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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2장 1-12절 이방인이 탄생하신 메시아를 경배하러 오다 - 송다니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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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2장 1-12절
설교제목 : 이방인이 탄생하신 메시아를 경배하러 오다
설교자 : 송다니엘 목사님

본문: 마 2:1-12 요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구약 역사는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정점으로 달린다. 인간이 타락하자 마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메시아를 구원자로 보내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우리가 1장에서 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 이르러 아담의 약속이 더 구체적으로 표현된 메시아 약속을 주셨다.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이다. 그러므로 메시아 약속과 그분에 대한 기대는 구약의 뼈대를 이루며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메시아 기대는 비빌론 포로 이후에 더욱 커졌다.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제 사후에 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에피파네스왕이 이스라엘을 헬레니즘화시키려는 정책으로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대를 겪었다. 그다음 마카비 반란으로 그들이 얼마간 독립을 찾았으나, 지금은 이두매 사람 헤롯이 이스라엘을 폭력으로 지배하게 되어 그들의 메시아 대망은 더욱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정작 메시아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이스라엘은 이 메시아께 어떻게 반응했는가?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준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시라는 것과 이 메시아는 모든 백성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한 자손이 태어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그러면 우리는 이 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본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유대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800미터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근처에는 라헬의 무덤이 있다(창 35:19). 그곳은 또한 다윗이 성장한 곳이다. 미가서 5:1 이하에 따르면 유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 11:1의 진술과 일치한다. 예수님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신다는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날짜까지 언급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 탄생하셨다. 고대인들은 „누구누구 왕 때에“, 혹은 „유명한 사람 누구가 무엇을 했을 때에“라는 표현으로 날짜를 표시한다. 그는 헤롯 대왕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기원전 37-4 사이에 다윗에 다스렸던 영토에 거의 맞먹는 지역을 다스린 왕이다. „대왕“이라는 말은,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으로서, 그가 대형 건축물을 세웠으며, 로마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그는 항구와 바닷가에 큰 도시 가이사랴와 갈릴리 호숫가에 디베리아를 짓고, 또한 로마 신과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몇 개의 사원을 건축했다. 헤롯 양식의 건물은 아테네, 스파르타, 두로, 시돈, 비블로스, 베리투스, 다메섹, 안디옥에도 있었다. 그는 또한 여러 요새를 지었다. 예루살렘에 안토니아와 또 하나의 요새를 짓고, 또한 마케루스, 헤로데이온, 마사다 등에도 요새를 지었다. 무엇보다도 헤롯 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증축한 사람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곳도 헤롯이 지은 것이다.  

이 영특하고 용감한 왕의 지배 이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엄청난 죄가 쌓여있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헤롯은 혈통으로 볼 때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돔의 후손인 이두메아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친족들을 죽였는데, 아내부터 시작하여 장모님, 처남을 죽이고, 유대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 아들 세 명을 죽였다. 자기 아내 마리암네의 생전에도 다른 여자를 가졌으며, 아내 외에도 모두 9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인 이유는 질투심과 의심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왕위를 넘본다는 의심이 생기면 그를 죽였다.

대부분의 유대 백성은 헤롯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유대인보다는 그리스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헤롯은 약속된 메시아적 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이었다.  

 „보라,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동방“은 바빌론이다. 그 방문객들은 마고스(마술사)이다. 동방박사나 „거룩한 세 왕들“(가톨릭에서 사용)이라는 번역은 잘못되었다. 마고스는 페르시아나 바빌론의 사제들을 일컫는데, 이들은 점성술가이며 고대 바빌론의 점성술을 이어받아 연구하는 자들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학자이며 고위 관리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그들의 질문은 당시의 예루살렘의 분위기에서는 마치 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기원전 7년은 밝은 그 별이 나타난 그 해였는데, 바로.그 때에 헤롯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을 살해시켰다. 이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3년부터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헤롯 가에는 어두운 구름이 덮쳤다. 그러므로 점성가들의 출현은 극도로 의심이 많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수호하고자 했던 헤롯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이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점성가들은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기만 해도 당연히 대답이 나오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경악)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경악한 이유를 설명했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놀랐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에서는 또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2:16 이하). 헤롯 왕이 점성가들의 말을 믿은 이유는,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메시아가 곧 오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헤롯은 드디어 메시아가 와서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나보다라고 생각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소집했는데, 이것은 공회 소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라고 물었다. 헤롯은 자기 경쟁자(자기의 왕위를 노리는 자)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알아내려고 했다.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답은 분명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들은 두 곳에서 증거 본문을 찾았다. 인용 구절은 미가서 5:2에서 시작하여 삼하 5:2로 넘어갔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받은 약속은 그때까지도 백성에게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관들은 „결코 (작지) 않다“라는 말을 첨가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면, 그곳은 결코 작은 (의미가 없는)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은 구약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이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헤롯 왕을 두려워해서 그랬을까? 혹은 점성가들의 말을 듣고 행동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교만했을까? 아는 것만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 왕은 „가만히“(몰래) 행동한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이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점성가들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디에서 났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헤롯은 그 위험한 경쟁자를 몰래 죽이기 위해 점성가들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아이들을 죽이게 되는데, 지금은 그러한 의도는 없었다. 단지 예수님만 죽이려고 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라고 한 것은 물론 거짓이다. 헤롯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거짓 표현의 대가로 알려졌다. 거짓과 살인은 사단이 일하는 방식이다(요 8:44). 그러나 그와 같은 악인도 결국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다. 헤롯 덕택에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탄생 초기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분 자신이 생명이며 생경을 가져다주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요 1:4; 4:14; 10:10). 그분이 아기로 누워있는 곳까지도 수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것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게 어떻게 대항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겔 34; 미 3; 렘 23; 마 21:33 이하)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점성가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헤롯으로부터 별다른 요구사항을 받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이방 점성가들의 진전되는 믿음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왔을 때에 사라졌던 별을 다시 보았을 때 그들은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리스 본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해보자: 그들은 큰 기쁨으로 격렬하게 기뻐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목적을 드디어 찾은 것과 같았다는 표현이다. 죽이려고 하는 헤롯 왕과 자기 몸을 사리는 유대 지도자들은, 멀리에서부터 메시아를 찾아온 이방인과 얼마나 큰 비교가 되는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새로 태어난 아이와 그 어머니를 두 눈으로 본 순간에 그 별이 그들에게 준 메시지가 성취되었다. 그들은 집이 너무 허술하고 부모가 단순한 평민이라는 데에 실망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했다. 동방 사람들의 경배는, 무릎을 꿇거나 배와 이마를 땅에 대고 앞으로 눕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는 표시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의 대표격인 목자들(눅 2:8 이하)과 이방인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요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벌써 여기에 앞으로의 예수님의 인생이 암시되어 있다.  

