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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장 45-51절 예수님의 VIP(4) 나다나엘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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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요 1장 45-51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VIP(4) 나다나엘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예수님의 VIP(4)나다나엘

 

추석 절을 잘 지내셨는지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전도의 기회도 가져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두 주 후면 이웃 사랑 축제가 열립니다. 이 축제는 믿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고귀한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그 일을 중단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는 전도해도 이제 수용할 공간도 없지 않은가 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교회가 직면한 문제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꼭 어떤 분을 우리 교회 교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전도 받은 분들이 예수만 믿을 수 있다면 어느 교회에 출석하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를 꼭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일차적 과제는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일단 복음을 들으면 복음의 씨가 그 마음에 뿌려 지는 것입니다. 결실은 당장이 아닌 얼마 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전해진 말씀은 결코 헛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바울 사도는 낙심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중요한 것은 복음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이웃들인 전도 대상자들, 곧 우리들의 VIP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 그가 만나주신 한 VIP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다나엘로 되어 있습니다. 이름으로 미루어 그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의 다른 이름이 공관복음서의 12제자 명단에 나오는 바돌로매 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2제자의 명단에 바돌로매가 나오면 나다나엘은 나오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에는 바돌로매만 등장하고 요한 복음에는 나다나엘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돌로매라는 이름이나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빌립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학자들은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돌로매의 뜻은 ‘돌마이의 아들(바)’이라는 뜻입니다. 돌마이는 물론 그의 부친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흔히 사람들에게 돌마이의 아들로 불리워졌지만, 그의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였던 빌립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의 이웃을 복음적으로 접근하는 예수님 자신의 효율적인 전도전략을 학습하고자 합니다. 자, 이제 오늘의 본문-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레슨은 무엇일까요? 

 

1.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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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피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네 사람이 만나 서로의 약점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친구는 자기에게는 사실 거짓말을 고치지 못하는 약점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친구는 도벽의 습관을 고백합니다. 셋째는 성적인 약점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넷째 친구만이 가만히 있어서 “너는 통뼈냐? 너도 고백을 하라”고 다그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내 약점은 다른 이들의 비밀을 알면 불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고백한 사람들이 큰 일 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의 초점은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인도하고자 할 때에도 이런 약점들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본문에 나타난 나다나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약점은 한마디로 말하면 편견입니다. 문화 평론가인 손드라 티더맨(Sondra Thiederman)박사는 “편견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지니는 특정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선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의 태도이다”라고 말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던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그는 소위 오늘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방색의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편견은 설명만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편견의 가장 효율적인 해소는 사실을 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도 단순한 설명만으로 해소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의 편견을 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습니까? 46절의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십시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오해했다고 말합니까?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반론을 제시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직설적이었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와서 보라”(46절)입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런 전략으로 나다나엘의 편견이라는 약점을 돌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지구촌 성도들이 다가오는 이웃 사랑 축제에서 사용할만한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변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냥 한번만 “와서 보십시오”라고 초청하십시오. 기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십시오.윌로우 크릭 빌 하이블 목사님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 전도 집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니까 무대 앞에 너무 빈 공간이 많아 시설 담당자에게 여기에 의자를 놓으면 1,000명 정도는 더 수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빈 공간에 빌리 목사님이 구원 초청을 할때 수천의 사람들이 이 곳으로 걸어 나와 결신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그는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가 수많은 영혼들을 결실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믿음 때문인 것을 실감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초청하는 이들이 결신할 것을 믿고 초대하십시오.

 

2.인간은 누구나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접촉할 때 단지 그들의 약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여는 것은 상대의 강점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비판받고 있다고 느낄 때 더욱 방어적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방어의 가면을 벗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사용하신 전략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견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7절입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의 칭찬이 나다나엘로 그의 가드를 내리게 하고 그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방어를 위한 싸움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진정성을 칭찬해 보십시오. “선생님의 생각과 판단은 참 진지하시군요. 실제로 우리 기독교가 그런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비판은 선생님의 관심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회에 한번 복음을 직접 들어 보시도록 초청하고 싶군요”라고 말해 보십시오.요즈음 유행한 베스트 셀러의 제목처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칭찬은 사실에 부합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안에서 그런 칭찬받을 만한 강점을 보신 것입니다. 실로 나다나엘의 강점은 정직함이었습니다. 그의 안에 내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숨기는 이중 플레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정직성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무석씨가 지은 책 “30년만의 휴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한 여학생이 시내버스에서 껌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버스내 승객들에게 이런 말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병든 어머니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비를 벌기 위해 껌을 팔고 있습니다. 한 통에 300원입니다. 한 통씩만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늘 볼 수 있는 동정심을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는 껌팔이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신사가 이 소녀에게 1,000원 짜리 지폐를 내밀자 소녀는 700원을 거슬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사는 “돈을 거슬러 주는 것을 보니 넌 정직하구나.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했답니다. 이 때 소녀는 그 돈을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학비를 벌기 위해 장사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순간 버스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여기저기서 껌을 사겠다고 소녀를 불렀습니다. 껌은 순식간에 다 팔렸다고 합니다. 이 순간 승객들을 움직인 힘-그것은 정직이었습니다. 이런 정직함과 진지함으로 이웃들의 강점을 칭찬하며 접근해 보십시오. 전도의 무한한 기회가 열려 올 것입니다.

 

3.인간은 누구나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전도 대상자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참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구주이심을 믿지 않는 한 아무도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인인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주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 중요한 구원의 강을 건너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VIP 인 나다나엘에게 당신이 참으로 누구이신가를 계시하십니다. 4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무슨 말입니까? “너에게 전도를 한 것은 빌립이지만 빌립이 너에게 전도하기 전 조금 전까지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무엇을 네가 기도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생각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네가 고민하고 있었는지--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49절의 나다나엘의 반응을 주목하십시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이 평범한 인생 이상의 분, 존경할만한 스승 이상의 분,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그렇다면 그는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 구주라는 인식에 도달한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끝나시지 않고 좀더 명확하게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나다나엘에게 알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의 확실한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50절에서 나다나엘에게 무화과 나무아래 있던 너를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보다 네가 더 놀라울 일, 더 중요한 일, 더 위대한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잘 아시는 대로 이는 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벧엘의 들판에서 밤에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야 말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로 오실 메시아의 예언적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는 딤전2:5에서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본래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진지한 구도자들이 인생을 사색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오실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구도의 마음을 아시고 주께서는 빌립을 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 가을 낙엽이 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 시대의 나다나엘들이 이 땅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가 하늘의 사다리를 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그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들도 이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분, 오직 예수만이 그들이 인생의 해답이라고 희망이라고 구원이라고 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그들이 무신론자들이고 안티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19세기 말에 토마스 헉슬리라는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한 과학자였고, 후에 자신의 입장을 무신론에서 불가지론으로 바꾼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한 무리의 명사들과 시골을 여행하다가 주일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갈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헉슬리는 한 사람에게 예수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여행길에도 그를 예배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의 눈에 있는 공허함을 발견한 이 그리스도인은 헉슬리 곁에 머물러 그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이 교회에 다녀오기 까지 들어준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 같은 학자에게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떠나도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친구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 당신 곁에 친구로서 이제까지 머물기를 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오른 손을 내밀며 “그리스도가 당신 같은 친구라면 나도 그를 믿고 싶소”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의 영혼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을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 줄 당신의 VIP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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