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3-15절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 윤석준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반응형

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3-15절; 호세아 11장 1-4절
설교제목 :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12월에 성탄절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달 가량을 우리 주님의 나심과 관련한 말씀들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두 주일 정도만 성탄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올해에는 조금 더 늘려서 한 달 정도를 성탄과 관련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거의 1년 넘게 신명기 설교를 들어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오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보는 것도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계적으로 기간을 정해 얼마간 해야 한다....는 아닙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칼빈은 절기 때에도 절기에 해당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계속 연속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특히 인본주의적 절기가 많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절기를 일반 주일보다 더 강력하게 지키려는 유혹에 우리도 모르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절기의 모든 정신은 주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탄과 고난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은 모두 주일의 예배와 성찬에 포함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 예배를 통해 이것들을 잘 나타내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기를 미신적으로 다른 주일들보다 더 강하게 지키거나, 로마교회처럼 절기의 앞뒤로 기념일들을 정해서 관련된 설교들을 쭉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 성탄과 관련된 일련의 설교를 한 달 가량 하는 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심을 조금 더 잘 배우기 위한 실제적인 유익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심과 관련한 몇 편의 연속 설교들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오심의 의미들을 조금 더 잘 묵상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서 론 :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사건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사건인 것처럼 보입니다.

2장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고 헤롯의 궁전에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당도했고 동방박사들은 헤롯과 그의 신하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으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과 신하들은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인물이 이스라엘에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 싹을 애초에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 절을 보시면 헤롯이 무슨 일을 행했는지가 나타납니다.

      16절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오늘 말씀은 이러한 헤롯의 위협에 직면한 예수님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께 이러한 위협이 닥치기 전에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였고, 천사는 요셉에게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다시 언질이 있을 때까지 그곳에 있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요셉은 아기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을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생명에 위협을 느낀 한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피하여 도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두 가지 이유
하지만 이 본문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이야기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가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점이 왜 이 본문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행적은 늘 구원사역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겉으로 볼 때는 단지 한 가족이 왕 헤롯의 위험으로부터 도망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우리 주님에 대한 이야기인 이상, 이 이야기는 단순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이 본문 안에서 성경 말씀이 이 사건을 “단지 애굽에 다녀온 것”으로 다루고 있지 않고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 속에서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구원사역임을 알려 주는 것이 있겠고, 그것이 좀 불투명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불투명한 경우 우리는 “이 사건은 분명 구원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라고 크게 소리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아주 분명하게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인용되어서 “이 사건이 바로 이 구약 성경 말씀의 성취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약의 인용 때문에, 예수님의 가정이 애굽으로 내려간 일은 “절대로!” 단순한 한 가정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한 가족이 애굽에 간 것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호세아서에 나오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의 성취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애굽을 향해 가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신 것이 호세아서 말씀의 성취라면 호세아서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면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신 것의 이유가 자연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호세아서를 보도록 합시다.

오늘 말씀의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은 함께 읽은 호세아 11장의 인용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보면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마태복음이 인용한 말씀입니다.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러면 호세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마태복음은 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까? 호세아서의 문맥을 잘 읽어보면 이 부분은 명백히 ‘출애굽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호세아 11장은 하나님께서 과거를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 아들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었더니,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점점 더 멀리갔도다!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도다!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몰랐도다!......이 본문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여기에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킨,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바로 이 “출애굽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헤롯에게서 도망쳐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에서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묘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마태복음의 정황상,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음모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출애굽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단지 애굽으로 이사를 가셨을 뿐이고.....그 애굽에서 다시 나와서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오신다고 해도....그것을 왜 출애굽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만약에 마태복음이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셨던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전혀 출애굽 사건이랑 연결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가셨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사건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들을 중요한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자이신 예수님

첫째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호세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호세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애굽에서 불러낸 내 아들”이 예수님이 맞습니까? 호세아서의 ‘내 아들’이 예수님을 의미해야만,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간 예수님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에 부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호세아서에서의 “애굽에서 불리움을 당한 아들”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은 장래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애굽에서 불러내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불러내셨던 사실을 단지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호세아서의 말씀은 과거에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킨 사건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분명히 출애굽에서 ‘내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라고 할 때의 ‘내 아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애굽에 내려갔다 온 대상이 예수님이십니다. 분명 마태복음에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할 때의 내 아들은 예수님인 것이 분명합니다. 왜 성경기자는 ‘이스라엘’에게 대해 성경이 쓴 것을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입니까? 성경 기자가 실수한 것입니까? 말도 안 되는 본문을 갖다 붙인 것입니까?

