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1장 1-25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설교자 : 차용철 목사님
<序言>
유대인들은 구약 전승을 통해 오실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본 장은 그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치중했습니다. 그래서 1~17절은 예수님의 혈통적 배경인 족보를 기록하고 이어서 18~25절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의 족보 (1-17절)
①예수님의 족보 개관 (1절)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세계'(世界)의 헬라어 비블로스 겐네세오스(Βιβλοs γενεσεοs)는 '족보의 기록'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의 뜻이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족보의 내용에 대한 서언으로 본다면 '족보의 기록'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1~2장의 탄생과 관련한 서언으로 본다면 '탄생의 기록'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마태복음 전체에 대한 서언으로 본다면 '족보의 기록'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최초로 언약이 제시된 사람은 아담입니다 (창3:15). 그러나 그 언약이 정식으로 확인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롯과 헤어질 때, 롯을 건진 후에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이삭을 바친 후에 '자손'(후손)과 '기업'에 대한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창12,13,15,17,22장). 갈라디아서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적 축복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사람은 다윗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를 통해 집과 나라를 세워 견고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삼하7:12-16).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11:1).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신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9:6-7).
그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구원자(메시야)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오실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고 예언된 구원자임을 행위로 나타냈습니다 (마9:27-29, 12:22-23, 15:22, 20:30-31, 21:9, 27:11). 요한계시록22:16에는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고 예언된 구원자임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증거했습니다 (행13:22-23).
아브라함과 다윗은 구약시대 인물이지만 자신들에게 준 언약의 주체인 오실 구원자를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볼 때를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고 했습니다 (마22:43). 신약시대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언약을 성취한 이후의 우리는 더욱 그를 믿고 그로 즐거워 하고 그가 부여한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그가 다시 오실 것을 바라고 즐거워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22:20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고 했습니다.
②예수님의 족보 서술 (2-17절)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B.C. 2,000년 전 사람이고 다윗은 B.C. 1,000년 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크게 세 단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를 기록했고 (2-6절),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14대를 기록했고 (6-11절), 바벨론유수부터 예수님 탄생까지 기록했습니다 (12-17절). 마태복음 1장의 족보와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다윗 다음부터 달라집니다. 마태복음은 부계인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모계인 마리아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계대계승법(양자법)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실제 조상을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특이한 점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가 강조되었습니다.
1~17절까지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1절은 총론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최초 조상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리스도(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자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3:15).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창12,13,15,17,22장, 갈3:16). 그리고 그 약속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예언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삼하7:12). 이사야선지자는 이새의 줄기 곧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11:1). 그런 예언들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메시야)를 기다렸고 그 그리스도는 자윗의 자손 가운데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실제로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습니다.
둘째, 구조가 14대씩 3번 반복되었습니다.
2~6절에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6~11절까지는 다윗에서 바벨론에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12~16절까지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때부터 예수님까지 14대를 기록했습니다. 17절에서는 그것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족보는 정확하게 14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자를 통해 의도적으로 14대씩 맞추어 3번 반복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밝히는 데 있어서 그것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숫자를 표시할 때에 히브리어 알파벳에 숫자의 의미를 넣어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렙, 벧, 기믈, 달렛...' 은 1, 2, 3, 4...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번째인 '요드...' 부터는 10, 20, 30, 40...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아홉번째인 '코프...' 부터는 100, 200, 300, 400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은 알파벳 자음이 '달렛, 와우, 달렛'로 되어 있는데 숫자로 풀면 4, 6, 4로서 합하면 14가 됩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14는 다윗을 말하는 숫자로서 유대인들은 14라는 숫자를 들으면 다윗이라는 글자를 연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14대씩 구성하여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더욱 강조하는 의도입니다.
셋째, 여인 4사람이 나왔습니다.
3~6절까지 보면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우리야의 아내)가 나왔습니다. 18절에 마리야도 나오긴 하지만 마리아는 족보에 넣은 이름이기 보다는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름입니다. 족보에는 마리야가 아닌 요셉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제외한 다말과 라합과 룻은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룻을 제외한 다말과 라합과 밧세바는 수치스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여자와 이방인과 죄인은 족보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언약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윤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신앙을 가진 것을 보고 언약적 혹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유다는 아들이 엘과 오난과 셀라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 엘이 다말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이 아들을 갖기 전에 죽었습니다. 유다는 계대혼인법에 의해 둘째 아들 오난에게 기업무를 의무를 행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의 아들을 낳아 주기를 거부하고 설정했습니다. 결국 오난도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다는 셋째인 셀라도 형의 아들을 낳아주라고 하다가는 셀라도 오난처럼 죽임당할 것을 염려하여 다말에게 아비 집에 가서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셀라가 장성한 다음에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유다가 딤나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말이 그 말을 듣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다는 그가 창녀인 줄 알고 그에게 들어갔고 그로 인하여 다말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베레스입니다 (창38:1-30). 다말이 그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의 계대에 참여하려는 열정에서였습니다.
