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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21-23절 예수, 임마누엘 - 최동규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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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21-23절
설교제목 : 예수, 임마누엘
설교자 : 최동규 목사님

해가 갈수록 성탄절은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여 상인들에게는 ‘대목’으로,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는 날’로 각인되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탄카드는 엽기적인 산타클로스와 루돌프에게 점령당하고 성탄송 역시 크리스마스 캐럴송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은 성경적이지 않는 것들로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라은성 교수님에 의하면, ‘Christmas’라는 용어도 ‘그리스도의 미사’ (Christ's mass)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미사라는 것은 ‘희생제사’를 뜻하는 것인데, 지금도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는 잘못된 관념이 담겨 있습니다. 성탄카드에는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후광을 그려놓은 것들이 많았는데, 이는 마리아 숭배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성탄절 나무로 사용되는 상록수는 다산이나 성적 능력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던 이교 풍습에서 온 것이고, 촛불도 고대 바벨론 사람들이 신들을 섬기기 위해 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교도적인 요소들 때문에 성탄절을 지키는 자체를 배교로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단도 있습니다.

성탄이 되면 이처럼 상업화된 성탄절의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이교도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부터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못된 요소들을 경계만 하다보면 즐거워야 할 성탄절을 부담스러움과 쓸쓸함으로 보내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의 본래적인 의미 즉, 성육신의 의미를 집어보며 참으로 성탄절에 기뻐해야할 이유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육신의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 위해서는 인성을 취하셔야 했습니다. 신성은 고난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주시고 완성하시고 극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택하신 자들은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살지 않고, 이 땅에서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려 하셨습니다. 셋째는 창조의 정점 곧, 인간성의 최고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자신을 보이셔서 모범이 되시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도 맏아들이신 그분의 인간성처럼 되게 하시려 함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성을 실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오늘은 첫 번째 의미를 예수님의 이름과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그 뜻이 똑 같은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혹은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는 사용 폭이 상당히 넓은데 건강에서 회복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설명하면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라는 좁은 의미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만유가 회복되겠지만,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구원과 경제적인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서 지긋지긋한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정치ㆍ경제 문제가 그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였으며,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선교사역을 하면서 죄가 한 인생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준수해도 정욕으로 그 내면이 망가져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단 한 번의 거짓말 때문에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하여 자학과 남모르는 슬픔으로 살아온 사람도 보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가족사로 인해서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지내고 싶어서 지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노력들을 했습니다. 만화나 영화나 정욕을 탐닉함으로써 잊어보려고도 하고, 공부나 선행이나 봉사활동들을 통해서 죄의 무게를 삭감해 보려고도 했습니다. 신비주의나 참선을 좇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바울처럼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 표준새번역)

그런데 스스로 한탄하던 사도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롬 7:25) 바울의 깊은 한탄과 감사 사이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 상태”(롬 7:23, 현대어 성경)에 있던 바울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바리새인의 계율에 따라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종교적인 일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한탄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는 과거에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동일합니다. 지금도 죄는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은 후로도 우리는 죄를 범합니다. 말씀을 많이 배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죄 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부리고 용납하지 못합니다. 환경만 갖춰지면 쉽게 이기적이 되고 정욕적으로 변합니다. 죄는 매일 찾아오는 초저녁의 으스름처럼 우리의 삶에 파고듭니다. 놀이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가 조금만 더 잠깐만 더 하며 머뭇거리다가 어느새 어둠속에 잠겨버리는 것처럼, 잘못인 줄 알면서도 머뭇거리며 죄를 즐기다가 문뜩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짙은 죄의 어둠 속으로 성큼 들어서 있는 실존을 발견하곤 합니다. 무엇으로 그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손으로 밀칠 수도 없고,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잠잠히 새벽이 밝아오기를 갈망할 뿐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 된 실존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노라면, 서서히 먼동이 트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 은혜가 언제 임하는지는 규정할 수 없지만, 적절한 때에 반드시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뻐하며 다시 주 앞에 힘차게 뛰놀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주의 사자는 그 이름의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3)로 번역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첫 장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한 후에 마지막 장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 구조로 ‘봉투기법’(inclusio)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법이 의미하는 바는 이 두 문장 사이의 모든 기록이 결국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죄인’하면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를 연상했습니다. 그는 조국이 식민지가 된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과 조국을 버리고 로마 권력에 빌붙는 세리가 되었습니다. 먹고 살려고 동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자 동족들은 이기적인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사람을 잃었습니다. 외로운 그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세리들과 창기들뿐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면서 그는 도덕적으로 더 깊이 죄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더 멸시를 당했습니다. 돈도 싫어지고 자신의 직업과 삶도 싫증을 느낄 무렵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손가락질 대신에 따뜻한 손을 내미시고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24시간 함께 하시면서 죄 된 습성들을 감당해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마태의 삶은 점차 변했습니다. 결국에는 신약 성경을 기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마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로 인해 마태는 아마도 울면서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적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 우리의 삶도 경건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목자’라는 타이틀이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모양인가?’하는 자책이 들 때가 있습니다만, 예수님 믿으니까 이 모양이라도 됐지 안 믿었으면 개차반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교회만 벗어나도 도덕성이 약해지고, 주일만 지나도 헤이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네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브레이크가 파열된 차가 급경사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쉽게 방탕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사람은 골초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두통이 생기고 호흡하기 힘들어합니다. 연기에 대해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 대한 대단한 민감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므로 죄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고, 죄에 무뎌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낱낱이 체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더러운 죄인과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우리는 같은 죄인이면서도 술에 만취된 사람과 함께하며 주정을 들어주는 것이나, 입이 거친 사람이 욕으로 점철된 말을 내뱉는 것을 들어주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구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24시간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은 채찍과 십자가의 대못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걸쳐 전인격에 가해졌습니다. 죄인과 함께하셨던 삶 전체가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체휼하시기 위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아픔을 알아주었다면 견딜 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죄의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 무게가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나간 모든 세대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죄 짐을 다 짊어져야 했기에 핏방울이 땀방울이 되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었으나,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그분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그분에게 돌아갔던 것은 조롱과 모욕과 침 뱉음이었습니다. 처참하게 죽어갔던 순교자들도 최소한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분께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간과해두셨던 모든 진노가 쏟아졌습니다. ‘임마누엘’은 고상하게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진 ‘임마누엘’의 은혜는 너무나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주어진 은혜입니다.

성탄이 되면 상인들은 대목이므로 기뻐하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임마누엘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가정에 풍성하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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