점성가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이 보배합은 보배가 들어 있는 통을 말한다. 이 보배는 왕에게 드리는 선물로서 황금과 향기가 나는 향품인 유향과 몰약이다(창 43:11; 왕상 10:2; 삼상 10:27). 동시에 이 세 가지는 메시아 시대를 위한 선물이다(시 45:9; 72:10-11, 15; 애 3:6; 사 60:6). 이 물건들이 등장하는 시편과 아가서는 당시에도 메시아적으로 이해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점성가들을 통해 구약 예언의 일부가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러마 몰약은 동시에 예언적인 선물이다. 즉, 그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알려준다(요 19:39).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셨다. 다른 길로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도 베들레헴의 오른쪽으로 가서 기드론 계곡을 넘어간 후에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쪽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그들은 다시 역사의 시각으로부터 사라졌다. 이렇게 끝이 짧은 것은, 마태가 자기 생각을 담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호하셨다. 그분은 점성가의 경배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시며, 진실로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케 된다(창 49:10)는 것을 확증하셨다. 

내용을 한 번 정리해보자.  

서론에서 이야기한 대로,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아담에게 주신 약속과, 아브라함, 다윗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극히 어려운 한 가지 현상을 보여준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교회가 메시아를 거부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요 구약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메시아를 경배하러 왔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깊은 진리를 배운다.  

헤롯은 반 유대인이지만 어쨌든 유대인 지도자를 대표한다. 그는 메시아를 죽이려고 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헤롯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메시아를 경배하러 가지도 않았으며, 아예 잊어버렸다. 백성들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바빌론에서 온 점성가들의 소문은 빨리 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 탄생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교인도 이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점성가들은 약 1000킬로미터를 낙타를 타고 바빌론으로부터 아기 메시아를 경배하러 왔다. 몇 달이 걸렸을 것이다. 고위 관리인지라 왕으로부터 제가를 받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물과 여행을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들의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 이방인 마고스들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메시아가 오시면 광야가 비옥한 땅으로 변하고, 병사가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맹수와 토끼가 같이 논다. 그리고 이방인이 자발적으로 시온에 온다. 즉 메시아를 찾아 온다. 이제 이 시대가 동터온다.  

점성가들이 예루삼렘에 와서 유대인에게 새로 태어난 메시아가 어디에 계시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헤롯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온 예루삼렘도 함께 놀랐다고 한다. 기뻐서 놀란 것이 아니라, 메시아 탄생이 자신들의 현상유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열렬히 섬기는 교회에 정작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모두 경악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교회에서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사람들은 점성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을 때에, 그 도시에는 세상의 왕이 태어난 것에 대한 경사의 흔적도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자기 나라의 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데, 왜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까? 그런데 왕에게 찾아가서 그 아기 왕을 경배하러 멀리서 왔다고 했을 때, 왕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들이 헛걸음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본문에는 그들의 실망에 대한 보도는 없다. 그만큼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방문했다. 그런데 그들이 본 것은, 짐승이 거하는 외양간이었다. 그 왕은 여물 통에 누워있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화려하게 장식된 옷을 입은 품위있는 여왕이 아니라 평범한 시골 처녀였다.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상태에서 그 아기에게 경배할 수 있었을까? 온 몸을 땅에 대고 그분께 절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드렸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또 한 번 배우는 것은, 기독교는 보통 신자가 생각하며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교회에서도 감추어져 계시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에게 경배를 받지 못하고 이방인에게서 경배를 받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의 본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신분으로 오셨으며, 또한 그렇게 사셨다. 그것은 극도로 천하고 비열하고 죄악으로 뭉쳐진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너무 교만하여 주님의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마구간으로 메시아를 찾아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가?

점성가들과 같이 인생을 걸고 메시아를 찾아가야 한다. 그분을 섬기고 경배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드려서 그분께 집중하는 것이다. 그분께 온 몸을 땅에 대고 경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없다면, 메시아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경배하러 오지 않은 예루살렘의 서기관처럼 될 것이다. 메시아 경배는 종교생활이나 취미생활이 아니다.  

메시아가 오시고 그분이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세상은 평화롭게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지럽고, 교회는 더욱 어지럽다. 우리가 점성가들에게서 배울 점은, 주위가 아무리 어지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망하여 주저않지 말고 메시아 한 분 만을 경배하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메시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늘나라가 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쳐서 점술가처럼 완전히 엎드려 매일 이 메시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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