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 8장 1-11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3)간음한 여인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청년 시절 저의 생각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남긴 책의 하나가 유대인 철학자인 말틴 부버(Martin Buber)의 책 “나와 너”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라고 지적합니다. 나는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만 너를 만나고 너를 이용하고 너를 버리는 관계가 바로 나와 그것의 관계, 너를 물격화하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는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I-Thou)의 인격적 관계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만나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이런 만남을 그는 “나와 너”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틴 부버의 자서전을 쓴 작가 머리스 프리드먼(Maurice Friedman)이 부버를 늘 우편과 전화로 만나다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을 때 부버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내게 대한 책을 쓰는 사람이기에 당신을 이렇게 대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은 다만 하나의 인간으로 내게 소중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틴 부버는 너무나 책을 좋아해서 책 없이는 그냥 죽을 것 같다는 고백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러나 책과 인간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는 책이 아닌 인간을 선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몇 일씩 방안에 틀어박혀 문을 닫고 책을 읽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것은 내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말틴 부버는 유대인으로서 처음에 시온주의 운동에 헌신했지만 나중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거칠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시온주의 운동을 떠나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화 그리고 평화 공존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 결과로 그는 많은 동족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지만 그는 그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명한 벤 구리온 수상과도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로 극심한 갈등을 빚었는데 부버가 85세 생일을 맞았을때 벤구리온 수상은 그에게 유명한 축하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을 반대할 수밖에 없오. 그러나 당신을 존경하오”(I oppose you. I honor you) 그가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는 일생을 산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늘을 가르키며 “우리 모두--저~‘영원하신 당신’(Eternal-Thou)의 모습대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간음의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과 다르게 여인을 맞아주신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죄를 지었느냐와 상관없이 그 녀는 여전히 소중한 하나님의 작품이요, 예수님의 VIP였기 때문입니다. *과연, 간음하다 잡혀온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인간 모두가 죄인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죄를 미화하거나 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의 죄가 돌을 맞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달하고자 하신 진리가 무엇입니까? 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몸을 굽히사 땅에 글을 쓰시던 순간이야 말로 시계 바늘이 멎을 만큼 긴장된 침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돌로 치지 말라”고 하시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부인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만일 그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 그가 친히 가르치신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긴장된 순간 그는 몸을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고 계십니다. 무슨 글을 쓰고 계셨을까요? 이 대목에서는 순전히 상상적이 될수 밖에 없지만 어떤 학자는 아마도 예수께서 돌을 들고 있는 자들의 죄목을 쓰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9절의 증언처럼 그들은 이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자리를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9절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그랬다고 기록합니다. 한 설교 가는 그래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순진한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시인한 것이 아닙니까? 만일 이 사건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났더라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시침 딱 떼고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쳤을 것입니다.그러면 도대체 사람들이 당연한 자신의 죄를 묵과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성품 안에 자리 잡은 두 가지의 본능-곧 공격 본능과 방어 본능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본능을 사용하여 우리는 남의 죄를 확대하고 자기 죄는 축소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죄는 별 죄가 아니고, 남의 죄만 죽을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현상을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약2:10-11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나니”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한 감옥의 방에 수감된 두 죄수가 있는데 한 사람은 간음죄로, 또 한사람은 살인죄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살인죄인이 간음죄인보고 어떻게 그렇게 연약한 어린 여인을 건드리느냐고--네가 인간이냐고 비난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간음죄인이 살인죄인보고 어떻게 넌 그렇게 힘없는 노인의 목숨을 빼앗느냐고--네가 인간이냐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바로 이웃의 죄를 비난하면서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지적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성경이 증언하는 그대로의 인생-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과 내가 간음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2.예수 안에만 용서가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던 무리들이 자리를 다 떠난 후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선언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절)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시기에 이 선언이 가능할 수 있으셨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장에 친구 네 명에게 들것에 실리어 예수님 앞에 나아온 중풍병자에게“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실 때 거기 있던 서기관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막2:7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몰랐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서에서 증언하려고 한 핵심 선언의 하나가 바로 예수의 신성-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달리 예수께서 ‘내가’(ego-ego eimi)라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선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으로서 이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더욱 이 예수님은 잠시 후 이 여인의 죄와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로 가실 분이 아니십니까? 실제로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이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구속자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1:14) 그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여 속죄 양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시고자 오신 분이었다고 증거 되지 않았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1:29,36) 그래서 한 신학자는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이 선언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1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이 대목에서 기독교 교리에 민감하신 어떤 분들은 아마 아직 이 여인의 회개의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용서를 선언하실 수 있느냐고 물으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타당한 질문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용서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모습은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여인이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바로 그 모습이 회개의 모습이요, 그 엎드림의 자리가 이 여인의 회개의 자리였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자취를 감춘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자신들의 인생을 돌이킬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잘못했습니다.”-이렇게 말할 용기도 없거든 그냥 그 자리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 마음에 회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마음의 찢어짐, 상한 마음의 토해냄은 입술의 고백이상으로 중요한 회개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3.용서 받은 자에게 새 삶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만으로 이 여인을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덧 붙여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는 그녀의 용서 받음의 증거로 새로운 삶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은 구원의 소극적 은총에 불과 합니다. 구원의 적극적인 은총은 새 생활의 출발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 받음은 이제부터 새 삶을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새로운 인생의 걸음을 시작할 수 있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새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8:12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새 삶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그 분만 바라보고 그 분만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어둠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빛을 등지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빛 안에 머무시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으십시오.유명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성화(그림 참고)를 보면 따뜻한 빛이 한 가운데 엎드린 여인을 둘러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너무나 환하고 밝고 따뜻합니다. 바로 이 빛 안에서 그녀는 용서를 경험하고 새 인생의 출발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삶을 지켜보는 또 다른 용서 받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과 함께 이제 이 여인은 일어서서 새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KAL기를 타고 미국 뉴욕에 가면 뉴욕 케네디 공항에 내립니다. 그런데 뉴욕에 이 공항 말고 또 하나 공항이 있는데 이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이라고 일컫습니다. 본래 라과디아는 오래전 뉴욕 시장이었던 피오레로 라과디아(Fiorello Laguardia)씨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시장을 하기 전에는 즉결 사건을 담당하던 판사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판사 시절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935년 미국 대공황시의 추운 겨울 한 할머니가 배고파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딸은 아파 누웠고, 사위는 도망가고 너무 배고파하는 두 손자를 보고 할 수 없이 빵을 훔쳤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10불이나 혹은 10일간의 옥살이 벌금형을 내리면서 이렇게 선고문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범죄에는 나도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쌍한 노인이 먹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10불은 제가 내도록 판결을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중절모자를 벗어 10불을 넣어 법정 서기 (Bailiff)에게 주면서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 계신 마을 분들도 무죄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모두에게 50센트 이상의 벌금을 선고하는 바입니다. 저의 지불로 피고는 벌금을 해결하지만 여러분의 벌금은 이 분의 새로운 삶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고 선고를 했답니다. 법정에 있던 분들은 이 명 판결문을 듣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라과디아 판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날 이 노인은 당시로는 적지 않은 액수인 $47,50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법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용서가 그런 용서였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이 용서를 체험하신 여러분, 아직도 이런 주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거하는 이웃들에게 책임을 느끼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몸으로 죄를 대신하고 오늘 이 성경의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신 바로 그 동일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이웃들을 소중한 VIP로 기다리고 계시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안에만 참된 용서가 있다고, 주님 안에만 새 삶이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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