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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3장 1-12절 회개의 실질 - 윤석준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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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3장 1-12절; 눅3장 1-17절
설교제목 : 회개의 실질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가 지난 주일에 세례 요한과 우리 주님의 첫 번째 메시지인 이 회개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해 본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할 때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인 죄를 깊이 묵상하고 나누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주제가 아닙니다. 이 유은교회 강단에서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고, 썩었고, 비참했는지, 그래서 우리에게 얼마나 회개가 필요한 것인지 여러 번에 걸쳐서 설교를 듣고 생각했고 또 거기에 따라 우리가 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주일과 똑같은 본문을 잡아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 메시지의 뒷부분에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초점을 기울여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회개’라는 주제는 넓고 광대한 주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과 매우 긴밀한 주제인데, 이 ‘회개’라는 주제를 단순히 “회개해야겠다!”라는 필요성만이 아닌! 우리가 실지로 회개를 하려고 할 때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 뒷부분에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잘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오늘 ‘회개의 실질’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주께서 이 설교 위에 복주시고 말씀을 통해 참된 가르침을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무리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말씀드린 본문 후반부의 타깃이 되는 사람들은 바로 7절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6절 말씀에 의하면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는데”(6절), 거기에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있었다...성경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베푸는 요한은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이란 단순한 욕이 아니라 ‘뱀의 후손’,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 창세기 3장 15절 말씀 이래로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적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탄의 하수인들을 가리키는 구약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욕은 없습니다. 우리는 쓰지 말아야 할 표현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종종 잘못된 방식으로 쓰이는 것으로 ‘마귀새끼’ 같은 표현이 있는데, 지금 말 그대로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마귀새끼’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비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 점 : 이들은 적대적 감정을 갖고 나아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적대적 감정을 갖고 나아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을 이어서 보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그리고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했다...”

본문의 내용만으로 보아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을 방해하러 왔거나 비방하러 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도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헤르만 리델보스같은 학자들은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고 쓰고 있고, 누가복음 3장의 이 말씀과의 병행본문에는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한 것이 아니고,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그곳으로 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 이상하지만은 않은 것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약 요한을 뛰어난 선지자로 이해했다면 회개를 먼저 앞장서서 실천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아마 회중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에게 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큰 선지자이신 요한 선생께서 세례를 베풀고 있으니 우리 얼른 가서 세례를 받읍시다.” 아마 이런 상황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누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나름은 선의를 가지고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고, 여기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가 무슨 말인지 잘 알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누가 가르쳤느냐,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할 것이라고”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이 거의 직역과 같지만 우리 말로 읽으면 “누가 피하라 하디?”, 그러니까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너희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요한의 말은 “너희는 심판 받아야만 하는 운명이다”라는 뜻입니다. 저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임박한 진노’란 무엇입니까?

‘임박한 진노’는 지난 주일의 설교를 주의 깊게 들으신 분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에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기 때문이죠. 임박한 것은 ‘천국’입니다. 즉 ‘임박한 진노’는 다른 말로 ‘임박한 천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천국이 가까웠다”...그리고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노가 가까웠다!”

어떻게 이 정반대처럼 보이는 두 말이 같은 말일 수 있는지는 성도들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언약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기계적으로 모두에게 다’ 복인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복이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화입니다. 지금 여기서 선포되고 있는 설교도, 믿음으로 아멘 하는 이에게는 복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똑같은 메시지가 심판과 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은 인류 전 역사에서 가장 큰 복이 오신 것이지만, 포도원의 종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자들에게는 아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언약은 양면적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할 때, 이 천국이 구약성경이 말씀하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은 모든 구약백성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은 다른 표현으로 무엇이라고도 불립니까? ‘진노의 날’, ‘보수의 날’, 아버지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심판을 쏟아 부으시는 날입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언약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축제의 날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두려움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말하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왜 “임박한 진노”라고 하였는지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방금 그 앞에서 그들을 부른 호칭과 일치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 천국은 그들에게 복의 날일 수 없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 즉 사탄의 하수인들에게는 그 날은 심판과 공포의 날, 여호와께서 진노와 보복을 쏟아 부으시는 날인 것입니다. 요한은 개인적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풀어 저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  

이제 우리는 회개에 대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나름대로는 회개를 위한 좋은 자세를 갖추고 요한을 찾아 왔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왜 요한은, 아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대가 아닌, 심판의 말씀을 주시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안기는 자들을 결코 거부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셔놓고 하나님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어쩌면 하나님은 칠만 번의 칠만 번이라도 용서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 역사는 그분의 용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용서도 받지 못할 만큼 큰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극악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길로부터 돌이키면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면 물어보십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분이신데도 불구하고....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하나님께 배척을 받았습니까?  

참 회개

대답은 너무도 간단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 이들을 아무리 큰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한다고 말했습니까? “어떠한 극악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길로부터 돌이키면....”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 길로부터 돌이킬 때....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큰 죄를 지어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 회개’에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박정하게 말했는지는 이 “독사의 자식들아...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뒤에 나오는 말씀들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8-9절)  

요한이 그들에게 심판의 선언을 한 이유는 8절 말씀에 의하면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9절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복음서 전반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일반적인 언급들을 생각해 보면 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했는지가 어렴풋하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전반적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주의적 전통에 얽매여 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외적 경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실상은 ‘거짓된 경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거짓된 경건이라는 것은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것에서 나오는 그릇된 태도였습니다. ‘선민의식!’ 즉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이들과는 달리 특별한 존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회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회개가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는 금식을 며칠을 하고, 기도원을 몇 날을 다니는 외형적인 점에 있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아이들에게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예배 시간에도 질문을 했었지요? 교리문답 33주일의 내용을 기억해 보십시오.
 

