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3장 1-17절
설교제목 : 세례 요한과 예수님
설교자 : 차용철 목사님
<序言>
마태복음에서는 4:12부터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3:1~4:11까지는 은밀하게 오셨던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행하시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3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언과 하늘의 증언으로, 4장에서는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이시므로 메시야직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레 요한의 사역은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동일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막1:1-8, 눅3:1-18, 요1:15). 누가복음에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배경이 잘 보고되어 있으나 (눅1:5-25, 39:45, 57:80) 마태는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생각하고 그런 부분을 제외한 채 극적인 부분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1장의 내용 구조는 세례 요한의 출현 (1-4절),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 (5-10절),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 (11-12절),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13-1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세례 요한의 출현 (1-4절)
세례요한의 출현은 예수님이 3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 앞에 '세례'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당시 '요한'이라는 이름이 많아서 그들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당시 요한의 사역을 특징 짓는 '세례'라는 직능적 표현을 이름 앞에 붙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눅1장). 잉태되었을 때부터 나실인으로 성별되었고(눅1:11-20, 민6:2-3),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깊은 사색과 은거 생활을 했습니다 (눅1: 80). 그는 유대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생활 했습니다 (4절). 약대(낙타) 털옷은 약대 가죽이 아니라 약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습니다. 가죽 띠는 그 부푼 옷의 허리춤을 단단히 매기 위한 허리띠입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4절). 메뚜기는 몸집이 큰 메뚜기로서 식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석청(石淸)은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입니다. 그러한 의복과 음식은 광야에 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기도 하지만 은거생활을 하는 선지자들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2절). 마태는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 곧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3절). 이사야40:2-4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 잡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외치는 자들에게 '너희는 광야와 사막에서 산과 골짜기를 평탄케 하여 대로를 준비하라'고 말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씀은 유대백성들이 바벨론 귀환을 확신하여 위로받게 하는 목적에서 한 말씀입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그 말씀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2절). '회개'는 전적으로 죄를 떠나 참회하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天國)은 '하늘나라'(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입니다. 이 표현은 마태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하면 마가와 누가가 사용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입니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렸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출20:7).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왕국을 말합니다. 영역적인 왕국이 아니라 역동적인 왕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백성을 죄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예표하는 바가 실현될 것을 말합니다.
2.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 (5-10절)
세례 요한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메세지를 선포했고 죄를 자복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각처에서 사람들이 요단가에 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5-6절). '세례'(βαπτιζω)는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죄가 씻겨졌다는 상징 의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와 사역은 400여년 동안 선지자없이 지내온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베푸는 곳에 왔습니다 (7절). 유대교의 대표적 종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였습니다. '바리새'는 히브리어 '파라쉬'(성별된 자)에서 온 이름입니다. 바리새인(φαρισαιων)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율법 부흥 운동을 일으키면서 일어난 자들로서 율법과 구전된 조상들의 전통을 엄격히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법의 내면적 정신과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율법의 의식과 형식만 중요시 하므로 외식주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사두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사독이란 인물에서 따온 이름인 듯 합니다 (왕상1:38). 사두개인(σαδδουκαιων)은 제사장급의 고위층으로 이루어져 정차와 경제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가진 자들로서 모세오경 외의 모든 전승과 천사와 부활과 내세와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주는 오류를 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전통과 이성이라는 오류를 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조심해야 할 오류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현장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모여든 것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책망을 볼 때 세례를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구경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7-10절). 예수님도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23:33).
"독사의 자식들아"는 표현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꾀어 범죄케 한 뱀을 연상하고 '사단에게 도구로 사용된 저주받은 뱀의 후예'라는 의미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하지만 세례 요한이 볼 때는 사단에게 이용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창3:14-15).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제외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만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레 요한은 그들에게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만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의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 되었다고 생각하여 하찮은 돌처럼 취급하는 이방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인 바른 행위를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농부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를 찍어 불에 던지기 위해 도끼를 나무 뿌리에 댄 것처럼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릴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세지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메세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제시한 것 말씀이지만 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통적 선민이라고 해도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2:28-29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8:39-40에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려면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도 전통과 신학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교단적 배경과 신학적 배경과 신앙적 배경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3.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 (11-12절)
마태복음11:1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면에서 그렇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깨닫고 증거한 면은 당대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면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만를 증거하는 일에 몰두하는 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면이었습니다 (요3:26-30).
①하나님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11절, 막1:7, 요1:27).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의 성격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이 베푸는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주는 세례를 회개를 한 자에게 죄 씻음을 받았다는 상징 의식으로 주는 물세례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물세례의 죄 씻음은 일시적인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과 다른 천래적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과 '불'은 같은 의미의 다른 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성령으로 죄 씻음을 주는 불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불세례의 죄 씻음은 영원한 효력을 가지는 죄 씻음입니다. 이 세례를 가능케 하는 분은 구약에서 오시리라고 예언한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30에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 대해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을 가진 종들이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녔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그런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물리적으로 자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도적적 혹은 영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이 종 노릇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분이었습니다 (미5:2, 요1:1, 마1:23).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선지자나 성인(聖人)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때에 영원 자존자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증거하는 것은 훌륭한 증거입니다.
