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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8-25절 의인이 살아가는 길 - 김영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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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설교제목 : 의인이 살아가는 길
설교자 : 김영하 목사님

오늘 본문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창 3:15, 사 7:14)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왔다는 내용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사7:14). 이렇게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마리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뜻에 순종하는 주의 종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순종하였던 요셉의 역할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요셉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자신과는 전혀 성적관계가 없는 데 임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사건을 대하는 요셉의 행동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19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롭다고 하면 “바르다, 정직하다, 곧은 사람이다.“ 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즉 죄인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의 하신 일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1:17)는 의미입니다. 나는 분명히 죄인인데 무죄를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죄 없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없이 한 후에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할 수 없어서 즉 죽게 되어서 살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과거에 대한 비판도 없고 왜 내 말 듣지 않았느냐 돈은 어디에 썼느냐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느냐 묻지 않고 아들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들로서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줍니다. 옷을 갈아입히우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옷을 갈아입혔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사건입니다. 반지를 끼워주었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권리를 부여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 있게 살아가며 마귀를 제압하는 권세를 받은 사실입니다. 신발을 주었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잔치를 배설하였다는 것은 죄인이 돌아오면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기준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최고의 기준입니다(고전 4:3-4).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한 일 때문에 우리를 죄 없다고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자가 의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기준으로 살았기에 의인이라고 하는 호칭을 받은 것입니다.

2. 드러내지 아니하고(19절)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약혼녀가 임심을 하였다는 것은 자신하고 결혼하기로 해 놓고 다른 사람과 성젹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는 것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결혼하기로 약속을 해 놓고 이러한 배신행위가 어디 있는가 하고 따져 물을 만도 합니다. 배신감, 실망감, 좌절감 분노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문제화시키지 않고 자신이 혼자서 가만히 끊으려 고합니다. 이 얼마나 성숙하고 의로운 행동입니까? 만약에 요셉이 이것을 사건화하여 마리아를 죽이기라도 했으면 예수를 처녀의 몸에 잉태케 하시는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을 것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방법은 있겠지만 참으로 아슬아슬한 장면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구세주의 이 땅에 탄생을 도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삶의 현장을 봅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모순 투성 입니다. 교만하고 욕심 부리고 시기 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말이 많습니다. 광우병 사건만 봐도 얼마나 쓸데 없는데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온 나라를 움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악플이 인터넽을 마비 시킬 정도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무엇을 안다고 공부를 안하고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합니까? 정치가들은 이러한 우둔한 군중들에 매달려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한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실정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떼 몰려다니면서 남의 험담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놓고 질타를 합니다. 전화와 인터넽이 발달하여 얼마나 소식들이 빨리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나쁜 이야기들은 전염병처럼 어떤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병입니다. 어떤 나쁜 소문은 더 확대되어 재생산이 됩니다. 특히 미국에 자녀들을 보내놓고 일편단심 자녀들의 이야기에 매달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과 없이 소문이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갑니다. 청소년들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시각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 아이들은 자기 말이 어떠한 영향력을 가져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합니다. 그리고 타락된 인간이라 자기 유리할 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잘못을 가리고 상대의 잘못만을 침소봉대합니다. 저는 양쪽을 다 듣고 있지만 부모님들은 한쪽 이야기만 듣고 사건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조그마한 일들이 침소봉대 되어 얼마나 사건이 복잡해지는지 모릅니다. 기억하십시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요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사람은 나를 또 비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봅니다. 노아가 술이 취한 다음에 더워서 그랬든지 벌거벗고 누어서 잡니다. 이것은 본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주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말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의 자녀들은 다른 형제의 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구 상의 자녀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잘못함으로 자녀손들에게 이렇게 저주가 임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의 말 한마디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특히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자신의 가게에 저주를 불러드리는 일이라는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고 옷을 가지고 뒤 걸음 쳐 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래서 셈의 후손 속에 예수가 왔습니다. 야벧족속을 서양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의 부를 장악하고 문명의 역사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모세도 구스 여인을 데리고 삽니다. 200만 이상을 인도하는 영적지도자요 정치적인 지도자인 모세가 이방 여인을 데리고 산다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노골적으로 적대행위를 합니다. 하나님이 너한테만 말하더냐 하면서 따지자 하나님이 간섭합니다. 내 종을 네가 비난하였으니 너는 문둥이가 되라고 형벌을 내립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남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잘못을 행하면 자신이 잘못한다는 것을 자신이 먼저 알고 양심의 가책을 누구나 받습니다. 