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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편

시편 127편 1-2절 설교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조용기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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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시 127편 1-2절
설교제목 :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너희가 일찍이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 : 1, 2)

모든 교역자들이 다 그러하듯 저 역시 1974년의 첫 주일을 맞이하는 성도님들께 드릴 말씀 을 위하여 한 주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감동케 하심을 쫓아『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 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 : 1, 2)라는 이 시편 말씀이 우리가 일 년 동안 살아가는데 큰 지표와 복이 될 줄로 확신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우리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됨

찬송가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자니 반석 위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짓네'라고 하 였듯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집 을 짓는데 하나님은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지혜와 노력으로 집을 지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인간이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하나 님께서 함께 짓지 아니하시면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에서부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원하셨던지, 상함도 해함도 없고 모든 것이 다 구비된 에덴 동산을 세우시고, 그 동산 속에서 그들에게 섬김을 받으시면서 같이 살기를 원하시는 뜻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아담에게 "에덴에 있는 모든 실과는 따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세우는 그 집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고, 하나님 의 임재를 환영하고 하나님을 공경함이 그 가정 내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 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집을 세우는 데 있어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스 스로 집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즉시 그들 속의 사랑을 잃게 되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게 되었으며, 또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생활의 노예가 되었을 뿐 아니라, 끝내는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헛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 다. '공수래 공수거 인생' 이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집을 세우겠다는 인생의 종국이라는 것을 성경은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에 대해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에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다 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둘째 아들은 하나님 없이 집을 세우겠다는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이 둘째 아들도 아버지를 자기 가정의 중심에 모시고 그 영향력을 받으며 살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집을 세우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속한 분깃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 없는'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없이 가는 길의 종국은 허랑방탕과 파멸입니다. 성경은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생활에 서 떠나 곧 허랑방탕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육신의 쾌락을 더 사랑 하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결과로 다가온 것은 예기치 않았던 '기근'이었습니다. 기근은 가난과 궁핍과 질병을 몰고 와서 그가 하나님 없이 세운 집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기근은 끝내는 그를 돼지치기가 되게 하였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굶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없이 세우는 자기 생활의 비극을 깨닫게 된 탕자는 회개하고 종들조차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한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인본주의로 집을 세우면 그 세우는 수고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현실 생활과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담 이후로 인본주의적인 집을 지어왔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그 집은 물질로 갖가지 치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꽤 화 려하게 잘 지어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으며 쾌락주의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집을 아름답게 지어놓고, 갖가지 문화 시설을 다 갖추어 환경을 아름답고 편리하게 꾸며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정은 점점 삭 막해지고, 사람들마다 사막의 열풍이 불어와서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 일까요? 그것은 인생의 집을 세운 목적인 사랑과 행복과 참삶의 가치가 그 안에 없기 때문 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랑과 행복의 원천인 아버지 하나님을 그 가정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외면해 버림으로 텅 빈 집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 집에 모시지 않은 빈 집의 우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 십니다.

이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 누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 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누가복음 11 : 21 ~ 26)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추방하여 하나님 없이 세운 인류의 역사는 빈 집의 우환이 연속되는, 처음 형편 보다 나중 형편이 더 나빠져 가는 빈 집의 역사입니다. 전제주의 귀신이 들어와서 점령하고 있었던 것을 몰아내고 집 안을 소제하여 놓았더니 구라파에서는 나치의 일곱 귀신이, 동양 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일곱 귀신이 들어와 세계를 짓밟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만 쫓아내면 평안히 잘살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쫓아냈더니 이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독한 공산주의라는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와 오리려 전보다 더 무섭 게 세계를 짓밟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계의 집 속에서 공산주의만 추방해 버리면 집은 깨끗해지고 세계의 질서는 잡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하나님을 추방해 버린 이상 인류 역사의 빈 집 의 우환은 적그리스도의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와 계속될 것이며, 이것이 들어오면 공산주 의보다 더 무섭게 세계를 물고 찢고 짓밟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의 운명을 낙관적으로 보십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 님 없는 빈 집의 우환은 계속되어 말세에는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1974년도는 음산한 해입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시대는 이미 지나 갔습니다.

이제는 어둡고 추운 시대, 절약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면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불평 소리는 하늘로 치솟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때 극단주의자들이 나 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나 인권은 이들에게 짓밟혀 사라지게 되고,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독재자의 발 아래 밟히는 정황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지어낸 말 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빈 집의 나중 형편은 점점 나빠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공중에 재림 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는 빈 집의 역사는 어떻게 끝날까요?

