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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3장 1-12절 주의 길을 예비하라 - 김영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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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3장 1-12절
설교제목 : 주의 길을 예비하라
설교자 : 김영하 목사님


크리스마스 때면 등장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 농부가 겨울철에 사냥을 갔습니다. 산 비탈길을 지나가는데 젊은 소년이 다 죽어갑니다. 그래서 소년을 데려다가 자신의 집에서 정성껏 간호하여 되살아났습니다. 그때 임금님의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방이 전국에 붙었습니다. 소년은 바로 왕자였습니다. 임금님은 농부에게 보상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이때 주위 많은 사람들은 “높은 벼슬을 달라고 하여라. 땅을 달라고 하여라.” 하였지만 농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왕자님을 일 년에 일주일씩만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임금님은 너무나 쉬운 부탁을 하였기에 농부를 기특하게 여기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팔자 고칠 기회가 왔는데 놓쳤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제 왕자가 농부 집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 임금은 왕자가 일주일간 머물 동안 불편하지 않게 농부의 집을 개축하고 길도 닦고 음식물도 풍성하게 장만해 주었습니다. 농부는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자신의 주위 환경이 청남대(대통령의 별장)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농부의 지혜로움에 찬탄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허물어져가는 농부의 집과 같습니다. 길도 울퉁불퉁합니다. 먹을 것도 시원찮습니다. 집은 낡았습니다. 욕심과 이기심과 원망과 질투 그리고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은 광야와 같고 닦이지 않는 길과 같습니다. 몸도 점점 쇠약해져가고 생각도 굳어져갑니다. 우리의 낡은 집을 새집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삶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과 영원사이의 괴리 때문에 우리에게는 늘 불안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영원은 생각을 하지 말자. 영원이란 우리에게 의미는 없는 것이다. 유한한 삶에 우리의 긍극적인 가치를 두자. 이 유한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물질이 최고다. 쾌락이 최고다. 권력을 누려야 부와 쾌락을 누리고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이기심과 탐심으로 인생을 얼룩지게 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고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오는 내면의 소리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술 마약 도박 쾌락의 방법을 선택하면서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한 실존을 깨닫고 영원한 존재와 접목을 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이 탄생한 확실한 그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어느 한 날을 정하여 주님의 탄생을 전 인류가 축하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이 성탄절을 어떠한 마음으로 맞이할 것인지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15절부터 여인의 후손으로 와서 죽이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언하여 주셨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모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내용을 말합니다.

1절: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먼저 광야라는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왜 하필이면 광야라고 했을까? 광야의 특성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짐승이 우글거립니다. 살벌합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400년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광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유대인들은 광야처럼 삭막해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현대인들은 광야와 같이 그 마음들이 황폐하여졌습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장님이 되었으니 누가 진정한 하나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전 2:14절에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으로 장님이 되었으니 답답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니 그 삶은 혼돈입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돈이 최고 같고 어떤 때는 쾌락이 최고 같고 어떤 때는 권력이 최고 같아서 이리저리 헤맵니다. 이것이 인생 광야에서 사는 현대인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엡2:1-2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의 흐름에 역류하여 올라갑니다. 현대문명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람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신성시하여 세워진 가정을 파괴하고 이혼과 바람피우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을 합리화 시킵니다. 정통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Postmodernism이 현 사회를 지배합니다. 물질이 자신들의 신이 되어 물질의 노예로 쾌락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대한 세상문화의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는 죽어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바로 광야 같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락한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만이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끼리 원수가 되어도 불편한데 하나님과 원수로 사니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인생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현대 사회는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현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한국은 매일 데모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국가의 장래나 남의 행복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녀들은 말씀이 심중에 없으니 엄지 족이 되어 게임과 핸드폰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수련회 기간 중 핸드폰을 학생들한테서 빼앗았더니 무기력, 졸림, 의욕상실, 주의산만 등 금단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이기심 욕심 미움 시기 질투만 가득하여 불안이 지배합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찾는 것이 바로 게임이요 술 마약 성적 도착증 각종쾌락입니다. 이곳에 인생을 던져서 탁류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틈새에 나타난 것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신앙과 사두개인 같은 자유주의 신앙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공적과 잘못을 바라보게 하는 율법주의 신앙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복음주의 신앙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주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주의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게 된다, 자신들만이 잘 믿고 있다.”고 말하는 독선주의자들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킨 것만 바라보면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자신이 법을 잘 지키지 못하였다고 자신은 죄책감에 벗어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이 거룩하다고 자신이 모범생이라고 거룩한 체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합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단한 열심을 냅니다. 롬 10:2절에They are zealous for God but their zeal is not based on knowledge.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을 위함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합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얼마나 혹독하게 책망합니까?