        88문 :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89문 :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회개란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1)슬퍼하고, 2)미워하고, 3)피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의식으로 꽉 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천국 잔치에 가면 자신이 남들보다 상석에 앉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찬 이들이, 나는 이레에 한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날마다 기도한다는 것 때문에 자부심으로 가득찬 이들이....진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겠습니까? 나를 돌아보고, 나의 죄로 말미암아 비참케 된 상황에 미워하고 피하겠습니까?

이들의 궁극적인 문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회개’를 장식품 정도로 여겼음에 분명합니다. “자! 여러분! 우리 회개합시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보아주십니다! 자 저기 세리 양반! 어이 저기 지나가는 행인 양반! 회개합시다. 얼른 이리 오시오 얼른!”....회개를 독려하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을는지 몰라도....그들 가운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진노케 한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그 죄에 대한 미움과, 그 죄를 진정으로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의 모습입니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평양 대부흥 운동’을 기념하는 흐름이 한국기독교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의 주도는 대부분 큰 교회들과 큰 기관들의 연합체들이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평양 대부흥 운동이 회개와 각성을 통한 성령의 부으심이다...해 갖고서는 비슷한 일들을 연출해 내고자 많은 애를 썼습니다. 사람들을 수만명씩 운집시켜 놓고 우리도 그때처럼 회개운동을 일으키자...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과연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과 같은 일이 100년이 지난 2007년에 한국교회 안에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은 몇 년 전에 이 일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까? 아마 제가 짐작키로는....거의 기억도 가물가물 할 것입니다. 왜인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런 여러 기도회나 회개 간증 집회와 연합회들이....스르르 다 저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100년 전에는 회개에 반응하셨는데, 100년 후에는 회개에 반응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회개에는 반응하시고, 어떤 회개에는 반응하시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런 대부분의 집회와 모임들이 ‘선동적 쇼’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간 사람들이 한 시간 두 시간은 분위기에 취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아니....진심으로 기도한 사람도 많았겠죠. 하지만 어떻습니까? 여기 지금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까? 교리문답이 말씀하고 있는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죄로부터 피했습니까?”

대부분의 선동적인 집회는, 거기에 보이는 것에서 끝납니다. 대규모 집회에서 눈물을 흘리고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침울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가 그만큼 많다고 고백해놓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컷 속풀이를 했으니 후련한 기분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삽니다. 이것이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자세입니까?

수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기도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골방에서 참회하는 것을 대체하고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줍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서는 국회에 들어가서, 청와대에 들어가서, 관공서에 들어가서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비리와 착복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공식적인 기도회 같은 것이 있으면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회개합니다. 그리고는 또 그 문을 나서면 비리와 착복을 계속합니다.

교계 지도자들과 정계 지도자들만의 일입니까? 일개 개개인들은 그러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후련해진 기분으로 또 다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회개’를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터이니 계속 죄를 지으면서 회개만 일삼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회개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고, 회개를 독려하고, 또 자신들도 경건으로 위장했습니다만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통회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천국은 너희에게는 진노의 날이 될 것이다! 들으라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우리는 이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꾸라져야 합니다. 거짓 회개를 버리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거짓 자세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죄와 믿음 사이에서 줄다리기하지 마십시오. 참 회개를 가지십시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사두개인들의 교만을 깨부시는 말씀이 9절의 말미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회개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로마서도 말씀하듯이,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말씀하셨듯이,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맡은 특권’이 있었고, 그들에게만 ‘참 예배’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특권이 ‘그들이 잘나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된 것은 ‘나의 건전함’이 원인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나의 신실함’이 원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이 된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만한 이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어떠함을 자랑했습니다. 회개도, 믿음도, 하나님의 백성됨도....모두! 우리가 교리문답 5주일 설교에서 들었듯이, ‘그분의 의’ 때문에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 생각에 저주받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바로 그들로 태어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나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무엇 하나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교만’합니다. 내가 마치 하나님의 백성이 될 만해서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물론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죽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이런 자만심이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이 썩어빠진 한국교회의 말도 안 되는 신앙을 가진 이들보다는 월등히 신앙이 좋잖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여라도 만에 하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자신이 지옥의 귀퉁이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 신자의 최대의 적은 교만이요, 그 교만중 가장 무섭고 극악한 것은 “내가 신앙이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교리문답 33주일의 내용에서 들은 것처럼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슬퍼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만이라니요! 있을 수 없습니다.  

심판을 두려워하라  

그러므로 참 신자는 항상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물론 참 신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없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라고 예정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학급에서 도둑질을 하여 선생님께 회초리를 맞는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 내가 저 매를 맞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그 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면 그 학생은 좋은 학생이 아닙니다. 나는 비록 그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벌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좋은 학생은 그 매맞는 아이를 보고 자신에게 좋은 경계로 삼는 학생입니다.

신자들에게 심판의 역할이 그런 것입니다. 신자는 심판대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편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시2:11)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참된 자세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그러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0절의 ‘열매’는 8절의 ‘열매’를 받는 말입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했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 찍혀지는 나무의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찍혀 불에 던지울 운명이 아니니,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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