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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유다서

유다서 1장 1-25절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 차용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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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유다서 1장 1-25절

설교제목 :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설교자 : 차용철 목사님


<서론>
  본 서신은 공동서신이 전형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반박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신자들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을 강력히 권고 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인사말(1-2절), 기록 동기와 목적(3-4절), 심판에 대한 실례들(5-7절), 거짓교사들의 특성과 결국(8-16절), 마지막 권면(17-23절), 축복(24-25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론>
     1. 인사말 (1-2절)
 
  ①자기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로 밝혔습니다. 유다(Jude)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야고보의 형제 유다임을 밝힌 것입니다. 성경에도 유다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판 가룟인 유다 (막14:10), 12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아들 유다 (눅6:16, 행1:13), 예수님의 형제이자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마13:55)가 있습니다. 본 절에서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 유다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은 후에 남편 요셉을 통해 낳은 아들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었고 딸들도 있었습니다 (막6:3). 성경에 야고보(James)라는 이름도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12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 예수님의 형제 (첫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본 절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가 (요7:5) 예수님이 부활한 직후 예수님의 부활체를 목격한 후에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는 사도들과 함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있었고 (행1:14)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행15:13, 갈1:19), 야고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다는 야고보처럼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사도들과 함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있었고 (행1:14) 순회 복음전파 사역에 참여했고 (고전9:5)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쓴 글의 권위를 위해 이미 잘 알려진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형제임을 밝히는 동시에 예수님의 형제임을 밝힌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습니다. 문장 구조로 보면 '야고보의 형제'라는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이 앞에 나옵니다. 유다는 자기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다는 사실보다 예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혈연적 시각을 넘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를 위해 사는 종이라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과 사역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혈통적 위치보다 주님의 종이라는 위치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혈통을 무시하거나 혈연관계에서 무책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순종하고 형제를 돌아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6:1-2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했습니다 (골3:20). 디모데전서5:8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를 위함보다 주를 위함이 더해야 합니다. 주를 위하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위배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부모형제를 더 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주를 위하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위배된다면 우선순위에서 밀쳐 놓아야 합니다. 우선순위로도 안 되는 일이라면 단호히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혈육에 속한 어머니 마리아를 누구보다도 공경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걱정하여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믿을 만한 제자 요한에게 '이는 네 어머니라' 하면서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요19:27). 요한은 그 후로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고 예루살렘에 환난이 있을 때에 에베소로 모셔 와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예수님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방해될 때는 어머니가 사역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요2:4).     
 
  그리고 '종'이란 말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종'(δουλοs)은 원래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노예를 말합니다. 이 종은 인간의 존엄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치 소유물처럼 취급되는 종입니다 (Cranfield). 이 종은 자주권이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사여탈권이 오직 주인에게만 있습니다. 또 자의권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합니다. 또 소유권이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주인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이라는 위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권위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권위는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으려는 데 나타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주의 종'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을 부리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는 데에 사용합니다. 주의 종은 주께 절대 복종하는 삶입니다. 나는 없고 오직 그만 있는 삶입니다. 그 삶에는 희생과 고난이 따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②수신자에 대해 밝혔습니다. 
 
  1절에 보면 유다는 수신자들이 어느 지역에 거하는 자들인지 생략한 채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κλητοιs, called)는 바울도 즐겨 사용하던 표현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부름받은 자에 대한 신학적 표현입니다 (롬1:6, 고전1:24).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낸 데서 유래한 말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도를 세상에서 불러낸 것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얻은 자입니다. 과거에도 사랑을 얻은 자이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사랑을 얻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가진 사랑은 성도의 삶의 근원입니다. 또한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최후 심판의 날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요17:11, 15, 살전5:23, 벧전1:4-5). 하나님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 친히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5:18). 이 표현은 당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그릇된 교훈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수신자들을 지켜 주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은 성도의 삶의 목적입니다.
 
  ③수신자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2절에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했습니다.
 
  '긍휼'(ελεοs)는 문자적으로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인데 이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구원을 베풀고자 하는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한 모든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평강'(ειρηνη)은 히브리어 '살롬'을 번역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평안' '평화' '화평'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여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자유하게 함으로 인한 평안을 말하고, 죄인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누리는 평안을 말하고, 최후 심판 때까지 보호하여 보존한다는 약속이 유효하게 하여 누리는 평안을 말합니다. '사랑'(αγαπη)은 조건없이 여전히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긍휼과 평강을 포함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전히 주어집니다. 당시 수신자들이 이단들로부터 많은 수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들임을 확인시켜 주고 그 은혜가 더욱 많아지기를 축복했습니다. 오늘날 힘든 상황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긍휼과 평강을 의지하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록의 동기와 목적 (3-4절)
 
  ①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는 권고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편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내용의 권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편지의 강력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서 '일반으로 얻은'(κοινηs)은 '공통의' '공동의'(common)의 뜻입니다. 곧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데 그것이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서 '믿음의 도'(πιστει)는 '믿음'(faith)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곧 복음 진리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단번에'(απαξ)는 '한 번에' '한 차례에'(once)의 의미입니다. 곧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냄'(once for all -NASB)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단회적이고 그 효과는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성령의 단독적이고도 불가항력적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그 단번에 얻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울 것을 권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②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는 권고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4절에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수신자들에게 단번에 얻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지키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은 당시 그들에게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수신자들에게 구원론에 대해 쓰려고 하다가 이미 얻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우라는 내용을 쓴 것은 바로 가만히 들어온 그들 때문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은 당시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성도의 믿음을 떨어지게 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공동체에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초대교회 때 기승을 부렸던 영지주의 이단을 말합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영적 지식(靈知)을 깨달으므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과 합일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헬라(그리이스) 플라톤(Platon) 철학의 이원론(二元論)의 영향을 받아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극단적으로 금욕주의(Asceticism, 禁慾主義)로 흐르는 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주의(Hedonism, 快樂主義)로 흘렀습니다. 유다는 그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경계시켰습니다.
 
