14절에 나오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구절이나 17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구절, 그리고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말씀이나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요셉은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악성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요셉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마음을 지키십시오. “모든 지킬만한 것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요셉은 친밀한 집단의 불의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라는 개인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복수심이라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삼중적 자기지킴입니다. 하나도 힘든데 집단과 개인과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켰습니다. 대단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이런 요셉을 모범삼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도전하는 친밀한 집단의 유혹, 개인의 유혹, 마음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 나갑시다.
[교회, 십자가, 성령]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죽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는 사교클럽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혼자서는 불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대중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잘못된 것을 아니오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시대의 불의와 어둠을 이겨나가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은명교회는 사교클럽입니까? 만일 교회가 이 시대의 불의와 대적하는 힘을 길러주지 못한다면, 그냥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과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기만 하는 곳이라면, 그것은 6층의 무도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혼자 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불의와 싸우기 위해 서로 격려하고, 투쟁의 경험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우들의 관계는 밋밋한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만나는 동지들을 만나면서 여러분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아니오를 이 세대를 향해, 이 시대의 잘못된 관행들이나 관습들을 향해 발언하면서 자신을 불의에서 지켜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왜 십자가가 필요한줄 아십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날마다 말하고, 묵상하고, 증거하는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향해 밀어닥치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유혹이 사라집니다. 십자가를 앞세우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줄 아십니까? 우리의 악성감정을 선한 감정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감정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악성감정과 부정적인 에너지를 선한 감정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형시킨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남을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슬퍼하던 사람은 희락으로 충만해집니다. 다투기 좋아하던 사람은 평화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성급한 사람은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남을 못살게 굴던 사람이 선량한 사람이 됩니다. 주의 일을 외면하던 사람이 충성스런 일꾼으로 변합니다. 성격이 모질었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방종했던 사람이 절제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오늘 우리는 3월을 맞이하여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머리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진정한 교회의 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홀로 하지 못했던 이 시대의 집단적 불의와의 싸움을 함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여러분의 정과 욕심을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 안에서 악성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시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처럼, 그리고 요셉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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