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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웰빙교회 비전(5) 사데 교회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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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계3장1-6 
설교제목 : 웰빙교회 비전(5) 사데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웰빙교회 비전(5)사데 교회 

 

수년 전 세상을 떠난 동화작가인 정채봉 선생이 유명한 법정 스님을 산사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더운 여름이어서 낮잠이나 잤으면 꼭 좋을 그런 날씨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산사에 계시지 않아 어디선가 낮잠을 주무시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산사 후면 언덕길에서 내려오고 계셔서 무엇을 하고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칼로 대나무를 깍고 있었다”고 대답하시더랍니다. 칼도 날카롭고 대나무도 날카로운 것이어서 “아니 이런 무더운 날씨에 그런 위험한 일을 무엇 때문에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졸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깨어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깨어 있음” “깨어 있기”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깨어 있음”은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동하는 삶을 위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단어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은 사울 왕에게 붸기는 자신의 인생의 위기의 한밤에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고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 각성 없이 일상적인 안이함으로 이 역사의 중요한 저녁을 준비 없이 맞이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거대한 세속화의 파도가 밀려오는 시대를 살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시기를 알거니와 지금은 자다가 깰때”(롬13:11)라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는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고 권면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도 영적으로 죽어가면서도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하던 일세기의 한 교회를 향해 “깨어야 한다”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너는 일깨어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 다시 일깨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를 향한 권면의 키 워드가 바로 ‘깨어남’(wake-up)이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소아시아의 7교회중 다섯 번째인 사데 교회였습니다.

 

1.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 사데 교회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였습니다. 1절을 읽어 보시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이가 이르시되--”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계1:20에 보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곧 지도자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들어 인도하시는 교회의 진정한 주인되신 주께서 일곱 영 곧 거룩하고 완전하신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운명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의해 성령으로 인도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중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간섭이 필요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65Km 지점에 존재하는 도시로 고대 리디아 왕국(기원전 700년부터 546년까지)의 수도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들어 부의 상징이 되어온 도시였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78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이 도시에서는 연회와 오락, 축제가 끊임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치한 무역도시의 분위기를 유지해온 이 도시의 세속성은 훗날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믿음조차도 급속하게 세속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받은 복음에서가 아닌 세상의 권력과 재물을 우리의 소망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 사실 사데 교회는 칭찬보다는 훨씬 더 책망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아니 라오디게아 교회와 더불어 거의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도시의 세속화가 은밀하게 전체적으로 진행되어 교회까지 영적으로 잠들게 했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어떻게 이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까? 우선 1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하십니다. 2절에서는 “---내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 하였노니”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사데 교회는 명목상의 교인을 많이 가진 교회였습니다. 이름으로는 널리 알려진 교회였지만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의 불꽃같은 안목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인 시체라고 진단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 유사한 책망을 당한 무리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최고의 영적인 사람들을 자부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르쳐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경건한 복장을 입었으며 근엄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고 거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썩은 냄새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겉과 속이 달랐던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달랐던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증언을 들어 보실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23:27-28) 그들은 모두 종교적인 외식자들이고 위선자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 나타내는 종교적 활동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느끼는 분일수록 바리새인됨의 가능성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데 교인들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일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내면과 인격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겉으로 무엇을 사람 앞에서만 과시하는 소위 활동주의에서 찾고자 한다면 사데 교회의 비극은 이 시대 여러분과 저의 비극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사데 교회의 유일한 희망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데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는 거의 칭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희망의 싹이 존재한다고 증언하셨습니다. 2절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에는 아직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이 교회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이 남은 자들이 이 교회의 희망이고 세상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사데(Sardis)라는 도시명의 그리스어의 뜻이 ‘남은자’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교인들과 다르게 세속화를 거부하고 거룩한 삶을 열망하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인생을 사는 이 거룩한 소수를 가르쳐 4절에서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평소 세상을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거룩한 바보로 왕따(왕을 따르는 사람들)당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역사의 남은 자, 역사의 그루터기였던 것입니다. 유일한 희망의 그루터기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자랑은 건물이나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아닌 영성 이어야 하고 도덕성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영성 그리고 거룩한 도덕성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아무리 깜짝 프로그램을 많이 하고 화려한 건물을 자랑해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누리는 영성의 빛남이 없다면 그리고 세상 사람과 차별화될수 있는 거룩한 도덕성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개인으로서 이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빛이 비추기를 멈춘다면 소금이 그 짠 맛을 상실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로마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고 감화력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는 교회는 이 영성과 도덕성으로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4.사데 교회에서 배워야 할 웰빙 교회의 비전 한마디로 그것은 깨어있는 교회, 깨어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세기의 오늘의 교회가 1세기의 사데 교회에서 배워야 할 레슨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깨어있는 교회이고, 건강한 성도는 깨어있는 성도입니다. 본문 2절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온전한 것은 충만한 것으로 번역될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주님의 영성과 도덕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깨어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3절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여기 이 구절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동사--“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가 핵심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경고를 둘로 요약한다면 깊이 생각하고 깨어 자신을 지키던가 아니면 그렇게 못한 것을 지금이라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기 이 공동체를 향한 권면의 키(Key) 곧 열쇠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데라는 도시는 과거 리디아 왕국 당시 깨어 있지 못함으로 멸망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연상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통치자 크로에수스(Croesus, BC560-546)시대에 리디아는 페르샤 고레스 대군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페르샤 군대는 천연의 요새를 자랑했던 이 사데성을 좀처럼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리디아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믿고 시간만 벌면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에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 성의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방치해 두었는데 바로 이 곳으로 한 군인의 철모가 떨어지는 것을 관찰한 페르샤 군대가 바로 그 곳을 공략하여 이 사데 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사데의 장수들은 멸망하던 밤까지 리디아의 군사들에게 패배는 있을수 없다고 공언하며 깊은 잠을 자도록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잠이 죽음의 잠인 것을 모른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이튿날 새벽 그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당시의 세상의 희망이어야 할 사데 공동체와 성도들이 다시 한번 세속화의 어둠속에서 방심하며 기분좋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돈과 여유, 그리고 환경적인 축복이 그들의 믿음을 지킬 것처럼 착각하고 기도를 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마음을 떠나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만족에 빠져있던 사데 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영락없이 죽어가던 교회였습니다.

 

오늘의 교회를 마케팅의 방식으로 진단하며 연구하는 학자중에 조지 바나(George Barna)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중에 “주전자속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전자속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개구리를 집어넣은 다음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자기가 죽는것도 모르고 기분 좋게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늘의 교회가 바로 이런 처지에 처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죽어가고 있는 줄 모르고 기분 좋게 죽어가는 개구리-그것이 당신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깊이 생각할 때입니다.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의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깨어날 때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새벽에 깨어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민족을 깨우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바 있는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의 새벽을 예찬하는 새벽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자욱한 안개가 포근히 안아주는 봄날의 새벽을 사랑합니다. 풀섭에 내린 이슬로 바지 가랑이가 흥건히 젖는 여름 새벽도 사랑하고, 베고 남은 벼 포기마다에 서리가 새하얗게 내려있는 가을 새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겨울 새벽 창을 열었을 때 밤사이에 소리 없이 내려와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은 그 어떤 것보다도 횡재한 것 같지 않던가요? 그래서 나는 새벽 눈물은 사기꾼이 흘리는 것이라도 진실처럼 믿고 싶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인생의 새벽을 날마다 기도로 회개의 눈물로 깨우며 한해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다시 흔들어 깨울 때입니다. 깨어나십시오.(Wake-up!)그리고 새벽을 깨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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