  첫째, 가만히 들어온 자들입니다. '가만히 들어온'에 해당하는 헬라어 παρεισεδυσαν(파레이세뒤산)의 기본형 παρεισδυνω(파레이스뒤노)는 '···옆에'에 해당하는 παρα(파라)와 '···안으로'에 해당하는 ειs(에이스)와 '가라앉다' '잠기다'에 해당하는 δυνω(뒤노)가 결합된 단어로서 안으로 비밀스럽게 몰래 침투하여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단들의 속성을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파괴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침투하는 이단 신천지(이만희)의 전략과 현상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판결'(κριμα)은 히브리어 '미쉬파트'와 같은 말로서 하나님의 징벌이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요12:47, 롬2:2, 히6:2, 13:4, 계16:5, 18:8). '옛적부터~기록된 자'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쓰여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거짓 교사 곧 이단들은 앞으로 5-11절에서 증명한 대로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기록된 대로 마지막 최후 심판 때에 심판을 받기로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셋째,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경건치 아니하여'에 해당하는 ασεβειs(아세베이스)는 '경외하지 않는'의 뜻으로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 대해 예배를 드리거나 계명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곧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방탕한 것'은 개역성경에서는 '색욕거리'로 번역했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기본형 ασελγεια(아셀게이아)는 '음란' '방탕' '방종' '무절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로 성적 방종에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막7:22, 롬13:13, 고후12:21, 벧전4;3, 벧후2:2,7,18). 여기에서는 성적 방종을 포함한 모든 윤리적 무절제를 포괄적으로 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자들은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 범죄하는 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다, 영만 영원하고 육은 소멸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쾌락주의(Hedonism, 快樂主義)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들은 계명(율법)에 대해서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어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율법폐기론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이 거듭난 자는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성적으로 방탕했고 윤리적으로 무절제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육(몸)의 구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롬8:23, 벧후3:18). 또한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계명을 지켜 성화를 이루어 가야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2:12, 요14:15,21, 15:10, 요일2:2-3, 롬12:2). 우리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 필요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데에 필요하고 성화를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합니다 (롬6:15, 3:20, 갈3:24). 오늘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행위구원론자들도 이단이지만 율법폐기론자들도 이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주재'(主宰)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δεσποτην(데스포텐)은 '주' '주인' '통치자'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한 분 뿐인 통치자입니다. 영지주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肉)은 악하고 죄행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육을 취했다는 것은 죄를 취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육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육체적 부활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 중 하나라도 부정하게 되면 구원자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 자는 하나님 자신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신성(神性)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인성(人性)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를 신인양성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하면 그가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육(肉,σαρξ)을 입고 오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1:1,14).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심판에 대한 실례들 (5-7절)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미혹하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성격을 말하면서 그들의 결국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에 가만히 들어와 방탕을 조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4절).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자들이라는 사실을 실례를 들게 됩니다. 그 실례들은 수신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시 기억하게 하여 믿음에 더욱 견고히 서기를 바래서 다시 회상을 시킨 것입니다.
 
  ①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입니다.
 
  5절에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가지 못하게 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애굽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고 애굽 추병이 쫓아올 때 홍해를 갈라 건너게 했습니다.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을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특히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으로 보고하는 말을 듣고 모두 원망하며 광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자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 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심판받아 죽었습니다  (민14:1-12, 신1:19-32, 고전10:1-10).
 
  ②천사들의 심판입니다.
 
  6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고 했습니다.
 
  이는 타락한 천사들 곧 사단과 그 무리들(마귀와 귀신들)이 받은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선한 천사들로 창조된 자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받은 자들입니다 (겔28:13-14). 그러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났습니다. '지위'의 기본형 아르케(αρχη)는 기본적으로 '시작' '처음'을 의미하고 지위와 관련되어서는 통치의 영역이나 권세를 의미합니다. '처소'에 해당하는 오이케테리온(οικητηριον)은 '거처' '처소' '주거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라고 자기 처소를 떠난'은 자기가 맡은 직책과 위치를 떠난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14:12).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사14:13-14). 하나님이 그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습니다. '흑암'으로 번역된 '휘포 조폰'(υπο ζοφον)은 직역하면 '흑암 아래로'이며 '조폰'의 기본형 '조포스'(ζοφοs)는 불 못의 어두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가두셨으며'의 기본형 '테레오'(τηρεω)는 '붙잡다' '유지하다' '보관하다'는 의미입니다. '큰 날의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하여 최후심판을 할 때를 말합니다. 최후심판 때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다는 것은 최후심판 때 심판을 받아 불 못(지옥)에 던져지기로 결정되었는데 그 때까지 그 불 못의 영향 아래 붙잡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벧후2:4, 계19:20). 곧 하나님이 타락한 천사를 과거부터 최후심판 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의미이며 하나님 나라의 은혜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계12:9). 타락한 천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장인 사단과 그를 따른 무리들인 마귀와 귀신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③소돔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받은 심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그 이웃도시들인 아드마와 스보임도 함께 멸망당했습니다 (창14:2, 신29:23).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방탕하여 죄악이 관영하므로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성읍입니다.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타락한 천사들과 같은 행동을 말합니다.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운 바른 위치를 지키지 않고 타락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에서 '다른 육체'(σαρκοs ετεραs)는 남자와 여자가 아닌,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가 성적 관계를 가지는 동성연애를 말합니다. 소돔성 사람들은 천사가 남자의 모습으로 롯의 집에 들어갔을 때 롯의 집을 에워 싸고 그 집에 들어간 자를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했습니다 (창19:4-5). '상관라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형 '야다'는 문자적으로 '알다' '이해하다' '경험하다' '관계하다'는 의미로서 성적관계를 말합니다. 그들이 롯에게 남자를 내놓으라고 할 때 롯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두 딸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소돔 사람들은 이성성적으로 타락했을 뿐 아니라 동성연애까지 하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읍들을 유황불로 멸망시켰습니다 (창19:24-25). 그들을 영원한 불의 형벌로 후대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게 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타락한 천사들과 소돔 고모라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심판받았고 타락한 천사들은 교만하여 자기 위치를 벗어났기 때문에 심판받았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성적으로 방탕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 실례들을 통해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하나님이 세운 위치를 떠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자들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임을 암시적으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택함을 받지 못한 소돔 고모라 사람들처럼 불택자들이라도 타락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천사들처럼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도 타락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구원에서 구원적 선택을 받은 자들은 궁극적으로 지옥에 가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여 은혜생활을 하는 자라도 그 위치를 떠날 수 있고 타락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거짓교사들의 특성과 결국 (8-16절)
 
  8절에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쾌락주의로 기울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임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그들에 대한 특성을 언급합니다.
 
   1) 거짓교사들의 특징
 
  ①육체를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8절).
 
