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1-7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3) 작은 자 사랑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8.
반응형

설교본문 : 요9장 1-7, 마25장 40
설교제목 :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13) 작은 자 사랑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우리나라에서는 리조트나 유원지에 가면 입장료를 받을 때 반드시 대인과 소인을 구별하여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곧에서 대인과 소인은 나이의 차이로 구별되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의 대인과 소인은 유교나 도교의 문화적 사고의 영향을 투영하는 인격적인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대인은 주로 도량이 넓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소인은 속이 좁고 이기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대인은 때로 군자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유어의(喩於義)하고 소인은 유어이(喩於利)니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민첩하다는 말입니다. 대인 혹은 군자는 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소인배라는 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스타일과 상관없이 대인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고 소인 소리를 들으면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자신을 소인 즉 작은 자의 자리에 두시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십ㄴ다. 물론 여기서 큰 자 혹은 작은 자의 개념을 예수님은 인격적인 용도가 아닌 사회적 용납의 폭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 존종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작은 자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작은 자와 동일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작은 자들이란 마태복음 25장의 문맥에 의하면 병든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인 것입니다. 제가 임의로 여기에 하나의 카테고리를 덧붙인다면 신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장애인들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소위 예수님의 치유 이적 가운데 대부분은 바로 이런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습니까?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삶의 습관이셨습니다.

지난 금요일(4월 20일)이 국가적으로 장애인의 날이어서 오늘 주일을 우리도 장애인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한 시각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장애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장애인 사랑-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1.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반응형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지나치게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부모니이까” 우선 우리는 이전 제자들의 질문의 밑바닥에 뿌리박고 있는 그들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편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 제자들의 편견은 아직도 오늘의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나치는 장애인 형제나 자매를 자연스럽고 편하게 대하지 못하고 더러는 피하고 싶고 더러는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해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편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장애인 시설이 자기 동리에 들어서면 항의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끼어 있지는 않은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선 예수께서 그에 대하여 ‘이 사람’이라고 호칭하고 계신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그는 꼭 같은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한 동안 이들에게 비하된 호칭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 심지어 병신이라는 호칭까지 무분별하게 사용해 온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경 번역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나온 개역 개정판은 소경 대신에 맹인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신체장애인, 정서 장애인등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호칭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자기나 자기 조상의 죄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당시의 문화적 혹은 종교적 편견까지도 강하게 부인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편함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죄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들이 특별하게 더 죄인이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편견을 속히 극복해야 할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애인하면 선천적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 중 선천적 장애인은 20%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산업화되면서 더욱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결과(산업재해, 교통사고, 약물복용, 노인성 질환 등)이기도 합니다. 이제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 인구의 10%는 장애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통계는 오늘날 인구 고령화의 추세로 훨씬 더 증가추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는 앞으로 20년 후에는 인구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인으로 일생의 한 시기를 살다가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비 장애인의 범주에서 예외 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특별한 사람만이 장애인이 된다는 편견에서 이제는 우리 모두 벗어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도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당신 자신도 장애인이 되었을 때 사랑받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지금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의 편견에서 해방되십시오.

2. 작은 자 사랑을 우리의 미션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편견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미션을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3절에서 이미 이런 불편한 인생을 사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이제 계속되는 4절을 읽어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 미션의 정의가 있지 않습니까? 미션(Mission)이란 단어는 본래 ‘보냄 받았다’는 나전어 단어‘missio'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미션을 “우리를 보내신 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라는 정의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가장 큰 미션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위대한 명령 혹은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명령 못지않게 우리가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명령을 가르쳐 우리는 위대한 계명 혹은 가장 큰 계명(Great Commandment)이라고 합니다. 이 위대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작은 자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우리의 소그룹 공동체인 목장 교회에서 전도와 함께 사회봉사 혹은 구제 사역에 동참하시도록 끊임없이 강조하고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2:7-8에 보면 바울 사도는 베드로에게 주께서 그의 동족인 유대인 복음 전도를 맡기신 것 같이 나에게는 이방인 복음 전도를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는 바울 사도의 미션의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복음 전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관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인 습관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작은 자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은 구약에서부터의 일관성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레위기 19:13-14을 읽어 보십시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작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작은 자들을 보호하고 아끼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의 실천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의 장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심판하시는 그날-그분은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심판의 준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이런 질문들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너희는 내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고 길을 헤맬 때 나를 도운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몸이 불편한 내가 먼저 타도록 배려한 일이 있느냐?” “너희는 몸이 불편한 내가 주차장에 먼저 차를 주차하도록 장애인 주차장 공간의 의미를 존중하고 그 자리에 불법 주차하지 않도록 늘 질서를 지켰는냐?” 우리 중에는 틀림없이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셨고 언제 길을 헤메이셨으며 언제 몸이 불편하신 일이 계셨습니까?”라고 말하실 것입니다. 주님 다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맞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작은 자 사랑-그것은 주님의 미션이요, 주님의 제자 된 여러분과 저의 미션임을 잊지 마십시오.

3. 장애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더러는 장애인들에게 선교적 관점을 갖고 다가서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법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로 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의 도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예수께서 여러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 치유하시는데 그는 결코 동일한 방법을 일률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만으로 고치시는 어떤 사람은 안수하셔서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두고 치유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면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그의 영적 필요를 다루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에 대해서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눈을 씻으라고 처방하십니다. 아마도 이 맹인은 자신의 눈에 차가운 물기 섞은 진흙이 발라지고 그리고 그의 눈에 다시 연못을 물로 그 진흙이 씻겨질 때 구체적으로 자기 눈에 주님의 터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내 눈에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접근하시고 그의 믿음을 붇돋아 주실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방법으로 도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만 하시면 고칠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접근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도울지 모르면 솔직하게 질문하십시오. “어떻게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도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맹인을 보게 하신 다음 주님은 마침내 그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9:38의 이 사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사실 우리의 이웃 사랑도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친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것이 궁극적인 필요요 도움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작은 자들을 돕는 것을 내가 누군가 이웃을 도왔다는 도덕적 자부심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신의 삶의 행복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이웃 사랑은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바리새인들의 부자연스러운 자기 자랑이나 공로게임 혹은 이런 장애인의 날 같은 경우에 겨우 시늉만하는 도덕적인 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으로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작은 자 사랑의 모범으로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Anne Sullivan)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어린 소녀 헬렌이 마침내 좌절을 이기고 일어나 교육의 놀라운 진보를 보이자 헬렌의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학교 교장 앞에서 설리번 선생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때 설리번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행복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제가 헬렌에게 도움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저의 보람이고 저의 행복이며 저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설리번은 헬렌을 돕는 것을 자기 자랑이 아닌 자신의 인생의 가치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헬렌은 스승에게서 이런 자연스러운 이웃 사랑의 실천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888년 4월 16일은 헬렌 켈러가 8살 되던 해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던 날이었습니다. 설리번 선생의 특별한 부탁으로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처음 교회에 나오는 헬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주었고, 반의 아이들 모두는 일일이 헬렌에게 허깅과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헬렌은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날 교회의 인상을 묻는 설리번 선생에게 ‘교회는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곳’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큰 자와 작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지식인과 무식인, 건강한 자와 신체 장애인이 벽을 헐고 함께 어우러져 행복을 나누는 곳, 서로를 축복하는 곳-그곳이 바로 교회요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천국을 만드는 또 하나의 행복한 설리번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스스로도 인생의 마지막에 시력을 잃어버리고 맹인이 되어 숨을 넘기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행복하다”였습니다. 설리번의 일생은 남을 행복하게 함으로 자신도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생이 아니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 인생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