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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3장 1-6절 세례자 요한, 회개하라! - 송다니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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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3장 1-6 절
설교제목 : 세례자 요한, 회개하라!
설교자 : 송다니엘 목사님
 
본문: 마 3:1-6절 요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로마의 압제에 있던 당시의 모든 유대인에게 공통되는 가장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거의 500년간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한 로마의 지배는 하나님 백성에게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한 선지자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메시아가 곧 오신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유대인에게 더할 나위없이 반가운 사람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대가 온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그에게 왔다.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적 엘리트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평민들까지도 그에게 와서 머리를 굽힌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례 요한은 아직 옛 언약에 속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결하는 자이며, 동시에 옛 언약에서는 가장 큰 자였다(마 11:11). 세례자의 구속사적인 임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맞도록 준비시키는 일이며, 예수님이 은둔생활로부터 공적인 메시아적 삶으로 전환하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도 이 세례 요한과 같이 준비자이다. 목사도 천국의 입구에 서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오도록 준비시켜주는 자이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목사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 된다. 따라서 목사나 목사가 되려는 자는 세례 요한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또한 각자 내가 과연 천국에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본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그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처음부터 „그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가 광야에서 설교한 내용을 먼저 앞세운다. 그 때에라는 말은 특정한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장을 도입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는 눅 1:80에 따르면 광야에서 살았다. 아마도 독거하며 은둔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열어주는 가장 중요한 사명을 받았으므로, 보통 사람들의 삶과 비교해 볼 때에 그의 삶이 좀 특이했을 것이다. 4절을 보면 그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가 그는 약 30세가 되어 드디어 은둔생활로부터 나왔다.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준비한 것을 모두 펼치는 사명의 때가 온 것이다.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은 세례자가  사 40:3-4를 성취하는 설교자, 혹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치는 자로 소개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그가 등장한 장소는 „유대 광야“라고 한다. 성경 여러 곳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곳은 요단 강 아래 지역으로서, 아마도 예루살렘 여울(얕은 시내)이 동편 요단으로 흐르는 곳에 가까운 장소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일 것이다(참조: 요 1:28; 3:22-23; 4:1 이하). 그러므로 이곳은 적막한 곳이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와 가깝기 때문에 요한의 사역지로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곳은 동쪽으로부터 나와서 요단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작은 샘 시내들이 있는 곳인데, 6개의 셈 중에서 5개는 일 년 내내 흐르고 있었다.  

„광야“라는 말은 독자에게 어떤 특별한 기억을 일깨운다. 호 2: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또 한 번 광야로 이끄신다(참고: 렘 2:2-3; 호 13:5). 그 광야에서는 모세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기적이 다시 일어난다. 이사야 40장도 구원의 길이 광야를 통한다고 예언했다. 다윗은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 마카비 가는 승리를 거두었다(역자 주: 외경 마카비서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이 구원의 시대를 광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연관시켰다. 이마도 이러한 이유로 에센파나 은둔자들이 광야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행 22:38의 거짓 메시아도 아마도 같은 이유로 4000명의 폭도를 광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세례자도 바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또한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그런데, 요단 강 아랫부분에 맞닿은 유대 광야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하 2:6 이하에 따르면 바로 여기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 요한이 바로 이곳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그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그가 말 3:23에 약속된 엘리야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다시 온 엘리야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마 17:12). 우리는 이곳에서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놀랍게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마 5:18).  

마태는 단 한 문장으로 요한의 설교를 요약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라(방향을 바꾸어라)“는 이스라엘이 정도를 벗어났을 때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였다.

렘 36:7: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나리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여움과 분이 크니라  

이것으로 우리는 다시금 구약이 신약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방향을 바꾸어라“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님께 돌리고 죄의 길을 떠나라!“는 의미이다. 즉 율법을 떠난 자신을 돌려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확고한 언약이다. 율법을 깨는 사람은 하나님과 엄숙하게 맺은 언약을 깨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요한이 다른 새로운 이유를 들고 있다: 그들이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좀 다른 perspective를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회개는 하나님과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표와 같은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결과는 같지만 perspective가 다르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이 이제 가까워졌다. 인류가 아담 때부터 기다리던,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근 500년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온다. 그런데 이것이 왜 우리들의 방향전환, 회개를 요구하는가? 왜냐하면 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적이 되어 하나님의 지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면전에서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이유로, 악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질 수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러면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며, 둘째로 거룩하지 않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인정해주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simul iustus et peccator(인간은 „의인이자 죄인이다“)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실제로 죄로부터 정결케 하신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피로 정결케 된 사람만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본질적으로는 또한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다.  