  '육체'는 헬라어로 싸륵스(σαρξ)로서 보통 육(肉)으로 번역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을 터득하므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주장하고, 영은 범죄하지 않고 육이 범죄한다고 주장하고, 영은 영원하고 육은 멸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편으로는 금욕주의로 기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쾌락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쾌락주의로 기울어진 자들은 살면서 범죄해도 그 범죄의 주체는 영이 아니고 육이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쾌락과 향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영혼과 육체, 혹은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누어 설명하든 모든 요소가 다 하나님이 선하게 지은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범죄했을 때 영도 죽고 육도 죽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예수를 믿으면 영도 살고 육도 부활과 영생을 하게 됩니다. 실생활에서도 영과 육을 따로 분리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범죄의 주체가 육이라 해도 육이 범죄하면 영도 더럽혀집니다. 영이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육이 범죄했다 하더라도 범죄의 결과는 동일하며 하나님의 징계는 육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포함된 인간 전인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해도 육이 범죄하고 영이 범죄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하는 생각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②권위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8절).
 
  '권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테스(κυριοτηs)는 주인, 통치자, 주권, 통치권 등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은 육은 악하고 범죄의 주체이고 소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악과 범죄의 주체인 육체(σαρξ)를 입고 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현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가현설(假顯說, Docetism)은 예수님이 실제로 사람의 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처럼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곧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을 하고 음식을 먹고 피를 흘린 채 죽으신 것 등은 예수님의 환영(幻影: 헛보이는 그림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게 됩니다. 4절에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 구원하려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자라야만 합니다. 인간이 죽게 된 것은 범죄했기 때문이고 범죄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반영한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려면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의한 진노를 풀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릴 자는 하나님 자신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므로 구원을 받게 하려면 죄의 값인 죽음을 대신 당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면 인간과 똑같은 연약한 육체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많이 부인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인성이 많이 부인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육체(σαρξ)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1:14). 결국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 곧 그가 우리의 주인됨과 통치자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③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8절).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독싸(δοξα)는 문자적으로 도케오(δοιεω:의견, 견해)라는 어원에서 온 말로서 인식, 평판, 명성 등을 뜻합니다.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좋은 평판인 거룩, 위엄, 영예 등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특히 육체적 쾌락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음탕함을 심판했고 이스라엘 백성의 음행을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영적 지식을 터득하여 하나님과 합일치 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쾌락과 방탕으로 기울어져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므로 영도 더럽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꾼 자들입니다. 4절에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평판이 거룩한 속성을 더럽히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멸시하고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10절에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해 터득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그 영광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멸시하고 도리어 비난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는 것을 방해하는 대적자들인 것입니다.  
 
  9-10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면서 영적 지식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이성없는 짐승처럼 육체적 본능으로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0절). 앞에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은 육체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8절). 유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모세의 시체에 관한 미가엘과 마귀의 변론 사건을 실례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모세의 시체에 관한 미가엘과 마귀의 변론 사건은 위경 '모세의 승천기'(The Assumption of Moses)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유다는 14-15절에서도 위경 '에녹서'(Enoch)를 인용하였습니다.
 
  성경(聖經)과 관련한 용어는 정경과 외경과 위경이 있습니다. 정경(正經, κανων, kanon)은 표준 성경이란 뜻으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고, 외경(外經, αποκρυφα, Apokrypha) 정경에 들지 못한 성경이란 뜻으로 유대교와 천주교에서 제 2의 경전으로 사용하는 성경이고, 위경(僞經)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 허위 성경이란 뜻으로 정경과 외경에도 들지 못한 성경입니다. 정경에는 현재 기독교(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66권이 있고, 외경에는 에스라 I II서, 토빗, 유딧, 솔로몬의 지혜, 바룩, 세 소년의 노래, 수산나의 역사,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 I II서 등이 있고, 위경에는 에녹서, 모세의 승천기, 이사야승천기, 아기 예수전, 마리아의 승천기, 도마복음, 유다복음 등이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계시받은 내용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이후 중간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게시를 받아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한 원본들은 많은 단편들로 존재했습니다. 그 단편들은 여러 사본들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애매했고 신앙인들에게 혼란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경과 위경 중에는 경건의 교훈과 상반되는 내용이 많고 역사적 사실과도 동떨어진 왜곡된 진술이 많아서 외경과 위경을 무절제하게 사용할 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그것들을 합본으로 엮으려는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그래서 많은 신실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노력으로 수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교회 회의를 통해서 오늘날의 66권의 정경이 확정했습니다. A.D.90년 경에 유대교의 얌니야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구약 성경 39권을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결정하였고 그리고 A.D.397년 카르타고회의(Council of Kartago)에서 신약 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하였고 기독교회에서도 신구약 66권을 동일하게 정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고 (예언성), 하나님께 직접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이 기록하였고 (영감성),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증거가 있고 (보존성), 예수님께서 인정한 책이어야 했습니다 (보증성). 신약 성경은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있고 (계시성),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들은 사도들이 기록했거나 그들의 후원이 있고 (사도성), 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고 (영감성), 모든 교회가 종교 회의를 통해 보편적으로 인정한 책이어야 했습니다 (보편성). 그런 기준 하에 채택된 66권의 정경은 완전성과 확실성과 정직성과 진리성과 영원성의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시19:7, 8, 119:160, 마24:35, 엡3:5, 갈1:7-9, 계22:18-19). 외경과 위경은 그런 점들을 만족시킨 부분이 있을지라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여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짓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 정경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카톨릭(천주교)에서는 외경을 받아들였고 일부 이단들은 위경까지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정경 66권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외경과 위경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의 보조 자료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정경 66권은 하나님의 뜻과 신앙생활의 원리를 완벽하게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외경과 위경은 교리적 위험성이 있으므로 외경과 위경을 이용하여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4세기 교부 어거스틴(Augstine)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유사 정경인 외경과 위경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17세기 종교개혁자 루터(luther)나 칼빈(Calvin) 등도 외경과 위경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정경에 들지 않은 위경인 모세 승천기와 에녹서를 인용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1:9,14-15). 유다가 유다서를 기록할 당시에 초대교회에서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결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정경과 위경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 위경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을 비판하면서 당시 위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위경은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가 하나님의 계시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위경을 인용한 같은 독자에 대한 배려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서인 유다서가 교회종교회를 통해 정경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의 내용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완전무오하게 기록했고 하나님이 사본의 보존과 공회의 채택을 섭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표준계시로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여 본 절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복음전도 사역에서 독자를 배려하여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용어를 사용한 예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로고스(λογοs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요1:1,14). 사도 바울은 아덴(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자연물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헬라인들의 시(詩)에 자주 나오는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는 시구(詩句)를 인용했습니다 (행17:28). 뿐만 아니라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당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외경에 나오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다가 버림받은 일화를 인용했습니다 (딤후3:8). 바울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오로지 복음적 목적에서였습니다. 고린도전서9:19-23에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사역과 선교사역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지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유다는 모세의 시체에 관한 미가엘과 마귀의 변론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비난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그들이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8, 10절). 유다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훼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시체에 관한 미가엘과 마귀의 변론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미가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모세의 시체를 치우려 했습니다. '미가엘'(Michael)은 대적과 더불어 전투를 하는 사명을 가진 천사장(天使長)입니다 (단10:13,21, 12:1, 계12:7). 그런데 그 때 마귀(사탄)은 모세의 시체를 세상에 그대로 두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은 시체를 치우려 하고 사탄은 그대로 두려고 하는 일이 벌어졌고 미가엘과 사탄 사이에 서로 모세의 시체를 자기의 주장대로 하려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미가엘을 직접 심판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직접 심판하지 않고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실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근거로 다 아는 체 하며 함부로 주장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함부로 비방했습니다. 그것은 무지와 교만함의 극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미가엘도 하나님의 권위에 누가 될까 봐 사탄을 정죄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는데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그보다 훨씬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오용하고 침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성없는 짐승처럼 자기들의 본능을 따라 행하는 자들로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의도가 어떻든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거나 영광을 훼방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사무엘상6:19에 보면 구약시대에 법궤(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유다 벧세메스로 돌아올 때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뚜껑을 열어 보다가 70명이나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보가가 (오만)칠십 인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오만)칠십 인'은 주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받은 전체의 수가 50,000이고 실제로 죽은 사람의 수가 70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0,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벧세메스는 전 인구를 합쳐도 50,000명이 안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Keil, Smith, Fay).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는 '(오만)'이라는 말이 없고 '칠십'인 만 있습니다. 혹 있는 사본은 숫자로 쓰인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70)을 '눈'(50,000)으로 잘못 필사(筆寫)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Kennicott). 70인역(LXX)에도 '(오만)'이 없고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도 '칠십'인이 맞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무엘하6:6과 역대상13:9에 보면 다윗이 법궤를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수레에 실어 옮길 때에 웃사가 수레를 끄는 소가 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았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도 실제적으로는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본주의로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법궤를 하나님 스스로 지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들이 걱정하고 온전케 하려는 행위를 기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좋은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위와 영광을 침해하는 죄에 해당했기 때문에 즉각적인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침해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과 사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헌신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에 맡기고 우리는 순종만 해야 합니다.
 
