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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8-23절 임마누엘 성탄 - 김광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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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8-23절
설교제목 : 임마누엘 성탄
설교자 : 김광선 목사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성탄절이고 그분이 바로 예수셨습니다.

I. 구원자로 오신 예수입니다.

본문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1.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본문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처녀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시게 되었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실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속죄 제사를 드릴 때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을 데리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은 속죄의 어린 양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어린 양을 데리고 온 사람의 모든 죄가 어린 양에게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어린양을 잡습니다.

피가 흘려 지게 됩니다.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의 제물, 생명의 제물이 될 어린 양은 반드시 ‘흠과 점’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는 흠과 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아담의 원죄가 다 유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흠과 점이 있습니다.

구속주가 되실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흠과 점이 생기는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야만 흠과 점이 없기 때문에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2.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여기 ‘자기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전체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어린양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 전체가 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께 돌아 와야 합니다만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불신자들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요10:15)고 했습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자기의 속죄의 피를 ‘택한 백성’의 대속을 위해 흘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피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19:30)였습니다.

이는 ‘흠과 점이 없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로 완전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이 피의 능력이 택한 자들 속에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12:1)고 선언을 자기 양심과 정죄를 일삼는 사단에게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혹 죄책감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정죄는 결코 없습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죄와 사망에 얶메인 멸망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속주로 오셨습니다.

II. 언약대로 오신 예수

본문 22-23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성탄절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증거라고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성탄절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태어난 날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을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조부들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구약시대 전 역사를 통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라하신 하나님은 마침에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셨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구약에 예언된 모든 예언대로 출생 장소부터 시작해서 외모 그리고 성장과정, 사역의 내용,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심으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확증이 되었습니다.

또한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III. 언약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속성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800년 전에 당시 이스라엘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같은 민족이면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듯이요.

북은 이스라엘이라 불렀고, 남은 유다라 불렀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북한과 비슷하고 남 유다는 남한과 비슷합니다.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 같은 악한 통치자들이 계속 나와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고 과거에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없고 6.25전쟁을 일으켜 남쪽을 침략했듯이 북이스라엘은 아람이나 모압이나 암몬, 에돔등 주변 강대국을 등에 업고 남 유다를 침략해 왔습니다.

더구나 북이스라엘은 10지파가 뭉쳐 한 나라를 이루었고, 남쪽 유다는 겨우 2지파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이스라엘은 강대국 아람과 연합군을 이루어 남쪽 유다를 진격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왕 아하스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사야서 7장 2절에 보면 남침을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고 했습니다.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나라가 이제 곧 망할 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로 나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아하스 왕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당장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중무장한 강력한 연합군이 눈앞에 쳐들어오고 있으니까요.

불안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800년 후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사건을 아하스에게 미리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성(全能性)이란 능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 연합군 앞에 떨고 있는 유다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지금 적군이 코앞까지 쳐들어 왔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입니까?

전쟁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힘없는 유다가 강력한 북이스라엘 연합군과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과 어느 쪽이 쉬운 일입니까?

이순신 장군은 1,597년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일본군 133척의 군선을 침몰시켰습니다.

세계 해전사에서 최고의 승리로 꼽히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전술과 지형과 운이 따르면 13척으로도 적군 133척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 할아버지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전능자만이 할 수 있는 창조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두려워말라!”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쁜 소식입니다.

불가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모순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질병과 사고와 두려움이 가득찬 세상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하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2.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성실성(誠實性)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실성이란 약속을 실재로 이루심으로서 믿을 만하다 또는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의 불신앙과 타락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차질 없이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실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해도 두려워하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실 때 아하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이사야 7장 12절에 보면 아하스 왕은 대답하기를,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징조를 주시겠다는데 아하스는 구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다시 드러납니다.

"하나님, 징조를 구해서 뭐합니까?

구해보나 마나 지금 다 끝난 일인데요"란 말입니다.

백만 대군이 지금 눈앞에 쳐들어오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막아요?

불신앙과 절망과 원망의 하소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신앙적인 아하스를 내치지 않고 다시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비록 아하스가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인 아하스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야 하기 때문에 유다는 망할 수가 없습니다.

아하스왕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겠다는 언약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실성 때문에 유다가 살고 아하스 왕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성실합니까?

얼마나 자주 주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무시합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성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은총을 쉼 없이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실성입니다.

3.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성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신 사건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이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이 한 구절 속에 구약, 신약 수천 년의 역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낳고 낳고 낳고.... 결국 최종적으로 누구를 향하여 가고 있느냐?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함으로 예수께 역사가 집중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약 마지막 요셉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보내실 준비를 하기 위해 나라들과 왕들과 사람들과 역사와 천지만물을 주권적인 권한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연약해 보이지만 유다입니다.

힘없어 보이는 아하스 왕입니다.

그래서 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택한 자녀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소풍 가서 찍은 사진,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면 그 사진 속에서 누구부터 찾습니까?

대통령의 자녀 얼굴?

장군의 자녀 얼굴?

재벌의 자녀 얼굴?

아닙니다. 

그 얼굴들은 다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은 내 아들 딸입니다.

우리 사방에는 침략당한 유다처럼 절망적인 환경들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직장, 사업, 학업, 건강, 사고, 미래......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상 만물들과 직장들과 사업들과 나라들과 왕들과 역사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4.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성이라 함은 유한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성취하시는 속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약속은 파기될 수 있고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돈 빌려주고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집 보증 섰다가 함께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어기고 싶지 않아도 돈이 거짓말을 시키고, 상황이 안 되기 때문에 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처음과 끝은 다 아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고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마침내 보내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5.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비성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에 기초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큰 사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고, 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 성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언약대로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처녀의 몸에서 성령의 잉태시켜 흠과 점이 없는 어린양으로 나게 하심으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아하스 왕이 침략을 당한 것과 같은 위기의 연속입니다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 성탄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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