라합 가나안의 여리고성에 살던 기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한 다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때에 제일 먼저 맞았던 성읍이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 성을 정복하지 않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2사람의 정탐군을 여리고성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두 정탐군은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수색대가 라합의 집에 들이닥쳐 정탐군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정탐군들을 지붕 위 벌려 놓은 삼대 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성을 빠져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나간 후 라합이 정탐군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정황을 전해 주었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을 듣고 간담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그들에게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선대해 달라고 했습니다. 정탐군들은 라합에게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표시하라고 했습니다. 정탐군들은 창문으로 내려가 여호수아에게 보고했고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하게 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라합의 집은 멸하지 못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수2:1-24, 6:17). 그래서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들이 진멸 당하는 가운데서도 살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았으며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축복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에 살던 여인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의 가정이 살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나오미,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곳에서 말론과 기룐이 그 지방 여인들과 결혼을 했는데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이사한지 10여년이 지났을 때는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권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두 며느리를 떼어놓고 오려 했지만 룻은 끝까지 붙좇았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니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습니다'는 고백을 하며 베들레헴까지 따라왔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에서 보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다가 보아스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나이 많았지만 계대혼인법과 기업무르는 법에 의무가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그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게 됩니다 (룻1:4~22, 4:21-22).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축복을 알았으며 그 언약적 축복의 계대에 참여하려는 신앙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왕의 신하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당시 우리야는 요압과 함께 암몬 자손을 정복하기 위해 랍바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왕궁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낮잠에서 일어나 왕궁을 거닐다가 건너편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우리야의 아내를 보고 음욕을 이기지 못해 그들 데려오게 하여 동침했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야를 불러들여 집에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시위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자고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자시 전쟁터로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요압 장군에게 주게 합니다. 요압이 그 글을 보니 우리야를 맨 선봉에 서게 하고 고립시켜 적들에게 죽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대로 합니다. 다윗은 우리야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게 됩니다 (삼하11:1~27). 밧세바는 다윗이 비록 왕이긴 하지만 자기 남편을 죽게 한 자인데 (물론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아내가 됩니다. 밧세바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주리려 하는 언약적 계대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4명의 여인들이 모두 율법적으로 볼 때는 언약적 계대에 참여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계대를 통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여자, 죄인이라는 약점을 가졌을 지라도 이 여인들이 언약적 신앙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구속사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배경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테고 그 때까지 성령으로 일을 하실텐데 그 구원사의 주역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어떻든지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기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왕 6사람이 빠졌습니다.
요람(요담)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와 요아스와 아마샤가 빠졌고,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이 빠졌고, 여고냐(여호야긴) 다음에 시드기야가 빠졌습니다. 곧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나온 유다왕들 가운데 예수님 족보에서 빠진 왕들은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입니다 (그달랴는 제사장 사반의 손자로서 다윗의 왕손이 아님). 이들은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왕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한 자들입니다.
아하시야는 여호람(요람)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아내 이세벨의 딸입니다. 이세벨은 두로와 시돈왕의 딸입니다. 아하시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우상숭배를 장려하는 왕이었습니다 (왕하8:24-29, 대하22:1-9).
요아스는 아하시야의 아들로서 아하시야가 죽은 후 아달랴가 태후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는데 어린 요아스를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 여호세바가 구하여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자라다가 여호야다의 거사에 의해 7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우상숭배에 빠져 들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고, 말년에는 아람왕 하사엘에게 여호와의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의 금과 왕궁의 금을 조공으로 바칩니다 (왕하11:21~12:21, 대하23:1~24:27).
아마샤는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그는 초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려고 했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고 후에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에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한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를 멸시했는데, 그 때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멸망하기로 결정하신 줄 안다'고 선언했습니다 (왕하 14:1-22, 대하25:1-28).
여호아하스는 선한 왕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가 애굽의 바로느고와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자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지 3개월만에 바로느고가 그를 애굽으로 잡아가고 대신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야 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를 본받지 않고 악을 행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왕하23:31-33, 대하36:1-4, 겔19:3-4).
여호야김은 요시야의 아들이며 여호아하스의 형입니다. 그는 애굽 바로느고에 의해 왕이 되는데 3년간 바벨론을 섬기다가 바벨론을 반역하므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고 선지자 우리야를 죽이려 하다가 애굽으로 도망하자 애굽에서 붙잡아다가 죽였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고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소도(小刀)로 베어 불태웠습니다. 국민에게 세금을 늑봉하여 애굽에 바치고 남은 것으로 사치스런 궁전을 세웠습니다 (왕하23:36-37, 24:1-5, 대하36:5-8, 렘22:13-31, 26:20-23, 36:20-26).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로서 여호야김의 동생이고 여호야긴의 삼촌입니다. 그도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도 그 가증한 일을 본받아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하36:12, 렘27:12-14,17, 32:3-5, 38:5-28, 39:14-15). 백성들도 따라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멸시했습니다. 비웃고 욕을 했습니다 (왕하24:18-20, 대하36:11-16, 렘52:3).
