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12절
설교제목 : 황금 유향 몰약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몇 안 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동방박사입니다. 헤롯의 궁전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고, 이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음으로써, 평화롭게 권력을 즐기고 있던 헤롯 왕을 들쑤셔 놓았습니다. 교활한 헤롯은 동방박사를 이용하여 이 유대인의 왕을 찾은 후에 없애버리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아기의 장소를 알리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헤롯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을 막으십니다. 마태복음 2장은 아주 간략한 필치로 이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림책을 보듯이 아주 섬세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건이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 사건들 속에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선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살피려고 하는 것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이 선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의 의도는 이 선물이 가진 ‘뜻’ 자체를 살피려는 것은 아닙니다. 선물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에서만 그치려는 것이 아니고, 이를 살피는 것을 통해, 따라서 주님께서는 어떤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데에 그 궁극의 목적이 있습니다.
성탄주일입니다. 주께서 아기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 절기를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의미와, 또 이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방박사의 예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성경에 어떤 내용이 나오면 그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온갖 것으로부터 의미를 끌어오는데 정작 성경 자체로부터는 그것을 잘 안 끌어오려고 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제가 글을 하나 읽었는데 “성경이 말하는 땅 끝이 어디인가?”하는 글이었는데, 땅 끝에 대한 온갖 가능성들을 다 언급하면서도, 희한하게! 성경 스스로가 “땅 끝”이라고 말하고 있는 구절들은 하나도 다루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어떤 문제를 만날 때, 그 문제의 답을 유추하기 위해서 철학적인 방법도 동원하고, 주변의 사물이나 원리를 가지고서 설명을 하려고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 정작 성경 말씀 안에서 그것이 사용되는 것은 살피지 않는 때가 많은데, 절대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성경 자체 안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그런 점에서 왜 동방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 아주 간단한 사실이고,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정작 우리들은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드렸는지, 그것은 묻지 않거나, 물어도 다른 데서 뜻을 유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대답은 두 가지 사실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바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이 이 선물을 가지고 온 이들을 굳이 “동방박사”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선물 자체,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 그 자체입니다. 이 둘에 집중하면 동방박사들이 이 선물들을 가지고 온 의미를 아주 쉽고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이 왜 찾아온 이들을 “현자들”, “왕들”, “점성술사들” 혹은 “그 어딘가에서 온 알 수 없는 이들”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라고 했을까요? 당연히 강조점은 “동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동방”이 가지는 의미는 제가 우리 교회에서 여러 번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설명하기보다는 성경 구절만 몇 개 말씀드리겠습니다.
- 사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 사24:1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 겔25:4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붙이리니 그들이 네 가운데 진을 치며 네 가운데 그 거처를 베풀며 네 실과를 먹으며 네 젖을 마실지라.”
- 겔47: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 계16: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성경에서 동방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동방 풍속”이란 하나님을 거역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풍속을 말하는 것이고, 이사야 24장에서 “동방에서”는 “바다 모든 섬들”이라는 말과 함께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내가 너를 동방 사람에게 기업으로 붙이겠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붙이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동방”이라는 표현은 아주 선명한 의미, 즉 “이방인들”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이, 선물을 갖고 온 이들을 수많은 표현들 중에 굳이 “동방에서 온 이들”이라고 쓴 것은 이들이 이방의 대표자로서 선물을 갖고 온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상은 우리가 지난 여름 수양회 때 성전에 대해서 배울 때 살폈던, 구약 성경이 그리고 있는 말일의 모습, 즉 열방이 재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로 몰려들 것을 성취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이렇게 동방의 박사들의 의미를 정리하고 나면, 그들이 가져온 선물은 아주 선명하게 구약의 한 구절을 그려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60장 말씀입니다. 제가 6절을 읽겠습니다.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달할 것이며”
여기 황금과 유향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바는, 단순히 황금과 유향이 나와서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아닙니다(사실 성경에서 황금과 유향이 동시에 나오는 것도 없기도 함). 이 구절의 주제가 우리가 방금 말한 “동방박사”와 정확하게 매칭이 되면서, 황금과 유향을 선물로 가지고 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사야 60장 6절 말씀은 동방박사가 선물을 가지고 온 것과 정확하게 똑같이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이 황금과 유향이 무엇인가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오면서 가지고 오는 선물입니다. 바로 제가 조금 전에 이 이사야 60장을 보기도 전에 말씀드렸던 그 내용입니다. 구약 선지서에 아주 자주 나오는 내용, 메시야가 도래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회복되게 될 때, 그 때 열방이 재물을 가지고 몰려들게 될 것이다. 이사야 60장은 바로 이 주제를 말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장의 처음부터 한 번 보십시오. 이사야 60장 3절은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라고 시작하면서,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4,5절) 라고 말씀합니다.