만약 성경이 실수하지 않았다면, 성경이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이 분명하다면, 이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대단한 진실을 하나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다”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탈출한 것은 이스라엘이고, 호세아서가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라고 할 때의 ‘내 아들’은 이스라엘인데, 마태복음서가 그 ‘아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면.....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지금 예수님과 이스라엘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혼자 몸이셨지만, 자신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이스라엘 전체가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는 것과 같게 여기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아닙니다....이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잘 몰랐다 뿐이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한 사건이 종종 등장합니다.

1)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왜 세례를 받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죄씻음의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이것은 ‘동일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자기 자신은 죄가 없으시지만, 이스라엘과 같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같이 되셔서 죄씻음의 사역을 하실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왜 40일을 금식하시는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쓸데 없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공생애 첫 시작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왜 “40일을”, “광야에서”, “먹지 못한 채로” 지내셨습니까? 왜 “유혹 가운데” 계셨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던 것을 재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똑같이 광야생활을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했지만, 똑같은 몸을 입으신 인간 예수께서 그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건이 종종 등장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다는 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 속에 들어오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대표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마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들어오시는 사건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불리움을 받은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애굽에 내려가심으로써 바로 자신이 이스라엘이심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같이 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1 : 박해 가운데 태어나고 사신 우리 주 예수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한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신 것이 이스라엘과 똑같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본문에서 이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처럼, 우리처럼.....고난 가운데 태어나고 사셨음을 보여줍니다.

1. 예수님께서는 박해 속에 태어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박해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한 본체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왕위가 뺏길 것을 두려워하는 포악한 왕의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평화로운 고장에서 축복 가운데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 속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박해 가운데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죄의 질고를 진 우리를 그 분께서 친히 짊어지셨음을 보여줍니다. 범죄한 이후 인생들은 죽음의 고생 가운데 태어납니다. 우리는 사탄이 우리를 죽음의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 살고 죽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신 상황은 바로 우리의 이러한 인생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점을 이 탄생의 정황 속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서슬퍼런 죽음의 위협 안에 태어나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죽음의 칼날 아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2. 또한 예수님께서는 애굽에서 포로 생활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나사렛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집과 친척들이 다 거기에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애굽으로 가 타향살이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단순히 고향이 아니었을 뿐입니까?

성경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모세의 영광스러운 출애굽을 경험하기 전에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봅니다. 물론 이것은 영광스러운 출애굽을 위한 것입니다....그러나! 애굽으로 들어가시는 그 장면 자체는 죄의 종살이의 영향력 하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의 또 다른 면모입니다. 주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그 몸에 친히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방의 압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던 애굽의 이스라엘.....그것은 단지 오래 전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이었을 뿐 아니라, 죄의 짐을 진 우리 모두의 운명, 죄에 종살이하고 포로가 되어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애굽으로 가심으로서 자신의 몸에 이 사실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호세아서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와 같이” 된다는 것은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2천년 전 이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인 우리의 비참한 삶의 상황과 똑같이 되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의 대표자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탄이 다가올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사건에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하는 마태복음 2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려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 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대표자가 되셔서”, “우리가 진 비참을 같이 지시고”, “우리가 당한 죄의 공포를 함께 당하시고”, “우리가 겪었던 애굽의 종된 포로상황을 함께 지시는” 분이 되셨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성탄을 두고 기억해야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불리우심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이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야 말게 될 필연적인 결론까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들처럼, 박해 가운데 태어나, 종살이를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하지만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애굽에서 영원히 거주하시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애굽으로 가셔서 거기서 평생 사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가신 것은 “애굽으로 내 아들을 불렀다!”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호세아에서 인용한 말씀의 정확한 구절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애굽으로부터 불리워 내시는 목적 때문에 애굽에 내려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만, 십자가를 지고 죽어버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셨지만, 무덤에 묻혀 썩어 버리기 위해 묻히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지만, 죄를 지고 죽어버리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멸망당해 버리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신 일은 애굽으로부터 올라오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신 것은 이 죄를 극복하시고, 죄악과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한 탈출! 영원한 출애굽! 영원한 죄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주님은 애굽에서 불리우심을 받기 위해! 애굽에 내려가셨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도 기억해야 하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기억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론입니다!

정 리

12월이 되면 아무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하여 평소보다 좀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탄을 대하는 자세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성탄을 시끌벅적하고 요란하게 보내지 않습니다. 성탄을 빌미로 자신들의 기쁨을 채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으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서 우리를 친구라, 형제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분! 우리와 함께 죄의 질고를 지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또한 우리는 이 주님께서 승리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쟁취하여 우리에게 주신 분이심을 기억합시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심정을 표현하며 살아가려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께서 말씀에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