이것은 바벨탑의 비극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사날 땅에 와서 바벨탑을 쌓을 때, 그들은 하나님 없는 인 본주의의 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들이 인간의 탑을 세우고 인류의 이름을 남기자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이 탑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세계 민족이 하나로 단합하여 언어를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해 보자고 외치지만 그렇게 되기엔 이미 너무나도 언어가 혼잡해져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언어가 불일치하고 각 나라마다, 정당마다 언어(의견)가 일치하지 않으며 개인과 개인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 연맹이 이 바벨탑 쌓기를 실패했고 현재 국제 연합도 유명무실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는 인간의 탑은 그 수고가 헛될 뿐 아니라 종국에는 바벨탑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

사람들이 집을 짓고 난 다음에 하는 일이 성을 쌓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집을 튼튼 히 지키기 위해서 이와 같이 경제적인 성, 사회적인 지위의 성, 환경의 성을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쓰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도록 주 날개 밑 에 거하지 아니하면 인간의 성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성이라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세계 제1차, 제2차 대전이 그러했고 중동전쟁이 이 말씀을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나라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라의 성을 결코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쌓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이 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여러 분 중에도 인생의 성 쌓기에 몇 번씩 실패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목회 경험을 통해서 보 니까 사람들은 인생의 성이 한두 번 무너진 후라야 교회에 나옵니다. 성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는 "야! 이것이 바로 성이구나. 이 정도면 염려 없다. 내게 신은 필요 없다."라고 큰소리 치다가 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면 그제야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성을 쌓아 놓아도 지킬 수가 없구나.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하고 손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성도 70년, 강건하면 80년을 기한을 무너져 내기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금세 뿐만 아니라 내세의 성도 지켜 주시는 분을 우리 생애의 집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애 속에 모셔들이면 주님께서는 금세의 성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늘나라 성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늘 나라 성의 아름다움을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은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찬탄하였습니다.

이 영원한 성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원토록 우리의 성을 지켜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을 소유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심

'세상의 집은 점점 썩어 허물어져 가고 세상에 쌓은 성은 무너져 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 서 잠을 자다니.'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잠은 그러한 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과 같이 염려와 근심과 고통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쳐 오는 때에도 마음의 평안과 휴식을 갖다 주며 상처와 모든 고통을 치료해 주는, 온갖 고통과 근심과 염려와 대한 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이러한 잠을 필요로 하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그 사랑하시는 자란 어떠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의 모습을 헌신적인 믿음의 소유자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백 세에 얻은 독자 를 장작에 얹어 불로 태워 재물로 드리라니요! 하나님도 참 무정하시지요? 여러분,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시험하실 때에도 이와 같이 무정하게 시험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 통과만 하면 여러분은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겐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 중심의 사람이 되든지, 여호와의 그 사랑하시는 자가 되든지 그 어느 한 편을 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봉착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저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명령대로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 : 3) 이런 경우엔 지체하면 할수록 인간의 육정과 애정이 끓어오르기 마련이고 인간의 감정에 얽매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감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 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떠났던 것입니다.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을 걸어야 하는 먼 길 이었습니다. 제물로 바쳐질 아들과 함께 이틀을 투숙하면서 사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은 순종과 믿음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는 당신께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실 때 사흘 길을 걸으면서도 변치 않는 그 완벽한 순종을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는 마음속에서 순종 하고 싶은 뜨거운 소원이 일어나서 즐겁게 순종하시지요?" 아닙니다. 여러분, 순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발자국마다 눈물의 몸부림이요, 마음속에서 반대하는 것과 끌어당기는 육신 의 소욕과 싸우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 입구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순종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가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종들에게 무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세기 22 : 5) 그는 다시 아들 이삭과 함께 돌아올 것을 명백히 믿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세기 21 : 12)고 하셨고, 이삭을 낳기 전에도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 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세기 17 : 19)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의 감각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일을 준행 할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제지시키셨으며 예비하신 수양을 이삭 대신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이레', 예비하 신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비로소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여호와 이레'가 되시지 않습니다. 순종과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른 자에게만 여호와 이레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그 사랑하시는 자가 된 아브라함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그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가 될 때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을 편안히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1974년도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일생과 영혼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성을 지키고 보호하게 하시고, 나아가서 여호와께 서 여호와의 그 산에 예비하신 것을 순종과 믿음으로 평안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 는 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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