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21-23절
설교제목 :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설교자 : 차용철 목사님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1:21-23)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유다 베들레헴 한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8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이사야7:14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에 말씀은 이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한 동시에 그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임마누엘의 의미를 가진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오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관점에서 의미를 되새기려 합니다. 임마누엘 (Εμμανουηλ)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1.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입니다. 미가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라고 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는데 그는 예수님의 근본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15-17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분으로서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1부터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3절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헬라 철학에서 말한 말씀(λονοs) 으로 표현된 하나님이 육신(σαρξ)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이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이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고 했습니다 (요14:18-19).
2.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2,000여년 전에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관계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사건입니다. 초절자이신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종의 형체로 낮아졌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2:6-8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예수 (Ιησυ)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듯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 대상은 외부적으로 소외받는 자들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 시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눅2:8-39). 양치기와 시므온과 안나였습니다. 양치기들은 유대 사회로부터 가장 천대를 부류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물질과 학식과 명예가 전혀 없는 자들로서 일반 삶들로부터 전혀 신임을 받지 못하는 그룹이었습니다. 양치기는 배경도 없고 학식도 없고 돈도 없어서 남의 집 종으로 가서 남의 집 짐승을 길러 주는 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남의 양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들이 가난하여 먹을 것을 염려해야 하는 형편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종교적 혜택으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된 자들로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은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드리는 ‘쉬모네 에스레’라는 기도에 잘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노예로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양을 치는 양치기는 그 안에 포함된 부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결례를 행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예수님을 만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안나라는 사람도 예수님이 결례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왔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습니다. 그는 출가한지 7년만에 남편을 잃고 84년 동안 홀로 지내던 자로서 많은 소외감을 느끼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남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홀로 살면서 얼마나 억울한, 가슴에 맺힌 한과 서러움이 많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눅4:18-19). 영적인 의미로 한 선언이지만 육체적인 의미도 포함됩니다.
3.예수님은 성령으로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여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20:28). 어떻게 영원히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까? 요한복음14:16-18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려고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도 제자들에게 한 약속대로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는 인격성을 가진 위로자 입니다. 그의 별명이 보혜사 (保惠師)입니다. 헬라어 παρακλητοs (파라클래토스)는 παρακ (곁에)와 κλητοs (부름받음)의 합성어로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받은 자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영어 성경들에서는 Helper (NASB-돕는자) Comferter (KJV-위로자) Counselor (NIV,RSV-상담자)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사단과 마귀와 귀신으로 인하여, 육체의 죄성과 연약성으로 인하여, 환경의 열악함을 인하여 고통 당하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 인생이 겪는 깊은 내면의 고통을 아시고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그 고통을 함께 느끼며 섭리하십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 가운데 친히 거하시고 내주하시고 동행하십니다. 그가 오늘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 가운데 내주해 계십니다. 그가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섭리하십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인도하여 소망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5:3-5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신약 >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1장 23절 임마누엘 주로 오신 주님 - 양인국 목사 (0) | 2023.02.25 |
---|---|
마태복음 1장 23절 처녀 잉태(성탄특강) - 최동규 목사 (0) | 2023.02.25 |
마태복음 1장 21-23절 예수, 임마누엘 - 최동규 목사 (0) | 2023.02.25 |
마태복음 1장 22-23절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라 - 김희만 목사 (0) | 2023.02.25 |
마태복음 1장 21-23절 예수님이 오신 이유 - 노환영 목사 (0) | 2023.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