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유다서 1장 3-4절
설교제목 : 단번에 주신 믿음
설교자 : 안재경 목사님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믿음이 없이는 생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예배당에 앉아 계시는데요. 여러분이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건물이 튼튼하게 세워졌고 그래서 예배드리는 동안 결코 지붕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이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믿음은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자기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질문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1번, “믿음은 오랫동안 고민하는 가운데 서서히 생겨난다.” 2번, “믿음은 한 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다.” 자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여기 두 가지 명제가 나왔는데요. 어떤 것이 옳습니까? 1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믿음은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다. 아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다. 아마 각자의 신앙경험에 따라서 답을 다르게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하듯이 한 순간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생겼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문장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이 ‘생긴다’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종종 나에게 생겨나는 그 무엇, 내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친동생이었던 유다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합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를 쓸 필요를 느꼈다고 말합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번에 주신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순간에 주신다는 말이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단번에’라는 표현은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가리킬 때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8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많은 사람의 죄,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여러 번 희생당하셔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자신을 드리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영 단번 드려졌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사역처럼 믿음도 단번에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다 자신의 경우를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유다는 예수님의 육신의 친동생입니다. 유다는 처음에 자신의 형이었던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맏형이었으니 집안을 책임져야 했는데, 집안을 책임지지 않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라는 그런 생각을 하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져가기 시작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의 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아니 하나님 바로 그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유다는 단번에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것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기에 우리는 믿음이란 것이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과 부담감을 벗어도 되겠습니다. 믿음은 천천히 숙성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술이나 예술에 있어서 숙성이란 용어를 종종 씁니다. 좋은 술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오랜 기간 동안의 숙성을 거쳐서 좋은 술, 좋은 포도주가 만들어집니다. 예술가들도 종종 숙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가 오랜 기간동안 연습하고 익히고 해서 숙성을 거쳐서 마침내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집니다.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도 오랜 기간 서서히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믿음이란 내가 조금씩 조금씩 키워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이 오랜 기간을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갈고 닦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무엇을 궁구하고 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명상하고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뭔가 각성되어지고, 눈이 서서히 뜨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키워서 마침내 어떤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단번에 초자연적으로 주어집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가장 인간적이고 또한 일상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믿음은 가장 신적이고 천상적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기 전과 믿은 후가 확실하게 다릅니다. 선을 확 그어 버리는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고 전혀 다른 상황속에 자신이 쳐하여져 있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는 일에 있어서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시작되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아니, 믿음을 시작하는 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평생의 믿음의 삶에 있어서 철저하게 수동적인 상태에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믿음생활 전체를 걸쳐서 우리는 믿음의 수동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적극적으로 내가 무언가를 믿고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항상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은 주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란 것을 가지고 주도하려고 합니다. 내가 주도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결과를 얻어내고 그래서 구원조차도 내가 이루었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인생의 교만입니다. 우리는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인생이 하나님보다 앞서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고 우리는 그분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우리는 따라나서는 자들이요, 반응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만 남는 것입니까? 우리는 로봇과 같은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나서 한 순간에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짠하고 나타나 주셔서 한 순간에 믿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수없이 거부하고 반항하다가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물론 오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전혀 믿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믿게 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지식의 관계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믿는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것을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믿는 순간에 어떤 상태에 있을까요? 멍해지는 상태로 접어드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믿는 순간에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생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그냥 멍한 상태에서 믿게 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는 지식을 갖게 됩니다. 즉 믿음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지적인 확실성과 안도감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친구들에게 한 번 더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렵지요?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우리가 알아야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까요? 1번,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많이 알아야 믿을 수 있다. 2번,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적게 알아도 믿을 수 있다. 마지막 3번, 내가 기대하는 것과 똑 같은 분량만큼 알아야 믿을 수 있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3번입니까? 자, 우리가 얼마만큼 알아야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적게 알아도 되는 것입니까? 안 그러면 내가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분량, 정확하게 그기에 맞아 떨어지는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 몇 번입니까? 자, 우리 어른 성도들도 다같이 답을 해보겠습니다. 1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아야 된다. 2번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적게 알아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3번, 내가 기대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그 지식, 그것을 알면 비로소 믿을 수 있게 된다. 예, 다수결로 답이 나왔습니다. 