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 6장 52~59절
설교제목 : 영원히 사는 것[부활절]
설교자 : 정대운 목사님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요한복음 6장 52절-59)
1. 이스라엘의 승천 이야기
1) 에녹의 승천 이야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주셨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비신앙인이 되고, 아벨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셋을 주셨습니다.
셋은 아담, 가인의 실패를 구원할 상징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은
가인의 범죄가 남겨놓은 폭력과 범죄의 땅을 구원하고자 태어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아담에서 셋을 거쳐 노아에 이르는 아담의 자손들에게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한 에노스가 그렇고(창 4:26),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그러하며(창 5:23),
저주받아 고생하는 인류에게 구원과 위로를 주게 되는 노아가 그러합니다(창 5:29).
창세기 4장에는 아담, 가인으로 이어지는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의 족보는 세상 문명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족보가 나옵니다.
이 아담의 족보에는 신실한 신앙인들이 나옵니다.
'셋'이란 이름이 '약속된'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단어와 유사한 발음을 가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셋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셋의 후예를 통해서 세상 속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는 더 많이 사랑하시고 가인의 자녀는 덜 사랑함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사랑하시고 조금 덜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생깁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족보는 태어나고, 출생후의 생존기간 그리고 죽었다는 단순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족보를 읽는 사람의 눈길을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뜨거운 감동으로 남는 사람이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셋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유난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데려갔다'는 동사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후에 에녹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 땅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까지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시간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영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여기 살아있는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에녹을 만나면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영원한 삶의 꿈을 갖게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꿈꾸게 하십니다.
2)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구약시대에 아주 특별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가정이나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을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길르앗 지방의 디셉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신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릴 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섬긴 정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예언은 열왕기상 17장에서 시작됩니다.
이 때는 이미 제사장 나라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입니다.
여로보암 왕 때에 나라는 분열되었고 우상숭배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므리가 왕이 되어서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게 했습니다.(왕상 16: 25-28)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의 예언이 시작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아합왕에게로 나아갑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노아 시대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은 물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뭄입니다.
여러 해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식물이 말라죽으면 동물도, 사람도 견디지 못합니다.
여러 해 동안 가뭄이 계속된다면 이 땅은 쓸모 없는 사막이 되고 맙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왕은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는 그릿시냇가에 숨고,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과부 집에서 목숨을 부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공궤한 과부의 집은 축복을 받습니다.
과부의 집에는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입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세월이 흐릅니다.
3년 동안의 가뭄은 모든 생명의 위기가 오는 때입니다.
사마리아의 기근이 극심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엘리야는 아합왕을 만납니다.
아합왕이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때 엘리야가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고 대답합니다.(왕상 18:16-18)
그리고 갈멜산에서 850대 1의 대결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과 흡사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은 850명인데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든 바알과 아세라신은 사람보다도 못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떨어집이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은 태우고 활활 타오릅니다.
그리고 구름이 보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입니다. 그리고 비가 내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하늘에 올리고자 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박해로 절망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승천시십니다.
하나님은 불수레와 불말을 보내서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를 떼어놓고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올립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승천 사건의 증인입니다. 목격자입니다.
엘리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영원 속으로 옮겨졌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기에 평화입니다.
2.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 (눅 24:13-35)
1) 낙향하는 사람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시골뜨기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시골사람들은 대도시 서울을 동경합니다. 예루살렘을 좋아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서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또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다. 거기서도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사람 사는 곳마다 온갖 병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입니다.
우리의 몸은 찢어지고 깨어지기 쉽고, 상처를 받습니다.
또 병이 외부에서 침입하기도 하고 더러는 내부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젊을 때는 감기 정도는 가볍게 여기지만
저항력이 떨어지는 노년이 되면 감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어르신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9절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글로바가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글로바가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보다 유명하고, 훌륭하고, 능력 있고,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보다도 설교를 잘하시고, 병자를 잘 고친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누구에게 비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실 때
실제로 그 속에서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바다를 잔잔하게 할 때,
귀신을 쫓아낼 때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로바와 또 한 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엠마오로 돌아갈까요?