우리는 모두 새 언약의 입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입구에서 열심히 회개를 외치는 자가 세례 요한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회개해야 하는가? 그들은 당연히 하늘나라 백성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관계가 없다.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번도 회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회심하라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요구를 단지 종교적 행위로 이해할 뿐이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심판의 무서움을 인식하며, 두려움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 „내가 어찌하면 구원받겠습니까?“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자신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하게 될 수 없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사탄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죄인의 마음을 다시 차지하시려고 한다. 즉, 우리의 마음에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주인도 바뀌고 우리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는 약속이 새 언약이다. 세례 요한은 이 새 언약의 입구에서 열심히 사람을 초대하고 있다. 이 초대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도 이 새 언약에 들어가야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온전히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도록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는 세례자의 특징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그것은 마태가 세례자를 사 40:3의 인물과 비교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적 의상과 음식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 1:23에 따르면, 세례자 자신이 사 40:3에서 말한 선지자라고 했다. 그곳에서 예언된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는 40:3의 말씀대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고 외치는 회개의 요구를 통해 그는 주님의 길의 예비자가 되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다시 올 엘리야라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도 하나 있다. 4절의 „허리의 가죽 띠“는 왕하 1:8에 묘사된 엘리야의 옷을 연상시킨다. 원래 동방에서 혁대는 아름답게 장식된다. 그러나 가죽 띠는 선지자의 소박함을 표현한다. „약대 털옷“도 마찬가지이다. 털로 만든 옷은 참회자와 가난한 자의 옷이다. 낙타 털은 특별히 질기므로 오래 보존된다(슥 13:4). 그의 음식도 돈으로 사야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즉, 그는 일반 사람들과 의식주 생활을 달리했다. „메뚜기“는 레 11:21-22에 따르면 허락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음식으로 구워먹기도 한다. „야생 꿀(석청)“은 요단 강변에 특별히 풍성했다고 한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한 묘사는, 그가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그를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존했음을 나타낸다. 왕상 17:3에 따르면 엘리야도 요한이 있었던 곳과 멀지 않은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살았는데, 이점에서도 요한은 엘리야와 닮은 점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사역자가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사역자는 굶는 것과 갖은 고생에도 익숙해야 한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세례 요한도 자주 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핍절이 그가 오직 한 가지의 사명, 즉 메시아의 준비자로서의 사명에 집중하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눅 7:33에 따르면, 세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음식물로 취하지 않았다. 성경 전체는 소박한 삶을 가르치고 있고, 화려함과 지나친 포식을 죄로 보고 있다. 문화에서 오는 사치에 대해 성경은 경고를 보낸다. 그리고 인색함은 더욱 큰 죄이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세례자가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 갔다.“ 마태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요단 강 사방“(전체 요단 강 지역)이라는 말은 행정적, 정치적 용어이다.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 강 사방“(행 1:8)이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잘 알려졌는지를 말해준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는 문을 닫고, 요한에게는 문을 열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이것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왜 메시아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정작 애타게 기다라던 메시아는 멀리했을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맞는 맞춤형 메시아를 기다리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것은,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탈무드에서 제일 오래된 기록과 그 당시의 다른 유대인 문헌은, 사람들이 얼마나 애타게 메시아를 기다렸는지를 증거한다. 바리새인과 에센파, 열심당원들, 혹은 시골의 단순한 사람들도 모두 메시아를 대망했다. 그러나 무서운 현실을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메시아를 만나면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다. 

그들은 세례자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11절에 따르면,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즉 성령님이 임하시는 세례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준비시키는 세례이다(참고: 행 19:1 이하). 지금 여기에서 세례를 받는 자는 그것으로써 죄를 떠나려는 결심을 알리는 것이다. 죄 고백은 세례에 앞선다. „요단 강에서“의 세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아만 장군은 „깨끗해지기 위해“(왕하 5:10,14) 요단 강에서 일곱 번이나 몸을 씻어야 했다. 흐르는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을 씻는 것이 아니다. 세례자에 의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백성에게 정결한 물을 뿌리신다고 말하며, 회개 시편은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죄로부터 최종적인 정결함, 구속받음은 단지 예수님의 피로써만 가능하다(참조: 행 22:16; 고전 1:30; 6:11; 히 10:22; 계 1:5; 7:14). 그러므로 우리가 구속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한다.  

세례자 요한이 행한 것 중에 어떤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교육을 통해 미리 준비시키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죄 고백은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참조: 출 32:30 이하; 레 4-5장; 단 9:4 이하; 시 32:51). 제사장은 거룩한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했다(출 29,4; 30:17 이하; 40:31-32; 레 8:6; 16:4). 이방인이 참회하고 유대인이 되고자 할 때에는 침례를 받아야 했다. 에센파 사람들이 정결 목욕을 하루에 몇 번씩 하는 것은 잘 알려졌다. 그럼에도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이스라엘 전체가 정결케 되기 위해 요단 강가에서 받는 세례는 벌써 새로운 약속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수종자의 자격으로 하나님 나라의 입구에 서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을 준비시켰다. 그들에게 분명한 회개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여보내는 전권은 없었다. 이것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의 훌륭한 점은 자기가 맡은 일만 한 것이다. 준비자는 준비만 시킬 뿐이다. 그는 사람을 회개시킬 수도 없고, 회개한 사람을 천국에 들여보낼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많은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티켓을 팔고 있다. 교회에 가면 구원받는다! 우리 교회에 오면 구원받는다! 혹은 ...를 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한다. 그들은 „당신들은 구원받았습니다“, 혹은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할 권리가 없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는 길이다.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하는 일이다. 회개란 마음을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그 결과로서 전 인생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준비자란 성도들이 이렇게 실천하여 영생을 얻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삶이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의 삶이 메시아에 집중되고 그분만 전해야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모세나 세례 요한과 같이 오랜 기간을 광야에서 훈련을 겪는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목회자가 영광을 받는 오늘날 현실에서, 세례 요한과 같이 광야와 같은 환경에서 살면서 회개를 외치는 목사가 나타난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도는 이러한 준비자의 삶을 본받아서 메시아가 그들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만이 오늘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영생의 길이다. 회심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은 회개가 기본적 삶의 mode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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