부활을 믿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서 모든 특권을 누리며 기득권을 가지고 천국은 안중에도 없는 자유주의 신앙이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들 속에는 더 거친 광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나라의 사회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니 인간이 사는 곳은 언제나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위선자들을 양산하고 은사주의는 이기적인 신앙인들을 많이 생산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였기에 양적 팽창을 가져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그들은 열심히 지킵니다. 죄책감을 무마하기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은사주의는 이 땅에서 잘된다고 하는 약속을 남발하여 악성 이기주의 신앙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설교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려고 세례요한한테로 나옵니다. 이때 형식적으로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형식적으로 나오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열매란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신앙이란 올바른 인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자신이 의를 가지고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자신이 거룩하게 되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율법은 하나를 어겨도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모든 몸의 기관이 망가져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한 부분에 이상이 오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율법을 다 지켰어도 그 중 하나라도 안 지키면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의 모든 법을 어겨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어느 법 하나를 어겼더니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간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법을 지킴으로서 거룩하게 된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에 무섭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관심은 영적인 관심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에 이익이 되기에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요한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도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익을 얻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 내 아들 딸 수능 점수가 많이 나오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한국 엄마들은 수능시험을 보는 날 자녀가 시험 치는 동안 같이 기도하고 쉬는 시간에 같이 쉬고 온 종일 같이 움직입니다. 이러한 열렬파 엄마들을 예수님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하늘에서 웃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점수 좀 잘 나와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높은 점수 좋은 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얼마나 사람답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벌이 꽃을 찾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은 꽃이 벌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서 결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높은 언덕을 낮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높은 언덕이란 교만해진 죄인의 마음을 말합니다. 굽어진 길을 곧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굽어진 길을 곧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어두운 내 마음을 밝히시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요 소망입니다. 예수로 인해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에게는 참된 기쁨이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고귀한 소망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데에서 옵니다. 이 믿음과 소망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왔으니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여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포장하기는 쉽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포장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랑 없는 경건은 위선입니다. 사랑 없는 헌금은 하나님과 거래입니다. 사랑 없는 봉사는 자기도취입니다. 사랑 없는 찬양은 자신의 감정표현일 뿐입니다. 사랑이 우리 크리스천들 삶의 모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은 사랑의 고속도로를 우리 속에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 혼자서 광야에서 쓸쓸하게 초림의 예수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구상의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 재림의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을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에 따라서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심판의 기준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높은 산이 낮아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의 마음은 굽은 길이나 울퉁불퉁한 길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상처받고 마음이 꼬이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지배하는 마음이 바로 됩니다. 이 세상이 왜 광야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요한일서 4장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동토와 같이 얼어붙어서 나밖에 모르고 이기주의가 판치는 대한민국, 만주벌판의 추위보다 더 얼어붙은 우리의 형제 이북 땅을 사랑의 불로 녹여야합니다.

밖은 매우 추워도 난로가 있어 교회 안이 따뜻하듯 우리 각자 사랑의 난로가 되어 꽁꽁 얼어붙은 이 사회를 사랑의 불로 녹여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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