  한편 왜 하나님은 미가엘을 통해 시체를 없애려 하고 사탄은 그대로 두게 하려고 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34:5-6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묻게 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들려 올렸다는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모세의 시체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는 곳에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위험성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Calvin, Stanley).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그런 가능성을 보인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낼 때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이 불뱀에 물린 자들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모세로 하여금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불뱀에 물린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쳐다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놋뱀을 본 자들이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민21:4-9).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후대에 그 놋뱀을 보관하면서 왕정시대에는 그것에 분향하며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왕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산당과 주상과 목상을 부수었는데 그때  놋뱀도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느후스단'이라고 했습니다 (왕하18:4). '느후스단'(Nehushtan)은 '놋 조각'이라는 뜻으로 조소 섞인 표현입니다. 그들이 놋뱀을 숭상한 의미와는 달리 놋 조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놋뱀은 언약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에 대한 예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3:14). 그리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보고 병이 나은 것은 놋뱀에 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믿음이 낫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7번 씻으므로 문둥병이 나은 것과 나면서 소경된 자가 실로암 못에서 씻으므로 눈을 뜨게 된 사건과 같은 원리입니다 (왕하5:14, 요9: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이 효험이 있는 줄 알고 그것을 우상으로 섬긴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목적과 정신과 내용을 무시한 채 외부적인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면 우상적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그런 요소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았던 것이라도 그것을 숭배하지는 말아야 하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후대가 우상적 의미를 부여할 만한 요소가 된다면 아예 없애야 합니다.
 
  16절에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④원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원망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공귀스타이'(γογγυσται)는 '중얼거리다' '수군거리다'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약시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거역하던 모습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민14:2,27,36, 신1:27, 시106:25, 고전10:10).
 
  ⑤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6절).
 
  '불만을 토로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멤프시모이로이'(μεμψιμοιροι)는 '흠을 잡다' '비난하다'라는 말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자기 몫에 대해 불만을 품고 트집을 잡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한 데서 인용하였을 것입니다 (민11:5,6,10,20). 그런데 이 표현은 앞에 나온'원망하는 자'와 의미상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전자가 그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임에 비해 후자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두고 하는 말로서 이는 전자의 의미를 좀더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에 대해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는 기질은 매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자주 화를 내며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형편과 조건에 대해 만족하는 법이 없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취향에 맞을 때만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⑥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이는 베드로후서2:10과 병행구로서 '정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뒤미아스'(επιθυηιαs)는 문자적으로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을 증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무절제한 욕심 또는 탐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절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만족이 없고 아무리 소유한다 하더라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시106:14, 잠27:20, 30:15-16, 딤후3:6).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 모든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⑦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이는 베드로후서2:18의 병행구입니다. '자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롱카'(υπερογκα)는 문자적으로 '크게 승리한' '넉넉히 이기는'으로서 '크게 부풀리는' '크게 과장하는' 뜻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정령한 시리아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와 적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말로서 (단11:36, 계13:5)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으스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하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도덕폐기론을 성도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과장되게 떠들어 댑니다.
 
  ⑧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아첨하느니라'에 대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존테스 프로소파'(θαυμαζοντεs προσωπα)는 히브리어 '이사파님'을 번역한 것으로서 (신10:17), 사람을 편견으로 대하거나 뇌물을 줌으로 정의를 왜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대하19:7, 잠18:5). 본 절은 유다가 11절에서 예로 들었던 구약성경의 발람에게 해당하는데 그는 불의한 삯을 얻기 위해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회 내의 부자들이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아첨하기도 하고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아부합니다.  
 