자신이 약하여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회개의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만약에 깨닫지 못한다면 사랑으로 접근하여 깨닫게 할지언정 악의를 가지고 비난하고 소문내고 부풀리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 남의 잘못된 점을 절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하고 혹시라도 할 때는 상대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여 바로 깨닫도록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상대의 잘못이 보이면 비난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한 종족 중에 이러한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사람이 잘못을 행하였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답니다. 그리고 잘못을 행한 사람을 한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그 사람에 대한 칭찬을 구체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때는 과장해도 안되고 더더욱 지어낸 이야기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며칠동안 계속한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아주 멋있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해 주고 기적을 베풀어 병을 고쳐주고 배고플때는 빵문제를 해결해 주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욕과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저 잘 낫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불편을 주거나 실례하는 일을 하지 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예수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주시고 나의 죄 값을 모두 치러주셔서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고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고 관용과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늘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자신의 자세를 낮출 것을 알게 하시고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침서로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알면서 드러내지 않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하나님이 처리하시겠지 하면서 참아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얼마나 멋있는 공동체를 이뤄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천국 생활의 연습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기본동작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살아갑니다. 그의 삶은 성공이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동침치 아니하더니(25절)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본능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능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능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욕심으로 발전을 합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약 1:1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약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를 하였습니다. 약혼녀가 자신과는 상관없이 잉태를 하였습니다. 남자들한테는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본능이 성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살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 성적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절제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본능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의인들이 살아갈 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본능의 필요를 채워가면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이 본능을 얼마나 다스리고 사는지 이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질을 얻으려는 본능이 너무나 강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으려 하다가 자신의 삶을 저질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으려고 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 쉽게 돈을 벌려고 도박에 손을 대었다가 자기뿐만이 아니라 자기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사례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도박회사에 근무를 하였는데 비참한 많은 사례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도박에 손을 떼지 못하여 다 망해 먹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부산의 어떤 사장은 일년이면 600억씩을 도박하여 날린다고 합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모 회사로부터 돈을 뜯어다가 도박하다가 감옥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요즈음 성적으로 타락하여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의 이혼율이 30%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혼 사유는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로 남자들이 외도를 하였지만 요즈음은 주로 여자들이 외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정도가 너무나 심각한 수준입니다. 자기 배우자를 두고도 외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요셉의 훌륭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가정을 순전하게 지킵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결혼하고 부인하고 잠자리를 일년이 넘게 하지 않았다는데 존경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주석가들은 요셉이 법적으로만 결혼하고 전혀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고 마리아는 예수님만 낳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천주고 신학자들은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마 12:46,13:55, 막 3:31 눅 8:10, 요2:12, 7:5 행 1:14 갈 1:19)은 사촌이라고 믿고 있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요셉이 데리고 온 전 부인한테서 낳은 자녀였을 것이라는 이론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부부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도 평범한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중국은 청나라 황제 강희제에 대하여 벤치마케팅을 하면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정치를 잘 하였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영토도 그 때 확보해 놓은 것입니다. 대만도 강희제가 합병을 하였고 지금의 분쟁 문제로 골치 아픈 티벧트도 강희제가 중국의 영토로 합병하였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 표도르 대제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상 280여 명의 황제 중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이루어었고 가장 오래 산 황제가 된 것입니다. 대부분 황제들이 내시들이나 환관들한테 정치를 막겨 놓고 방사를 즐기다가 50세를 넘는 황제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희제는 61년간 즉 온 생애동안 황제로 살았고 69세까지 살았으니 최 장수를 하였고 최 장수 정치를 잘한 성군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을 잘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모든 정성을 백성의 행복과 평안함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이러한 멋있는 삶이 보장된다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원하는 삶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의인인 요셉이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우리를 칭하여 주었으니 의인에 걸 맞는 삶 즉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본능을 다스림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 가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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