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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6-18절 슬픔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구원의 서곡 - 윤석준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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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6-18절
설교제목 : 슬픔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구원의 서곡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서 론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분인 클라스 스킬더 박사님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난의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쓰고 있는 책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6장에 대한 강해에서 그는 시작을 “우리는 슬픔의 사람, 우리 신앙고백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공부하려고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곧 이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을 것을 말씀하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막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킬더 박사는 베드로의 이 말이 “고난 강단을 향해 나아가심으로써 구속을 완성하려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으로 가로막은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즉 베드로의 이 가로막음은 겉으로는 주님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속을 이루셔야 할 예수님을 꾀기 위한 사탄의 책략이었던 것입니다.

스킬더는 여기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가 된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사탄적인 발언은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찢어 놓았을 것입니다...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분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순전히 영적인 존재인 사탄과 마주치는 것보다 피와 살을 가진 사탄과 마주치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을 ‘벗’이라고 부르셨는데, 바로 남이 아닌 벗이 하나님께서 인자에게 맡기신 일을 반대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에 의해 미움을 받는 것보다, 또는 지옥의 마귀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보다 천 배나 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신부가 사탄의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대신 주려고 하는 한 인간의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1)

우리는 네 개의 복음서들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주님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어는 ‘슬픔’입니다. 실로 스킬더 박사님의 말처럼 우리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를 통해 들은 것처럼, 주님은 박해 가운데서 나셨고, 인생의 죄의 종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 분의 공생애 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그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여 죽으심으로써...오히려 그 환영은 더 무거운 슬픔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셨고, 자신이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온 바로 그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실로 주님의 삶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슬픔’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로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유아학살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 “슬픔의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면모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헤롯의 살해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16절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신 때를 전후로 하여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서 두 살 이하의 모든 아이들이 살육을 당했습니다.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일에 눈이 멀었는지, 마크로비우스라는 사람의 글에 의하면 그는 혹여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일까 하여 자기의 아들도 살해했다고 합니다.2)

예수님은 여기에서 죽지 않으셨으니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 때문에 동족의 모든 아기들이 학살당하는 참상 속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괜찮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심 자체가 피의 살육의 자리였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그 나심에서부터 “슬픔의 사람”이셨던 것입니다.

라헬의 애곡

마태복음의 오늘 본문에서는 이 유아학살 사건을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유아들이 학살당했고,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실제 예레미야 31장을 살펴보면 마태복음 말씀의 인용과 똑같이 라마에서 통곡이 들렸으며, 이것은 라헬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애통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라마의 통곡, 라헬의 애곡.....이것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라헬은 야곱의 부인 중 한 사람으로 요셉과 베냐민을 낳은 사람입니다. 왜 성경은 예수님 시대의 유아학살을 먼 과거의 일인 ‘라헬의 애곡’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이 사건은 어떤 점에서 예수님 시대의 유아학살과 관련된 것일까요?

라헬의 애곡

이 부분에서 라헬이 애곡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유는 라헬이 요셉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라헬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된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들 중에 요셉과 베냐민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나중에 나누어져 두 지파가 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되죠. 이렇게 됨으로써 레위지파가 계수에 들지 않아 빠지게 되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다시 열 두 지파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고 난 후에 북이스라엘을 부를 때 “에브라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혈통상 에브라임이 장자인 것은 아니지만, 역대상 5장 1-2절 말씀을 보면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3) 요셉의 장자는 실제로는 므낫세였으나, 야곱은 임종 직전 손을 어긋맞겨 축복함으로써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장자의 권한은 에브라임이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후의 성경들에 보면 북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자주 “에브라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31장에서도 보면 18절이나 20절에서 북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애곡하는 것은 아들 에브라임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이 에브라임이고, 이 에브라임의 어머니가 라헬이기 때문에, 라헬은 사실 북이스라엘의 어머니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슬픔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어쨌건 라헬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북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은 애곡하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말씀을 잘 읽어보면, 이 31장을 둘러싸고 있는 정황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상황”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라헬이 애곡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들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수많은 라헬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또 다른 수많은 라헬의 아들들이 포로로 끌려 이방 땅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4) 나라는 망하였고, 라헬의 아들들은 모두 적국의 포로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1장 1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왜 이스라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였습니까? 왜 이스라엘은 멸망당하였고, 어머니 라헬은 자식들을 위해 애곡하는 것입니까? 열왕기하 17장 말씀에 보면 객관적인 역사를 기록하던 중에 느닷없이 길게 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일은(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같이 하여....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이스라엘의 멸망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라헬의 곡성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절하고 이방 신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왕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치셨고, 이들은 모두 궤멸당하였으며, 결국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 뱀과의 마지막 전투

마태복음이 예레미야를 인용하고 있는 이유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보시기에 바로 이 사실이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헤롯에 의해 이스라엘의 유아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장면과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라헬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애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애곡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시에 유아들의 학살에서 재현되었습니다.