   2) 거짓교사들의 정체
 
  12-13절에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는 영지주의 거짓교사에 대한 활동 모습과 숨은 배경을 자연현상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경스럽고 탐욕스러운 영적 상태를 시적 언어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①애찬의 암초라고 했습니다 (12절).
 
  '애찬'(愛餐)의 헬라어 아가파이스(αγαπαιs)는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αγαπη)의 복수입니다. 애찬은 초기에 성찬과 구분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예배를 위해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예수님의 구속을 기념하는 성찬의 의미를 가진 동시에 공동체 일원들이 함께 교제하는 애찬을 의미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구속을 이루어 구원해주신 것을 기념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교제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위로하며 격려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이 그러한 애찬에 기탄없이 참여하므로 애찬의 암초역할을 했습니다. '기탄없이'(αφοβωs)는 문자적으로 '두려움이 없이'의 의미입니다. '암초'(σπιλαδεs)는 문자적으로 바위를 뜻합니다. 거짓교사들은 마치 배가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암초에 걸려 파선하는 것처럼 애찬에 참 의미를 모른 채 참여하므로 애찬의 참 의미를 더럽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애찬을 자기들의 목적대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공동체가 분쟁이 일어나게 하므로 애찬의 참 의미를 파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②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했습니다 (12절).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요21:15-17, 행20:28, 벧전5:2).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는 성도들을 돌보기보다는 혹은 성도들을 돌보는 직무를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과 욕심으로 사리사욕만 채우는 교회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꾀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사56:11, 겔34:2).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와 음란에 빠지게 한 발람도 그와 같은 자입니다.
 
  ③바람에 불려 가는 물없는 구름이라고 했습니다 (12절).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 지역에는 비가 드문 지역입니다. 그 곳에서 농부들은 비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 농부들에게 있어서 구름을 보는 일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를 뿌려 줄 것처럼 보였던 구름이 비를 뿌려 주지 않고 바람에 밀려 그냥 지나가 버린다면 농부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교사들은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무엇인가를 줄 것같이 마음을 부풀게 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절망하게 하는 헛된 구름과 같은 자들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들을 속이는 자들인 것입니다. 
 
  ④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 나무라고 했습니다 (12절).
 
  나무는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므로 그 가치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풍성한 열매를 기대했던 나무는 과일을 맺히지 않을 뿐 아니라 뿌리까지 뽑혀서 더 이상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나무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나무인 것입니다. 그 나무는 베어서 불을 사르는 데에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나무입니다. 거짓교사들은 그 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만 남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요15:2-6). 
 
  ⑤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고 했습니다 (13절).
 
  바다의 거친 물결로 인해 파도가 칠 때 그 파도는 거품을 품으며 해변 바위에 부딪히거나 해변 모래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 파도가 지나간 다음에 보며 해변 가에는 더러운 온갖 오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거품을 품은 파도가 온갖 쓰레기들을 날라 온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말로 성도들의 관심을 끌지만 그 생애와 사역을 통해 남겨 놓은 것은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들 뿐입니다.
 
  ⑥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했습니다 (13절).
 
  하늘에는 유리하는 별들 곧 유성(流星), 혹성(惑星), 혜성(彗星)들이 있습니다. 유관으로 보는 우리는 그것들을 별똥 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 별들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여 떠돌아 다니면서 잠깐 빛을 발하다가 곧 빛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흑암에 묻혀 버리고 맙니다. 거짓교사들도 당시에는 성도들을 미혹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그 빛을 잃고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흑암의 처소인 지옥에 들어가고 맙니다 (계21:8). 
 
   3) 거짓교사들의 결국
 
  11절에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4-15절에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①가인이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1절).
 
  가인(Kain)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4:1-15에 나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농사를 하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인 곡식으로 드리고 아벨은 짐승인 양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가인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정성 문제나 죄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제물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정성 문제로 보는 사람들은 가인이 농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곡식을 드린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더욱이 레위기 2장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가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고 다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드린 데 반해 가인은 첫 곡식으로 드렸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아 정성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소제(素祭)는 단독적으로 드릴 수 없고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릴 수 있는 제사입니다 (출29:40, 민15:1-10). 그리고 죄 문제로 보는 사람들은 창세기4:6-7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한 것과 요한일서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한 것을 근거로 가인이 평소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악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인을 악한 자로 말한 것은 가인이 제사를 드리기 전을 말하기 보다는 제사가 열납되지 못한 이후에 분노하고 아벨을 죽인 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후에 그가 분노하는 것 곧 마음 속에 가진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제물 문제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기르는 자였는데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다고 했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어느 날 갑자기 드린 사건이 아니라 많은 세월 동안 제사를 드려 온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처음부터 땅의 소산으로 드려 왔던 것이 아니라 많은 세월이 지나 후에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생축으로 제사를 드렸고 (3:21) 아담은 자식들에게 생축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도 양으로 제사를 드려 왔을 것입니다. 물론 가인은 농사를 지었지만 곡식으로 양을 바꾸어 양으로 드려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일이 지나면서 곡식으로 양을 바꾸어 드리는 것이 번거로웠을 것입니다. 생축인 양으로만 드려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농사한 땅의 소산인 곡식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생축으로만 드려야 하는 의미를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 생축(양)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육체도 죽게 되었고 영도 죽게 되었습니다. 죄값은 사망이었습니다 (롬6:23).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범죄했을 때도 살 수 있는 은혜의 방법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하면 그 죄값으로 인간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짐승을 죽게 하여 그 짐승으로 제사를 하면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엔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았는데 (레17:11) 짐승이 피를 흘려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죄값을 짐승이 대신 치룬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인간은 범죄할 때 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생축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피 흘려 죽으므로 모든 택함 받은 백성들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있었습니다. 죄인이 그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게 하려는 구원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짐승을 죽여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창3:15). 그것을 알게 하려고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창3:21). 그 연장선상에서 제사도 짐승으로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도 그 아들인 가인과 아벨도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가인은 곡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가인이 짐승으로 드리지 않고 곡식으로 드린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것보다, 일반적인 죄를 짓는 것보다 더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제사를 잘못 드린 데 대해 회개하거나 수정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미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아 주지 않은데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을 극도로 증오하다가 결국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이 그에게 효력을 주지 않아 곡식을 제대로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랑자로 살아갔습니다. 동생을 죽인 죄에 대한 가책과 다른 사람이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분노하고 동생을 살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받지 않으셨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의 인격 자체를 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4:5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제물뿐 아니라 그의 인격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소위가 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물을 잘못 드린 것과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다음에 분노한 것과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받고도 동생을 죽인 것과 살인 후에 그와 그 후손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창4:3,5,6-7,8,16-24). 유대 철학자 필로(Philo)는 창세기4:7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에 해당하는 아람어 탈굼역(Targum)을 해석하면서 가인은 '내세도, 심판도, 심판자도 없으며 의인에 대한 보상도 없으며 악인에 대한 징계도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고 범죄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도 그 가인의 길로 행한 것입니다.
 
