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3장 14-22절
설교제목 : 웰빙교회 비전(7)라오디게아 교회2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요? 단순한 GNP비교가 아니라 여러 조건을 종합하여 평가하면 미국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끼니를 굶는 가난한 이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그것도 미국입니다. 수년전 보고서를 보니까 약 410만가구 1,100만명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끼니를 굶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북한 인구중 약 1,000만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면 실제로 북한 인구보다 더 많은 기아인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국내 결식자가운데 약2백만명은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는 날이 종종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려 2백만명의 인구가 절대 영양 실조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 인구중 약 1%가 이 풍요의 나라에서 하루 한끼도 못먹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 숫자는 홈리스라고 불리우는 약 60만명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한 통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1,100만명이 배를 곯고 있는 나라 미국땅 다른 한편에서는 한해에 무려 4,360만톤 즉 8톤 트럭으로 545만대 분량의 식량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묘사하는 적절한 표현을 찾을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풍요속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던 1세기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까지 연구한 소아시아 7교회중 서머나 교회와 정 반대의 처지에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궁핍한 것 같으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시던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한 교회였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 같으나 가난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자, 이제 소아시아 일곱교회 연구 에베소에서 시작한 여행이 그 마지막 도시 라오디게아에 도달했습니다. 성서시대 브르기아로 불리우던 지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리쿠스 강(Lycus)계곡을 따라 반경 15km내에 골로새, 히에라볼리(파묵컬레)라는 도시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래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2세의 아내의 이름이 라오디게아였는데 그녀의 이름을 따 명명된 도시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14절을 보십시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충성됨 그리고 참됨이란 단어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신실성을 뜻하는 단어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신실하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주님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신 그분의 인상은 만일 이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응답하기만 하면 아직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분의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새 창조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신이가 우리를 다시 새롭게 고칠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분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2.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교회를 향한 칭찬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와 함께 책망만 받았던 두 교회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교회가 받은 책망은 두가지로 요약될수 있습니다. 첫째는, 열정의 상실이고, 둘째는 자아 성찰능력의 상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열정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자신의 현실 자체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15-16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그것은 마치 이 도시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인근의 유명한 온천지대인 히에라볼리(파묵칼레-목화성)에서 이 도시 라오디게아까지 온천수가 수도관을 통해 7-9km의 거리를 흘러 들어오는동안 미지근해지고 이물질등으로 오염되어 그대로는 마실수 없는 쓸모 없는 물의 상태, 그 토해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를 닮았던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의 저주는 이제 더 이상 쓸모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의 상태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민목회를 할 때 한 부부를 상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의 자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동기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너 필요 없어. 나가”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 내가 필요 없다고. 너 유학와서 공부하는 동안 식당에서 알바이트하고. 애 낳고 기르고. 이제 학위마치고 겨우 직장 구하여 자리잡도록 뒷바라지하고 살만하게 되니까. 그래 내가 필요 없다고.” 이 한마디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인생을 지속할 열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리오디게아 교인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 삶의 이유가 되는 열정을 상실한 필요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그뿐 아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거기에다 자아성찰의 능력까지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을 돌아볼수 있는 자아상찰의 능력만 있으면 우리는 그에게 아직도 희망을 걸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최후의 비극은 자신을 돌아 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는 “자정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을 돌아볼 이 안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외적인 풍요의 환경이 자신을 살피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아이로니칼한 것은 이 도시는 당시에 돈이 많아 금융업이 성행했고, 양모 의류사업으로 좋은 피복을 생산했으며, 이름난 안약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가난함을, 벌거벗음을, 그리고 보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적으로는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가난했고, 헐벗었고, 눈 먼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3.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은행에 쌓아둔 금이 아닌 시련을 극복한 믿음으로 부요해 지라고 권합니다. 이 지역에 유명한 양모가 아닌 흰옷 즉 마음의 거룩함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이 지역 특산품 안약이 아닌 성령의 통찰력으로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볼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히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열심히 회복된 상태이겠습니까? 저는 한마디로 다시 주님이 그들을 쓰실수 있는 상태에로의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회개의 목표는 회복입니다.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이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일대 전체는 온천지대와 좋은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만 석회질같은 이물질로 말미암아 물이 수도관을 통과하는 동안 물맛이 변질되어 먹지 못할 물이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세상을 통과하면서 성경적이 아닌 세속적인 이물질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주님이 쓰시기 어려운 상태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그렇다면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기자의 기도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영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여기 아주 인상적인 세 동사가 쓰여집니다. ("search-try-know") “나를 살펴주시고,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알게 하소서.” 그것이 회개의 첫 스탭입니다. 그래서 다시 내 인생의 주인되신 그분의 손에 붙들리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용되실수 있어야 합니다. 정녕 그분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심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4.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배워야 할 웰빙교회의 비전그렇다면 오늘의 21세기를 사는 이 시대의 우리 교회가 이 일세기의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배워야 할 레슨은 무엇일까요? 이 쓸모 없이 되어 버린 이 교회에서 역설적으로 배워야 할 건강한 교회 곧 웰빙교회의 비전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교회가 정녕 쓰임 받기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이미 쓸모 없이 된 우리가 다시 쓰임받을수 있는 자리로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첫 스탭을 나누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께 붙들려 사는 쓰임받는 인생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부부사이의 열정이 식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애정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한 지붕아래 산다고 저절로 그 애정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작년(2004)7월 한겨레 신문에는 결혼은 Yes, Sex는 No라는 기사가 실린적이 있었습니다. 여기 인용된 최근 통계에 의하면 성생활을 일주일에 1-2회하는 부부가 40,2% 한달에 2-3회가 29,9%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년에 몇번의 성 관계없이 사는 사실상의 sexless couple이 8,4%에 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 비하면 결코 놀랄만한 통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무려 28%나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을 잃은 부부들이 성의 만족을 가정 밖에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안에 살면서도 사랑을 잃어가는 비극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발생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전도할 때 자주 우리가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만 사실 여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도 주님을 마음문 밖에 세워둘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주님과의 관계까지 단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제는 얼마든지 끊어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없이 한 지붕아래서 생존만 하는 부부처럼 말입니다.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문을 두드리는 애절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다시 식탁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교제를 회복하십시오. 본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골로새서4:15에 보면 “라오디게아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라고 적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로 시작된 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과 성도들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등치는 컸지만 어느새 쓸모 없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소위 급성장하고 있는 우리 교회를 목회하며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주일 예배나 주일 교회만이 아닌 주간이나 주말에 가정에서 모이는 셀 교회, 목장 교회를 생명을 걸고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우리들의 눔바의 가정 그 친밀한 삶의 한 복판으로 돌아가십시다. 거기 우리의 존재를 열고 마음을 열고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그 자리 거기에 주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를 경험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일어서는 사랑스런 지체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통해 민족을 치유하시고 세상을 바꾸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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