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13:34-35
설교제목 : 서로 사랑하십시오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미국에서 아더 힝클리(Arthur Hinkly)라는 이름을 가진 18살 먹은 소년이 무려 300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트랙터(농장에서 일하는 자동차)를 혼자의 힘으로 들어올린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역도선수가 아니었고 타고난 장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날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자기 여자친구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소녀가 언덕에 세워둔 트랙터 아래서 놀다가 갑자기 밀려 내려온 트랙터 바퀴에 이 소녀가 깔리게 되자 소리를 질렀고 이 비명을 듣자마자, 아더라는 소년은 달려가서 트랙터를 들어올린 것입니다. 이 소년의 힘은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비단 트랙터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힘이 바로 이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독교회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소위 국교화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정교회가 없어지고 소위 예배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한 다음부터의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가정'(집)이라는 사랑의 현장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주신 소위 다락방 강화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12명으로 구성된 셀교회 교인들에게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생활수칙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명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목장교회가 왜 중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목장교회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첫째 메시지- 서로, 사랑하라-를 잘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사랑의 명령은 왜 중요합니까?
--주님의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란 결코 처음 이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옛 계명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계명을 요약하여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래 이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란 독선에 빠진 나머지 이웃사랑의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주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명령 곧 새로운 기대 이셨던 것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옵션이 아닙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사랑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공동체는 바로 이 사랑의 숙제를 풀어야 할 사랑의 교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과거에 교육현장에서 콩나물시루 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한 교실안에 학생들이 과다할 때 선생님에게는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신경 쓰는 것이 불가능했거니와 숙제검사조차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스타일이 만일 주일예배 중심이라면 우리에게는 사랑을 배울 기회도 실천할 공간 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목장 교회 안에 들어가 10명 내외의 이웃들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면 자신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 작은 목장교회를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이 세상을 향하여 할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12제자를 택하여 공동체가 되게 하신 주님의 기대요, 우리교회가 목장교회로 새롭게 출범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명령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 기초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기대요, 마지막 기대이십니다.
2.사랑의 명령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앞서 선행하는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랑의 케이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 케이스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이웃의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둘째 케이스는,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일입니다.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스스로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의지적 결단이란 감정적 결단과 비교하시면 됩니다. 감정적으로는 사랑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만찬의 식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잔을 건네어 주셨습니다. 저 유명한 화란의 할머니 코리 텐붐이 종전후 언니와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던 라벤스 부르크 수용소 간수를 만나 악수의 손을 건넨것도 마찬가지 결단이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의지적 결단을 먼저 했을 때에 할수 없는 일에 대한 도움도 따라올 수 있었다는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3.사랑의 명령의 실천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작고하신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달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도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직도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세상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작은 공동체인 목장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만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외면한 까닭일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현저한 이유중의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직전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 가정교회 안에 있었던 사랑의 교제-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자력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애절한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가운데 앨리스라는 공주(Princess Alice)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왕실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그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딸과의 신체적 접촉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한날 밤중에 딸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고 공주는 잠을 깨었습니다. 딸에게 달려가 보았더니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공주 엄마에게 "엄마, 키스해주어요"(Mamma, kiss me!)라고 했고 공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딸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얼마 후 공주도 이 병에 감염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공주님, 왜 그렇게 하셨어요?"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앞으로 열 번이라도 키스할 것입니다." 공주는 갔지만 딸을 살렸고 영국인들에게 사랑의 영원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사랑으로 이웃이 살아나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제 사랑의 실습장인 우리의 가정으로 그리고 확대된 우리들의 영적 가정인 목장교회로 돌아가셔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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