청운의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온 이들은 왜 시골로 낙향할까요?
두 제자는 슬픈 마음과 얼굴로 시골로 내려갑니다.
누가복음 24장 20절-21절에서 설명합니다. 글로바는 낙향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인데
나라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형판결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실망하고 낙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서 이렇게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이젠 예수님에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을 안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꿈이 사라지니 엠마오로 낙향합니다.
사람은 상황에 이렇게 예민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슬픈 마음과 얼굴로 낙향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슬픈 현장에 찾아오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의 지휘아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째입니다. 이젠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소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2절에서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 나셨다"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믿지 못하였습니다.
여자들에게 들은 소식뿐 아니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도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누구와 동행합니까?
누가복음 24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행하지만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3년 동안 함께 동거동락했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4장 31절에서 그들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은 낯선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 음식을 잡수실 수도 있고, 본래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문을 닫아 놓았는데도 방안에 들오실 수도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꿈을 잃어버린 제자들의 텅 빈 가슴에 말씀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믿지 못해서 냉가슴이 된 제자들에게 마음을 뜨겁게 해주십니다.
꿈이 사라져 낙향하고, 슬픈 마음에 말씀을 넣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24장 25-27절의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질 때 꿈이 생깁니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3절에서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렇게 빠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낙향할 때는 몸이 천근 만근입니다.
꿈이 없을 때는 흐느적 흐느적하고 휘청휘청합니다.
이 제자들은 새벽에 빈 무덤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에 엠마오로 출발합니다.
겨우 25리의 길을 하루종일 터덜터덜 걷고 있습니다.
두 세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이들은 하루종일 걷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나온 사람이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 때까지 터덜터덜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니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서산에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데 아직도 땅거미가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냉가슴에는 꿈을 상실합니다.
뜨거운 가슴에는 꿈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입니다.
3. 주님의 약속 - 영원히 살리라
1) 하늘에서 내려온 떡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 영원한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꿈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첫 열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새로운 몸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신령한 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오른편에서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두 가지의 떡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준 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그 백성들을 배고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그 떡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그 떡도 참으로 신기한 떡입니다.
그러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떡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의 떡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 떡이 무엇입니까? 이 떡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6:35)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48)
이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입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이 말씀으로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몸은 보이는 떡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떡입니다.
2) 예수님 - 참된 양식, 참된 음료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급요리를 먹고 비싼 음료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영원히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처럼 우리의 입으로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꿀꺽꿀꺽 삼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꿀꺽꿀꺽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배에 채우고 창자에 채우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생명의 떡이 들어가야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는 그리스도인을 식인종이라고 박해했습니다.
정말 예수님 자신의 팔의 살을 손으로 뜯거나 칼로 베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을까요?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26:26)
또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26:28)
요한복음 6장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절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58절에서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신령한 몸이 되는가?
사람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신령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신령한 몸이 될까요?
요한복음 6장 55절에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56절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너희 안에 거하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려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신령한 몸이 될까요?
우리의 육신은 썩을 것이지만 부활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비유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콩 심은 데 팥이 나지 않고, 팥 심은 데 콩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은 콩 그대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콩을 심었는데 콩이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줄기가 퍼집니다.
그것은 처음 땅에 심은 콩과는 모양이나 기능도 다른 것입니다.
처음 땅에 묻은 것이 우리의 육신이라면 나중에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줄기가 퍼지고.........
이것은 새로운 몸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몸에 대한 고린도전서 15장의 설명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합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흙사람이 신령한 몸이 되어 하늘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런 신령한 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이렇게 신령한 몸이 되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는 주님의 살과 피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어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모두 신령한 몸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자녀로 택하시고 불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꿈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이 무엇입니까?
흙사람에서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지 말씀을 통해서 밝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에녹을 보여주시고 엘리야를 보여주신 것은 우리에게 꿈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활하게 하신 것은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꿈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 우리도 흙사람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이 되어서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에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꿈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이 세상에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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