황금과 유향을 드린다는 6절 말씀은 바로 이 말씀에 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달할 것이며”
이방인이라는 주제와, 황금과 유향이라는 주제, 이 두 주제가 정확하게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구약에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주 명시적이고 정확한 구약의 성취입니다.
마태가 찾아온 사람들을 굳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라고 쓴 이유도, 그리고 이들이 준 선물을 표기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굳이 황금과 유향이었다고 쓰고 있는 이유도, 아주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이 예물들을 드린 이유가 바로, 구약의 이 내용의 성취, 즉 예수 그리스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이유는 그 분이 열방을 회복할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회복을 통한 열방의 회복
하지만 여러분!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드린 이 말씀만을 듣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동방박사의 경배와 선물을 받은 것을 “예수님께서 열방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을 보여준다.”라고 말하면, 너무 섣부른 판단이 됩니다. 오히려 이 지점에는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이사야 60장을 살폈는데, 이사야 60장은 열방들이 회복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사야 60장은 열방의 회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이사야 60장을 한 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3절부터 6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열방이 재물을 들고 이스라엘로 몰려들게 될 것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믿지 않았던 열방들을 하나님 곁으로 불러 모으신다.”라고 너무나 쉽게 선교적인 적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열방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으로, 그렇게 쉽사리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장에서 열방의 회복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사야 60장의 본연의 목적은 열방 자체에 있다기보다,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원래 가진 세상을 향한 사명, 즉 열방에 여호와의 빛을 알리는 것, 그것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배경(59장)과 60장의 내용 : 회복된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열방
이사야 60장이 어떤 배경 하에서 쓰여지고 있는지를 한 번 보십시오. 그 앞 장인 59장 20절, 21절부터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교회의 회복을 말씀하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할 때! 야곱 중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할 때! 교회의 회복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하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까? “내가 나의 언약을 다시 너에게 두어서, 네 입에서, 그리고 네 후손의 입에서, 그리고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 새 언약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60장에 나오는 열방을 향하여 예언된 말씀들은, 열방 자체의 회복을 말하는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교회가 회복되어, 교회가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때, 그 때 세상에게 교회가 가진 사명이 이루어지게 될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10절부터 12절을 보십시오. 열방이 몰려들어오는 것의 의미가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13절과 14절도 봅시다.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방이 왜 하나님께로 몰려들게 됩니까? 교회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 안에서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가진 사명도 회복되었습니다. 열방을 향하여 소금과 빛이 되는 것!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찬송이 되는 것!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신 것! 그것이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회복과 세상
얼마 전에 김홍열 성도님께서 SFC 총동문회 모임에 다녀와서 저에게 자료를 하나 주셨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SFC로 열심히 살던 이들이 졸업을 하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그 직장 속에서도 여전히 개혁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SFC가 펼치고 있는 소위 ‘영역운동’에 대한 포럼자료였습니다.
주강사가 유해무 교수님이었는데, 강의 자료를 읽으면서 정말 크게 와 닿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에 보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는 이들은 개혁주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원론은 있는데 실천이 없다.”, “세계관을 배워도 삶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현실적이고 적용 가능한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 교수님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하여, 세계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방향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제가 그 부분만 인용하여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개혁주의 세계관을 비판한 이들이 정작 놓치고 있는 점들이 있다. 바로 신앙고백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위치이다. 성도의 삶의 현장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발휘해야 할 힘을 교회에서 얻는다.......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일차적인 일터이며, 따라서 성령님은 성자의 사역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알리며 거룩한 힘을 주신다. 성도들은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 사이에서 고독한 자로 지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의 회중이 되는 체험을 교회에서 하게 된다.”