  ②발람이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1절).
 
  발람(Balaam)에 대한 기사는 민수기22~25장에 나와 있습니다. 발람은 유브라데 강변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브돌에 살고 있던 술사(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를 지나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 모압왕 발락이 그들의 진행을 두려워 했습니다. 발람은 궁리 끝에 발람을 청해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자주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브돌로 보내어 발람을 청했습니다. 발람은 모압 사신들에게 그 곳에 머물게 한 다음 발락의 초청에 응할지 말지에 대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발락에게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발락의 청을 거부하고 모압 사신들을 돌려 보냈습니다. 발락은 사신들을 재차 보냈습니다. 전에 보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그리고 청에 응해주기만 하면 크게 높여 존귀하게 해주고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발람은 사신들에게 은과 금을 더 줄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는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더 하실런지 물어 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이르는 말만 하라고 했습니다. 발람은 나귀를 타고 고관들과 함께 모압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길을 가로막게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에서 칼을 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발람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으나 나귀가 그 모습을 보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을 하여 길로 들어서게 했으나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 좁은 길에 서 있고 옆으로 담이 있어서 좌우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앞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은 자기 지팡이로 세 번이나 나귀를 때렸습니다. 나귀는 무엇 연고로 때리느냐고 했고 발람은 자기를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귀는 일생동안 자기를 타고 다니면서 언제 이런 버릇이 있었느냐고 했습니다. 거역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 들고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어찌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느냐고 하면서 나귀가 세 번이나 피하지 않았으면 벌써 칼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압에 가서 하나님이 이르는 말만 하라고 했습니다. 발람에 모압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발락왕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발람은 자기가 오기는 했으나 하나님이 이르는 말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발락이 소와 양을 잡아 발람을 대접하고 다음날 아침에 이스라엘 진이 보이는 바알 산당에 올랐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했습니다. 발락은 다시 발람을 비스가 꼭대기로 데려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발람은 또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습니다. 발락은 또 다시 발람을 브올 산 꼭대기로 데려가 저주하게 했습니다. 발람은 또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이 모압에 대해 행할 일을 예언하고 미디안 성읍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발락은 분노하였지만 발람의 축복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여 심판하신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있을 때 모압 여인들을 통해 유혹을 하게 했습니다. 결국 모압 여인들이 주는 고기를 먹으며 그들을 따라가 우상숭배와 행음에 참여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염병이 돌아서 24,000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중재로 회복된 다음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미디안을 칠 때 발람도 칼로 죽였습니다 (민31:8). 
 
  발람은 발락왕의 초청을 받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명예와 영광이 탐이 나서 하나님께 재차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했다고 생각하고 모압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정당화하며 갔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와 나귀를 통해 가는 길을 막아 돌이킬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압에 가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기는 했으나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힌트를 주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발람은 물질과 명예와 영광에 끌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하여 망하게 하였습니다. 영지주의 거짓교사들도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며 성도들을 타락하게 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간 것입니다.
 
  ③고라가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11절).
 
  고라(Korah)에 대한 기사는 민수기16:1-35에 나옵니다. 고라는 레위지파 고핫의 아들 이스할의 아들입니다. 그는 자신도 레위지파의 고핫 자손인데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 노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모세가 아론만 제사장으로 세운데 대한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지파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함께 당을 짓고 이스라엘 총회 대표자 250명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하나님이 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거룩한 데 왜 그들만 분수에 지나치게 지도자 위치에서 군림하느냐고 했습니다. 모세는 고라에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지파로 성막에서 봉사를 하게 했는데 그것으로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욕심으로 제사장 직분까지 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고라에게 하나님 앞에 누가 거룩한 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각기 항로에 불을 담고 향을 두고 성막 앞으로 가지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과 고라를 위시한 250명이 회막 앞에 항로를 들고 섰습니다. 고라를 중심으로 그에게 미혹된 회중들이 모세를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임하여 그들을 모세와 아론을 그 무리들에게서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나와 250명을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가 사람을 보내어 회막으로 나오라 했을 때 장막에서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백성을 살기 좋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에서 죽이려는 자,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도 않고 밭과 포도원도 주지 않는 자가 어찌 왕 노릇을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모세가 분노하여 하나님께 자신은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않고 한 사람도 해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온 회중으로 하여금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땅을 벌려 그들과 그들의 소유를 다 삼켜 버리면 과연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여 지도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말이 마치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그 가족들과 장막과 소유가 있는 곳에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키고 다시 합쳐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고라당이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회중 가운데서 망하였습니다.    
 
  고라는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지 않았으나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모세에게 대항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뜻에 의해 세운 정당한 지도권에 대해 도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라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깨트리는 일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고라당은 그 패역함을 인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을 부추겨 하나님이 세운 정당한 교회 지도자들을 대항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장로교의 정치원리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셋째는 다스리는 권세는 교회 직원들에게 위임했다.'입니다.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세움 받은 신앙 지도자의 권위를 대항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깨트리는 행위입니다. 
 
  본문은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멸망할 것에 대한 예로 든 내용입니다. 가인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망했고,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게 하므로 망했고, 고라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대항하다가 망했습니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면에서 세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 대해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거역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지식을 빙자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세운 자들도 아니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성도들을 미혹하므로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혹당하거나 그들의 일에 참여하다가 함께 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④에녹이 심판을 예고했다고 했습니다 (14-15절).
 