둘의 공통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가 3장 15절 이후 이어지고 있는 “뱀과 여자의 후손과의 전쟁”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직후, 이 인간 자손에게서 여자의 후손이 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더 나타난 것이 있으니, 그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까지 끊임없이 뱀의 도발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증오할 것이고, 종국적인 여자의 후손이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여자의 후손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앞부분에서 애굽왕 바로를 통해서 현현하고 있는 뱀의 후손의 도발을 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려 시도한 자입니다. 그는 아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지워 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에서도 동일한 뱀의 후손의 시도를 봅니다. 뱀의 후손 하만은 아말렉 자손으로써 모르드개를 빌미로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모두를 없애버리려는 시도를 펼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국적인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장에서 마지막 뱀의 도발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 역사 전체에서 면면히 흘러내려오고 있는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향한 뱀의 끝없는 악의의 결정판을 발견합니다. 이 도발은 “뱀의 마지막 도발”입니다. 여기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호해 버리신다면, 뱀은 마지막 기회를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은 필사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다 죽여서라도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 때에 애곡한 “라헬의 울음”과 같은 것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을 궤멸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그 궤멸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땅을 빼앗기고 세계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포로”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뺏겨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라헬은 통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뱀의 모략이 성공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뱀의 모략에 휘말려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고, 이 절망의 상황에서 라헬은 애곡합니다.

마치......마태복음에서의 라헬의 애곡은 이와 같습니다. 마지막 절망의 순간에 모든 아이들이 다 죽어버립니다. 라헬은 통곡합니다. 칠백년 전의 그 통곡이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칠백년 전에 모든 여자의 후손이 다 학살당한 듯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듯이.....다시 여자의 모든 후손들인 유아들이 새 바로인 헤롯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스라엘의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입니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라헬은 그녀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자녀를 빼앗기고 혼자만 겨우 살아 남은 자로 묘사되었다. 마태는 이 자녀를 잃은 라헬 장면을 그의 독자들 앞에 제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베들레헴의 영아 학살의 의미를 밝혔던 것이다. 이 세상의 세력이 예레미야 당시 야곱의 자손들을 억압하였던 것처럼, 그 세력은 또 다시 에돔사람 헤롯을 통하여 야곱과 라헬의 자손들에 대항하여 그 머리를 들었던 것이다.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세상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나타났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여인들의 슬픔은 라헬의 슬픔의 성취였다.”5)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 뱀은 마지막 치명적 공격을 가하였고, 이 공격은 예레미야 당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은 애곡했고,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에 있었던 유아들의 어머니 역시 애곡했습니다. 뱀의 적개심은 승리한 듯이 보였고, 이스라엘은 다시 포로로 끌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듯이 보였습니다.


“슬픔의 사람”께서 여시는 구원의 서곡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 많은 예레미야의 구절들 중에 왜 하필 이 부분을 성취의 도구로 인용하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성경에는 뱀의 결정적 치명타에 관한 많은 구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구절을 사용한 것일까요? 왜 굳이 예레미야의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일까요?

그것은.....예레미야의 이 구절이 “포로회복의 구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로 넘겨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 슬픔에 취해 잠깐 잊어버린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이 “라헬의 애곡”이 인용된 예레미야 31장은 “새 언약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31장 앞부분의 말씀에서 조금 더 뒤로 눈을 돌려 31장의 뒷부분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예레미야서의 새 언약”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31:33-34)

우리가 라헬의 애곡에 취해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이지만, 예레미야 31장은 희망의 장입니다. 우리가 15절만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절망만 읽혔을 뿐이지만, 사실 15절은 16절을 말씀하기 위한 전제였습니다. 같이 16절을 읽어봅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절)

17절도 읽어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17절)


20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 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절)

21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1절)

예레미야 31장은 “포로 회복의 장”이며, 포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세우실 “새 언약의 장”입니다. 이들은 비록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시 돌아올 것이요,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것입니다. 라헬은 애곡하였으나 눈물을 닦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통곡하였으나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일, 그것도 바로 이러한 일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이 구절을 통해서 애곡하는 라헬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은 “포로로 잡혀감”을 말씀하기 위한 문맥이 아니라, “포로로부터 돌이키심”을 말씀하시기 위한 문맥입니다. 즉! 예레미야 31장은 여자의 후손들이 뱀의 적개심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림을 말씀하는 문맥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회복될 것이며,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꽃피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문맥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있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슬픔의 사람”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신 현장은 박해와 살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신 곳에는 축복과 번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뱀의 최후의 도발인 강력한 살해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쁨과 환영 속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어머니 라헬의 애곡 가운데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이 슬픔의 사람인 주님께서만 오직!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분께서 슬픔의 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라헬의 눈물 가운데서 태어나셨지만,

이 분이야말로 라헬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장본인이십니다.

성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이 뱀의 적개심으로부터 건져 우리를 “영원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실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슬픔의 사람께서 여시는 구원의 서곡”을 들어야 하며, 그 노래가 진실로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사람의 후계자들로서 우리는...

슬픔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들인 우리는 “슬픔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합시다. 이 슬픔의 사람께서 바로 우리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포로의 암울함, 살해당한 유아들로 인한 애곡들 사이에서 우리 주님의 구원이 꽃피기 시작합니다. 이 주님을 기억하고 찬양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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