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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9장 25-27절 예님의 거룩한 습관(6) 가족 돌봄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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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19장 25~27 , 딤전5장 8
설교제목 : 예님의 거룩한 습관(6) 가족 돌봄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지난해 관객 1,300만을 동원한 국내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영화 ‘괴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남겼습니다. 반미와 환경 문제등 다양한 이슈를 제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봉준호는 이 영화가 이념보다 가족 영화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괴물이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괴물과 맞서 싸운 박 강두네 가족들이었기 때문입니다.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그의 가족이야말로 그가 오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부각하고 싶어 한 우리 시대의 잃어버려져가는 가치였던 것입니다. 딸 현서의 생존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했고, 이 주인공 가족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유일한 가치가 바로 가족의 가치였습니다.

오늘도 구정을 맞아 저 고속도로를 메우고 있는 차량행렬은 바로 이 가족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생들의 외로운 몸짓이라고 한다면 너무 감상적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고속도로를 메우는 귀성행령을 우리는 단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고향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고향의 산천입니까? 아니지요. 고향의 산천은 그대로 있는데 고향을 찾지 않으시는 분들은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더 이상 가족이 없는 때문이 아닙니까? 고향이 그리운 것은 단순히 고향의 산천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한 그 추억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고향에 가지 않아도 고향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이유는 우리의 가족들과 어우러져 흐느적거린 그 추억의 자취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가족관의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 우리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의 가족관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족관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1.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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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협의의 가족’의 테두리에 갇혀 ‘광의의 가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족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의 마당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웃의 가족에 해가 돌아가게 하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가족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보다 좀 더 큰 개념인 민족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민족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고 침략하는 행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협의에서 사용되는 좁은 민족주의는 결국 병든 애국심이요,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가족 사랑이나 민족사랑은 가족이나 민족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족보다 민족보다도 더 높고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관을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복음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설교 중이었는데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마태복음 12:49~50의 말씀을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르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저는 결코 이 말씀이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예수께서 부인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슴은 혈연적 가족의 범주를 초월하는 가족관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의 제자들이 또한 바로 그의 가족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이셨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을 태국 파타야에서 우리 교회 파송 선교사님들의 가족 그리고 섬김이들 모두 90여명의 식구들과 한 주간을 함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과 일본,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지에서 그리고 태국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던 모든 가족들이 그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다 함께 모였습니다. 너무 소중하고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얼싸안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받고 함께 격려를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느낀 가장 강렬한 공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 우리는 가족이었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과 헤어지며 제 가슴에 떠오른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이냐--[다시 말하면 누가 내 가족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가족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적 가족관 즉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목장 교회에서 깊은 은혜와 사랑을 나눌 때 혈연의 가족 못지않은 동일한 가족애를 느끼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묶여진 형제와 자매들- 그들이 우리들의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함께 묶여져 평생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중심의 성경적 가족관의 정체입니다.

2.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가족의 책임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가족관이 우리의 혈연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가족들에게도 최선의 책임을 다 하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최후의 3년-즉 공생애 기간 동안 그는 자주 이미 소개한 성경적 가족관 즉 하나님 중심의 광의의 가족관을 피력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이 십자가를 앞둔 공인의 입장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공생애 3년 이전에 30여년을 고향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성실한 가족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던 말씀처럼 12살 먹은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방문이후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좋은 아들이요 좋은 가족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후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시자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막6:3) 사람들은 정확하게 그의 착한 마리아의 아들로 살아가던 모습,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잘 감당하신 그의 성실했던 직업인의 모습, 그리고 그의 육신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과 어울리며 살아가던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으로써의 성실성은 그의 지상생애 마지막 십자가 사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통치시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거기에 죄인이 되어 두 강도와 함께 매달리신 예수님-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면 자신의 고통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게 된다도 합니다. 그런데 이 최악의 고통의 시간-예수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셨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의 어머니의 복지 문제를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고통의 절정의 순간 그분이 기억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어머니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지하신 지혜로 그의 어머니의 마지막 여생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부탁하십니다. 그가 거느리신 제자들 중 가장 오래 살수 있는 제자를 생각해 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본문 26절에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심 예수님, 27절에서 요한을 주목하여 말씀하십니다. “또 그 제자(요한)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그분의 지상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신 일-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가족을 돌보시는 일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족 돌봄의 교훈을 승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관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처음 생생한 영향을 받은 처음 제자들이 어떤 가족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예수님 이후 세상을 복음화한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딤전 5:8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기 바울 사도는 가족 돌봄을 포기한 사람들을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교훈을 자신의 목회의 승계자인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또한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디모데전서의 교훈을 시작하며 바울은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 1:1-2)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이 예수님의 명을 따른 목회적 교훈의 하나로 그가 주께 받은 교훈이 가족 돌봄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모범이요,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의 유산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분의 제자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가족 돌봄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디모데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바로 우리의 이런 가족 돌봄의 노력이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기독교의 최대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기족교인들의 의식구조를 연구하는 조지 바나(George Barna)라는 분에 의하면 현대 기독교의 최대의 문제는 신자와 불신자의 삶에 다른 것이 없는 것(범죄율, 이혼율등)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2세기의 한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인 ‘디오크네투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Diognetus)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헌학적으로 1~2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들여다 볼수 있는 매우 소중한 편지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갖고 아기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처럼 아기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아기를 낙태하고 아들이 아닌 딸을 버리는 것은 관행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관행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또 하나의 관행이 늙은 병든 부모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관행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역사는 그렇게 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소위 성도들에게는 어쩌다가 왜 이런 거룩한 습관이 상실되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동기의 결핍이나 상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모델이신 주님의 삶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신 주님- 그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결국 자신의 백성들 곧 그의 영적 가족들을 위한 거룩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괴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다시 배운 영화 괴물의 주인공 강두의 마지막 절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현서야, 나는 알구 있었단다. 네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했었는지. 남들한테 바보소리를 듣는 아빠를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언제나 어른처럼 입바른 소리를 하며 사랑을 나눠주던 너였다는 걸 아빠는 다 알고 있었단다. --맞아. 현서야 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네 이름을 하루에 열 두 번은 더 불러야 난 행복했단다. 넌 나의 분신, 넌 우리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런데 강두를 포함해서 우리의 문제는 너무 늦게 가족의 가치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게 너무 늦게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가족은 어떠신지요? 우리의 가족-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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