  14-15절에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Enoch)은 아담을 1대로 계산하면 아담의 7대손입니다 (창5:3-24, 대상1:1-3). 에녹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입니다. 히브리서11:5-6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 시대에 대부분은 경건치 않은 자들로서 경건치 않은 일을 했습니다. '경건치 않은'에 해당하는 ungodly는 '하나님(God)이 없는(un)'의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욕하고 대항하고 온갖 악한 말과 강퍅한 말을 일삼고 자기 정욕대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불경건한 후손들은 성을 쌓고 목축을 하고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제조하고 아내를 하나 이상 두었습니다. 문명을 발달시키며 향락을 추구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했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후 노아 홍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 이름과 관련된 예언적 계시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을 안 것입니다. 에녹은 당시에 타락하는 자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창세기5:21-24에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65세부터 365세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 나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왜 65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했을까요. 그 때 므두셀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을까요?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예언적 성격을 띤 이름입니다. '므두셀라'는 문자적으로 '창의 사람' '창을 든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창을 든 사람이라는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 창을 든 사람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때는 노아 홍수 이전으로서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는 노아 홍수 이후이므로 (창9:3) 경건한 후손이 짐승을 잡기 위해 창을 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짐승을 잡기 위해 창을 잡는 일이 아니라면 전쟁을 위해 잡는 경우 밖에 없습니다. 당시에는 부족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장정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이 남아서 마을 입구에서 창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만일 전쟁터에서 적들이 이기게 되면 적들은 마지막으로 마을에 와서 마을 입구에 창을 들고 서 있는 이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을 입구에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패배한다는 의미가 있고 마을에 죽음과 재앙이 온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을 입구에서 파수하는 자를 '창의 사람' '창을 잡은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므두셀라'(메투쉘라)의 어원을 보면 '무드'(메투)와 '셀라(쉘라흐)의 합성어입니다. '무드'는 '죽음'이라는 단어이고 '셀라'는 '보낸다'는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두 단어를 합하여 마을 입구에서 파수하는 사람에게 사용했고 그 말은 차차 '창의 사람' '창을 든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에녹은 왜 자기 65세에 낳은 자기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 곧 '창의 사람'으로 지었을까요? 고대에는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자녀를 낳을 당시 마음생태나 상황이나 사건과 관련해서 짓습니다. 본문을 보면 당시에 에녹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정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그 표징으로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아들이 죽으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 곧 '창의 사람'(죽음-보낸다)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에녹은 그 아들이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것을 자기 신념으로 삼고 살았으며 사람들에게 예언적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은 후 노아(600세)의 홍수가 있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고 심판 때에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을 소망하며 산 것입니다.
 
  유다는 에녹이 당시 세대에 대해 예언한 것을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 에녹서1:4,9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오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재림하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 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고 했습니다. '그 수만의 거룩한 자'는 주의 재림 때에 수행하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마16:27, 25:31, 살후1:7). '임하셨다니'(ηλθεν)는 시제가 부정과거인데 이는 소위 예언적 부정과거로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신 목적에 대해 15절에 보면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뭇'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톤(παντων)은 모두(all)란 뜻입니다. 이들은 이어지는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경건치 않은 악인들을 심판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경건치 않은 일과 경건치 않은 말을 정죄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대적한 일과 말에 대해 철저히 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잠14:12). 그 원리는 마지막 심판에도 적용됩니다 (마25:41-46, 롬14:11-12, 벧전4:5, 계20:13-14, 21:8).
 
  유다는 당시 거짓교사들과 그들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쾌락과 향락으로 기울어진 자들이 모두 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본 절의 에녹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에녹1서1:4,9). 오늘날 이단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도 하나님이 반드시 정죄할 것입니다. 넓게 보면 교리적인 타락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모든 언행에 대해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그들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24:1). 그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18:4-6).
 
     5. 마지막 권면 (17-23절)
 
   1) 거짓교사 경계를 위한 권면
 
  17-1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①거짓교사들의 출현은 이미 사도들이 경고했다고 했습니다 (17-18절).
 
  예수님이 보내신 사도들이 마지막 때에 거짓교사들이 나올 것을 미리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경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여러 사도들이 거짓교사들에 대한 출현에 대해 미리 경고했습니다 (행20:29-31, 딤전4:1, 요일2:18, 4:1, 벧후3:3-5 등). 특히 베드로후서3:3-4에는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는 주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시대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재림 때를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거짓교사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들은 주의 재림과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재림과 심판교리를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정욕대로 행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는 한편으로는 금욕주의로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쾌락주의로 나갔습니다. 당시 수신자들의 공동체를 미혹하는 자들은 대부분 쾌락주의였습니다. 그들은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범죄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영은 천국에 하고 육은 소멸한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영은 범죄하지 않고 육이 범죄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자연히 심판교리를 조롱했고 자기들의 정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차원의 이론으로 타락을 조장했습니다.
 
  ②거짓교사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9절).
 
  거짓교사들은 교회에서 당을 지어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당시 영지주의 거짓교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지식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을 깨닫는 것을 추구했고 그 지식을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을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육에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연히 교회 공동체의 분열과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③거짓교사들은 육에 속한 자들로서 성령이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9절).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자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키코이(ψυχικοι-형,남,주,복)은 문자적으로 보면 '혼(ψυχη)에 속하는'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할 때 이분설에서는 영혼과 육체로 나누고 삼분설에서는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눕니다. 삼분설의 경우 영(靈-루아흐-πνευμα-spirit), 혼(魂-네페쉬-ψυχη-soul), 육(肉-빠사르-σαρξ-flesh)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본적으로 영은 종교적 활동의 원리로서 그 활동을 영교 직관 양심 등으로 확인할 수 있고, 혼은 도적적 생명의 원리로서 이성 감정 마음 등으로 확인할 수 있고 육은 몸을 이루는 물질적 요소로서 뼈 피 살 피부 등으로 확인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육(빠사르-σαρξ)를 죄성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네페쉬-ψυχη)를 생명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곧 살아 있는 사람 곧 자연인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여 영이 살아 있지 않는 영이 하나님께 대해 활동하지 않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육욕으로 살고(sensual -KJV), 세속적인 기질로 살고(worldly-minded -NASB), 타고난 본능으로 삽니다(natural instincts -NIV). 그들은 본문에서 "성령이 없는 자니라"(πνευμα μη εχοντεs)고 했습니다. 성령의 내주가 없는 자들입니다 (having not the Spirit -KJV, not have the Spirit -NIV). 어떤 성경 에서는 성령이 전혀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devoid of the Spirit -NASB). 그러므로 거짓교사들에 대해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들로서 그 안에 성령이 거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곧 그들의 사상과 의식과 활동이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모두 육체적이고도 세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영적인 추구점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성경적인 것 같고 영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로서 앞에서 이미 제시한 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지 않은 자, 중생하지 못한 자, 성령의 내주가 없는 자들도 얼마든지 영적인 논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의 이론을 분별하여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교리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이 성경적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이1:10).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과 그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이단 교리인 것입니다 (마16:16, 요일2:22, 요이1:7, 롬3:28, 10:10). 그리고 열매(행위)로 구별해야 합니다 (마7:20). 거짓교사들도 얼마든지 영적인 것 같은 이론을 세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행동을 보고도 구분해야 합니다. 거짓교사들의 특징은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성도를 세속적으로 타락하게 합니다. 본서에서 나오는 영지주의 거짓교사들의 특징은 당시 성경지식으로 분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본서는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조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영적인 교훈을 가졌어도 그들의 행위가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질서를 거부하고 타락을 조장하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교만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육욕을 따라 살면 그들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 그런 모습이 있지 않는지 살펴보고 바로 서야 합니다.
 