이 말씀은 정말 머리를 치고, 가슴을 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적 삶이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기독교 세계관을 지지하는 분들은 ‘세계관’은 살렸는지 몰라도 ‘기독교’를 죽인 셈입니다. 신자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지에 대한 진정한 힘은 교회와 예배에서 옵니다. 이것 없이 우리의 삶터에서의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설교의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우는 바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열방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열방이 선물을 가지고 찾아올, 완성될 왕국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열방의 회복은 반드시 교회의 회복을 통해서 옵니다. 교회가 교회의 자리에 제대로 서게 될 때, 그 때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대사회적인 사명, 대세계적인 사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게 됩니다. SFC를 잘 모르시는 분은 이해하기 어려우실지 몰라도, 제가 대학 다닐 때부터 SFC는 이미 자꾸 사회운동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나 이봉우 형제 같은, 함께 SFC 활동 한 사람들은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에 치중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세상이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보게 되려면 무엇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까? 교회와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교회에 나아와 어머니 교회로부터 젖을 먹고 힘을 얻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한 주간 살아가는 힘을 ‘내가 열심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일의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여러분에게 별반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세상 속에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60장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
그러면 여러분! 동방박사는 왜 주님께 이 이사야 60장의 선물을 건네었겠습니까? 앞서 들은 말씀을 잘 이해한다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께서는 ‘열방의 회복자’로서 오셨지만, 그보다 더 앞서 ‘교회의 회복자’로 오셨습니다. 이방인들인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재물을 바쳤을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열방의 회복이지만, 그 배후에는 교회가 회복되어 새롭게 되었을 때에야 그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회의 회복이 전제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새롭게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먼 훗날, 사도행전의 시기가 되어서나 복음이 세계로 펼쳐져 나갈 것을 미리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스스로는 단 한치도 교회의 접경을 벗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옛 언약 백성들을 향하여만 사역하셨고, 부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그래서 이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부어지신 후에야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성탄에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를 염려하기 전에 우선 내 예배 생활이, 나와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된 기초 위에 서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될 때, 우리의 대사회적인 사명, 세상과 열방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떼어지게 될 것입니다.
몰약 : 생일에 울려 퍼진 장례의 메아리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더 다루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오늘 설교 전체에서 동방박사가 가져온 선물과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선물에서 하나가 빠져 있다는 사실에서 궁금증을 갖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동방박사와 선물이라는 주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사야 60장의 주제와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지만, 단 하나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방박사는 이사야 60장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선물을 하나 더 드렸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몰약’입니다. 이사야에는 황금과 유향만 나오지 몰약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지 마시고, 성경이 왜 이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신약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지지난주에 떡집 베들레헴에 대해 설교를 들었습니다만, 거기에도 이런 종류의 변형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인 미가서는 베들레헴을 “작은 고을”이라 했는데, 마태복음은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변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이사야와 똑같지 않습니다. 왜 몰약이 더해졌을까요? 왜 동방박사들은 이사야와 똑같이 황금과 유향만 선물로 드리지 않고 몰약을 덧붙였을까요? 이것은 분명 성경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의 내용을 이루면서도, 여기에 신약적 진전이 있는 것’입니다.
몰약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더해졌는지를 알기 위해 몰약의 성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몰약은 좋은 향을 내는 향유의 일종으로 아주 비싸고 귀한 향유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몰약이 정작 신약성경에는 단 두 군데에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군데가 여기 동방박사의 선물이고, 다른 한 군데가 요한복음 19장 39절입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 한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몰약이 주로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외에 일상적으로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성경에서 몰약은 여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언제 사용되었습니까? 요한복음의 이 내용은 무엇에 관한 내용입니까?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가 몰약을 가져온 이유는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할 때 거기에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몰약은 장례용품이었습니다. 물론 몰약이 언제나 장례용품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몰약은 일종의 사치품으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값진 향료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몰약은 예수님의 장례에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을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이런 종류의 향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얼핏 비춰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이 내용을 알았건 몰랐건, 그들은 예수님의 생일잔치에 장례용품을 들고 온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가 방금 말씀드린 구약의 신약적 진전입니다. 구약이 성취되지만, 토씨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요소가 더 붙어서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하는 것!
하나님은 그들이 황금과 유향 뿐 아니라 몰약을 함께 준비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이 교회의 회복과 열방의 회복이 무엇을 통해 올 것인지를 예수님의 생일 때부터 넌지시 비춰보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회복, 열방의 회복을 아주 들뜨는 심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찬양 집회나 교회의 부흥회에 가보면, 교회의 회복이나 열방의 회복은 아주 선동적인 구호와 함께 사용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큰 기대와 부품으로 이 주제를 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시고 열방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신 것은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애초에 나실 때부터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일은 기쁜 잔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상집을 예비한 것이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물을 통하여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탄의 주간에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열방을 회복시킬 것을 보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이것을 함께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아니하시고는 이 일을 이루실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교회를 회복하고 열방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길이요, 성부 하나님의 계획이요, 성령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말 그대로 성탄주간입니다. 기뻐 날뛰는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사랑과 겸손과 자비를 갖고, 교회를 회복하시는 주님을 기대하시고, 또한 십자가를 통해 이 회복을 주시는 분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 위에 복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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