2번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상태는 전적인 만족감에 사로잡힌 상태일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다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다 파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만족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철저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속이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믿음이란 결국 맹신과 광신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지적인 요소와 더불어 신뢰라는 요소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지적인 도약이 필요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참된 믿음이란 확실한 지식만이 아니라 굳센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나의 머리로 파악이 된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내 머리로 충분히 이해되고 완전히 파악된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내 생각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하나의 우상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 아니냐?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람이 자기 생각 속에서 신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가지고 그것을 외형적으로 투영시킨 것이 믿음이요, 종교가 아니냐?’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불신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확신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선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이해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버틴다면 평생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단번에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단번에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이 단번에 주신 것이라고 해서 시간적으로 한 순간에 주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한 순간에 주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구원이 완벽하게 보장되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떻게 생활해도 상관없는 그런 상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구원파의 주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는 기쁜 소식 선교회라고 부릅니다. 기쁜 소식, 즉 복음이지요? 여기에 복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교회는 지금까지는 한 번도 제대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이제 구원파인 자신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고 참된 복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믿음과 구원이 단번에 주신 것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이 한 순간에 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듯이 성령은 바람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바람이 부는 것은 느낄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이 임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능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조차도, 그 시간 조차도 성령이 일한 시간조차도 파악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큰 교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 같아도 우리 마음속에 은밀하게 찾아와 주셔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그 도우심을 우리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한 순간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그런 방식으로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을 강화시키는 성례
이제 믿음을 가지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볼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은혜의 방편을 허락하셨습니다. 로마서 10:17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곳에 있는 것이 복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불러 일으켜 주신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기 위해 성례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게될 이 성찬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기 위해서 허락해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내가 만든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믿음을 키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특별한 집회에 내가 참여해 보아야 되겠다. 특별한 은사를 받으면 내 믿음이 자라나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디에서 우리의 믿음을 만들 수 있고, 어디에서 우리의 믿음을 키울 수 있고, 어디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을 키울 수 있는 곳은, 믿음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예배의 자리입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 가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크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 믿음이 큰가를 서로 서로 마음 속으로 재고 판단하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키울까를 늘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겨자씨 비유를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작은 씨라고 알려져 있는 겨자씨를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심겨질 때는 보이지도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는 비유입니다. 이 겨자씨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까?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있다는 말일까요?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성장에 있다기보다는 겨자씨의 생명에 있습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란다는 것입니다. 왜 겨자씨가 거대하게 자라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립니다. 이것처럼 믿음은 지극히 작아 보여도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척도는 크냐 작으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너무나 작다고 생각합니까? 큰 믿음을 달라고 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아무리 작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 아무리 작게 보여도 그 믿음이 살아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종교심과 능력을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금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음이 있기는 한데 너무 작아서 문제에요’ 라고 이야기 하시겠지요?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가? 그래서 이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믿음만 있으면 됐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기만 하면 된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고린도후서 13:5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가 여러분 자신을 시험하고 여러분 자신을 확증하십시오. 살아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아는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신심깊은 종교인이 되려고만 애쓰지 마십시오.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만 애쓰지 마십시오. 종교심과 도덕성이 믿음에 보탬이 되기 보다는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도에게 주신 믿음은 울타리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이들은 다 알게 된 자들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속에는 아무런 의도, 공로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직 믿음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내가 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나의 결심과 노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믿음의 창시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을 마침내 완성시키고 마무리하시는 존재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을 마무리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을 마침내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찬식에 믿음으로 참여할 때 여러분의 믿음이 굳세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과 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져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문제도 예수님을 통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묵상하고 나누기
1. 일상을 사는 것 자체가 모종의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말해 봅시다.
2. 우리는 믿음을 내 속에서 생겨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데 유다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 ‘단번에’ 주신 것이 믿음이라고 할 때 ‘단번에’는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었나요?
4. 우리는 얼마만큼 알아야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5. 참된 믿음은 지식뿐만 아니라 신뢰라는 요소를 가져야 함을 말해 봅시다.
6. 겨자씨 비유에서 믿음의 본질에 대해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나요?
7. 성찬참여가 믿음의 성장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나요?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믿음은 내가 키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2. 믿음은 서서히 자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단번에 주시는 것입니까?
3. 믿음은 크고 작음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살아있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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