   2) 영적 성숙을 위한 권면
 
  20-2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①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20절).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기독교 정신으로서의 믿음이나 은사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3절). 그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죄의 용서와 영의 거듭남과 성령의 내주가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세우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에포이코도메오(εποικοδομεω)는 '짓다' '세우다'는 의미로 건축용어에 해당합니다 (building -KJV, NASB). 그래서 한글 개정판에서는 '건축하며'로 번역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말씀으로 (고전3:11-15, 엡2:20-22).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는 것은 건축에 비유할 때  집을 짓는 것으로서 성화에 해당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닦는 것은 중생이라고 한다면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성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어떤 사람은 중생을 기본구원, 성화를  건설구원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다음에는 성화에 힘을 써야 합니다. 이미 중생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성화를 통해 계속해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빌2:12). 그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벧후3:18).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엡4:13, 빌3:14). 그 재료는 말씀입니다 (고전3:12-15). 중생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사심판을 통해 책망과 영광을 받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롬2:12). 그 때 성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 신앙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사람은 구원은 얻지만 불가운데서 얻은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고전3:15, 고후5:3). 성화에 대한 심판은 므나비유가 잘 설명해 줍니다 (눅19:11-17). 그러므로 이미 얻은 구원을 부지런히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건축해 가야 합니다.   
 
  ②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20절).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εν πνευματι).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성령은 우리 안에서 떠나지 않고 역사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게 하고 죄가 생각나게 하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요14:16-17, 26, 15:26, 16:7-8, 13).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롬8:26-27). 영적으로 바로 서려면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돕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③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21절).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롬5:8).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케 해 나가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공격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시125:1-2).
 
  ④영생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21절).
 
  영생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이미 보장 받은 것이고 또한 현재에 그것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때는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도록'은 '주의 재림 때 곧 영생이 성취될 때까지'의 의미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사죄, 칭의, 중생, 구원을 얻었으나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어서 여전히 죄와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긍휼이 없으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종말적으로 보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주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롬13:11, 빌2:12, 딤후1:18, 히9:28, 벧전1:5). 주의 재림 때에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때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긍휼을 기다리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주의 긍휼로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3) 미혹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권면
 
  22-23절에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①어떤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22절).
 
  '의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διακρινομενοs)는' '구별하다' '분별하다' '의심하다'는 '힐난하다'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의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의심하는 자란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빠져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하고 바른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미혹되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보면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긍휼히 여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아테(ελεατε)는 '논박하다' '확신하게 하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혹되기는 했지만 돌이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긍휼히 여겨 바른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가지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②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23절).
 
  여기에서 '불'(πυροs)은 영원한 형벌인 지옥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불의한 자들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멸망의 불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말한 의심하는 자들보다 심각한 상태에 있는 자들로서 이미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깊숙이 빠져 들어 심판의 길에 들어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끌어내어'(αρπαζοντεs)는 이미 멸망의 불 속에 떨어져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불 속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자, 곧 그냥 내버려 두면 멸망의 불 속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거짓교사들에게 깊숙히 빠져 그냥 내버려 둘 경우 거짓교사들과 함께 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황급히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미혹에 깊이 빠져 있는 자라도 포기하지 말고 영적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구하라는 것입니다 (마18:15-17, 눅17:3, 갈6:1, 살후3:15, 딤전5:20, 딛3:10, 약5:19-20).
 
  ③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23절).
 
  '육체'(σαρκοs)는 원래 '살'(flesh)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육체의 죄악들'을 집합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고 영은 범죄하지 않고 육이 범죄한다고 보고 영은 영원하고 육은 소멸된다고 보고 범죄하는 것은 육이니 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율법적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이 부도덕하고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더럽혀진 옷'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육체로 더럽힌 옷'은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죄적 사상과 성적 타락으로 부패해진 자들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완전히 그들의 수호자 혹은 앞잡이가 된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까지도 미혹하는 거짓교사 수준에 있는 자들입니다. 영육간에 혹은 사상과 행위가 모두 심히 부패하여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들로서 자기들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자들입니다.  육체로 더럽힌 옷을 미워하라는 것은 그들의 죄적 사상과 오염된 생활에 대해서는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에 함께 빠지지 않도록 두려움 마음과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마5:44).   
 
     6. 축복 (24-25절)
 
  24-25절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고 했습니다.
 
  유다는 마지막 인사에서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와 속성이 나타나는 광채, 그 위대함, 그의 능력, 그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 영광이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라고 했습니다 (24절). '거침이 없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타이스투스(απταιστουs)는 문자적으로 '비틀거리지 않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보호하여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에 아주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흠이 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무스(αμωμουs)는 원래 '비난을 받지 않게'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에 대해 (출29:1, 레1:3, 1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용한 용어입니다 (벧전1:19). 하나님 앞에 설 때 조금도 책망할 것이 없이 순결하고도 정결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기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갈리아세이(εν αγαλλιασει)는 '환희' '넘치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그리스도인도 기뻐함으로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수신자들의 신앙 공동체는 영지주의 이단들로 인하여 미혹을 받고 분열되었습니다. 수신자들은 그 자체로 고통받았고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느라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결과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영원히 영광받으실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보호하여 아주 쓰러지지 않게 해 주시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 전혀 부끄러움이 없이 넘치는 기쁨으로 설 수 있도록 온전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개인적으로도 적용되는 축복이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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