②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요1:29).
마태복음에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1:29에는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했습니다. 어린 양은 구약 시대에 드린 제물로서 속죄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제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피 흘려 죽으므로 죄 사함을 주시고 죄의 결과로 오는 모든 심판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9:11-12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히9:23-26).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한 것은 예수님이 구속주(救贖主)로 오신 것을 인식하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1:21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서 구월할 자라'는 뜻이라는 말씀대로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속주인 것을 안 것입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그 형벌 가운데 놓였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그 죄값을 지불하고 죄와 그 형벌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안 것입니다 (롬6:23, 롬5:12, 벧전2:21-24, 사53:5-7).
③심판하러 보신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12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12절). '키'는 바람을 이용해 곡식의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는 일종의 소쿠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그를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3:16-18). 뿐만 아니라 그가 마지막 날에 재림하여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되 믿는 자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게 할 자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심판주(審判主)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주인 것을 여러 비유들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마지막 때에 다시 오셔서 선악간에 심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재림을 기롱하지만 주님은 약속한대로 반드시 다시 오시며 그 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벧후3:3-5). 그러므로 주의 재림과 심판을 인정하고 인생을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과 말씀과 성령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이미 심판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13-17절)
①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3-15절).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 사역을 할 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습니다 (13절). 마가복음1:9에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텐데 예수님이 자기에게 받으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보다 먼저 있던 자이고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인 줄 알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인 줄 알고 있는데 그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니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을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제 하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제서야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14-15절).
예수님이 굳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한 것은 개인적으로 죄 의식을 느껴서 죄 씻음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율법적 전승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구약 율법에는 할례가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의미상 그에 대한 전승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고 그 요구를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 전승을 존중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율법적 의식을 통해 일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것도 율법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민4:3).
둘째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고 죄를 자복한 자에게 죄 씻음의 상징으로 물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세례가 성령으로 죄 씻음 받아 거듭나게 하는 불 세례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 불 세례를 주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 세례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구속사적 표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6-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늘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시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성부와 성령이 성자에게 구속사역을 행할 자로 인준하는 장면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실 구속 사역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의 한 사건으로 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으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에게 물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양심과 명분만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위의 기준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행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의를 위해서라면 하기도 하고, 행해야 할 일을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라면 행하지 않기도 해야 합니다.
②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16-17절).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세례를 받는 방식이 침수세례였다고 생각하고 침례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수세례(侵水洗禮)였는지 적수세례(滴水洗禮)였는지 알기 힘듭니다. 침례만을 고집하는 것을 잘못입니다. 성경이 침례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영적 정화와 갱신이 물 뿌림으로 되어 진다는 표현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출29:16, 민8:7, 19:3, 18-20, 시51:7, 겔36:25, 히9:10,13). 그리고 원어 밥티조(βαπτιζω)는 '담그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시다' '씻다' '깨끗게 하다' '정결케 하다'는 의미들도 있습니다. 밥티조(βαπτιζω)를 예수님과 바울도 반드시 담근다는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눅11:37-38, 12:50, 고전10:1-2). 그리고 베드로가 오순절에 회심한 3,000명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나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나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나 바울이 감옥의 간수에게 세례를 준 사건도 침수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행2:41, 8:37-39, 9:17-19, 16:31-33).
세례의 방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의 방식은 전적으로 아디아포라 문제입니다. 모든 의식은 외적인 형식보다 그 내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므로 그 외적인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입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죄 씻음을 받은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성령의 임하심을 비둘기 형상으로 보이셨다는 말입니다 (눅3:22). 비둘기 형체는 성령께서 임하셨음을 나타내 보이는 표상 가운데 한 방법입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린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음성입니다.
이 상황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땅 위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음성을 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 세 위(位)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말합니다. 삼위(三位)는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불립니다. 각 인격적 특성에 의해 성부 하나님을 1위라 하고, 성자 예수님을 2위라고 하고, 성령 하나님을 3위라고 합니다. 그 순서는 권위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질서에 의한 순서입니다. 세 위(位)는 개별적으로 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위는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지 않습니다. 세 위는 전체인 하나를 이룹니다. 삼위일체의 증거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암시되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더욱 확실히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세 장면과 예수님의 고별강화와 예수님의 대명령과 사도의 축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눅3:21-22, 요14-16장, 마28:19, 고후13:13).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성자 예수님이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확인시키고 공생애 사역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존재론적으로 성자이신 것을 증명하는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선택받은 자임을 인준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정식으로 하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지시가 있었음을 공인하는 동시에 성령의 임함으로 그 직임을 받은 자임을 공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예수님의 사역과 성격이 다를지라도 원리는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이 확인되어야 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성령의 도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結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시려 할 때 세례 요한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사명을 알고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 그의 정신을 잘 알게 해 줍니다 (요3:30).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행한 행동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사용하신 방법인 율법적 규례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태어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정결례를 행하신 것이라든지 12세가 되어 어머니를 떠난 행동을 보이신 것이라든지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한 것이라든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존중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민4:3, 마3:13-15). 우리가 사역에서 덕을 세우는 일을 무시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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