6왕이 혈통적으로는 예수님의 조상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서는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생애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7:5-9에 보면 하나님의 인(印)을 맞은 자 144,000인을 기록하면서 12지파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49:1-27절의 12지파와 다릅니다. 창세기에서 12지파를 이룬 야곱의 12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블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블론, 요셉, 베냐민 지파로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나오고, 르우벤 지파가 뒤에 나오고, 요셉 지파는 두 지파가 나오고 (요셉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포함), 단 지파가 빠진 것이 특징입니다. 유다 지파가 맨 먼저 나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왕권이 있기 때문이고, 요셉 지파가 두 지파로 나온 것은 장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두 몫을 차지한 것이고, 르우벤 지파가 장자에서 뒤로 물러난 것은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므로 장자권을 상실했기 때문이고, 단 지파가 빠진 것은 사단의 무리를 상징하는 지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지파이든 왕이든 하나님이 그 생애를 인정하는 자들이 있었고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옳게 인정 받도록 평생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 (18-25절)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 잉태되었습니다. 이사야7:14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가서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①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나타난 이름은 세가지, '예수'와 '그리스도'와 '임마누엘'입니다.
첫째는 '예수'입니다.
'예수'(Ιησουs)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알려 준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21절). 이 이름은 예수님의 목적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알게 해주는 칭호입니다.
'자기 백성'은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거나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모든 택한 백성을 말합니다.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죄'(罪, Sin)는 인간이 가진 모든 죄를 말합니다. 죄의 종류는 원죄와 본죄가 있습니다. 원죄(原罪.Original Sin)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지은 죄로서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는 죄입니다. 원죄에는 정죄와 유전죄가 있습니다. 정죄(죄책)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죄를 범한 이후 그에게 법률적으로 정죄된 죄책입니다 (창3:17, 2:27, 롬5:12). 그 죄책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위법의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롬5:12-19, 엡2:3). 유전죄(오염)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었습니다 (시51:5, 롬7:20, 막7:21-23). 그 죄성은 부패성 혹은 죄악성이라고도 합니다. 그 죄성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어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요5:42, 롬7:17). 본죄(本罪.Actual Sin)은 본인이 직접 지은 죄를 말합니다. 물론 본죄도 원죄의 영향력 아래서 행해지는 죄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범죄입니다. 본죄에는 자범죄와 요구죄가 있습니다. 자범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입니다. 자범죄에는 교만과 질투와 증오와 욕심 등 내적 생활의 죄가 있고 살인과 간음과 폭행과 도둑질과 거짓말 등 외적 생활의 죄가 있습니다. 요구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도달하지 못한 죄입니다 (삼상12:23). 여기에는 인격적 성장에 대한 부분도 있고 사명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눅19:12-27, 마25:14-3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1:27). 형상과 모양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한가지 내용에 대한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좁게는 의와 성결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고 넓게는 이성적 도덕적 불멸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이라는 동산(낙원)에 두고 그들로 하여금 행복을 누리며 살게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창2:16-17). 그러나 범죄하므로 그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계약,약속)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히 하나님이 되어 주고 행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질서 속에서 살며 그의 명령을 따라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매개체(도장)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아담이 그것을 따먹지 않으면 언약의 효력이 지속되지만 그것을 따먹을 경우 언약이 파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단이 사주한 뱀에게 미혹당한 하와의 권유에 의해 그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창3:1-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죽음이 찾아왔고 그 증후군들인 각종 수고와 번민과 고통과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창3:19, 롬5:12, 6:23).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각종 본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각종 고난을 당하게 되고 죽은 후에 심판받아 지옥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되었습니다 (히9:27). 예수님은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류의 택한 모든 백성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죄와 죄값으로 오는 형벌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사53:5-6).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벧전2:24). 우리는 그를 믿으므로 그 모든 죄가 없어졌습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가 흰 눈같이, 진홍같이 북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졌습니다 (사1:18).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죄과가 도말되었습니다 (시103:12).
둘째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s)는 직임과 관련된 명칭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직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직분에 속한 명칭입니다. 그가 어떻게 사역을 하실지를 알게 하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s, Christ)는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입니다 (단9:25, 행4:27). 구약시대 때부터 '기름부음'(Anointing)은 성령의 임재에 대한 표호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예수님이 맡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임한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예언된 이사야61:1말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한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눅4:18-19). 아울러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은 직책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예수님께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갖고 있는 직임의 특성이 주어졌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마28:18, 히9:14, 요14:9).
예수님은 사역적 특성에서 왕(王)적 특성을 가지셨습니다. 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왕에 국한되지 않고 만왕의 왕이십니다 (계17:14). 만유를 다스리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왕입니다 (고전15:24). 예수님의 왕적 모습은 탄생 때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경배한 모습에서 나타나며,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데서 나타나고, 총독에게 심문받을 때 대답하신 말에서 나타납니다. 그의 왕적 모습은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질병을 고치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고기가 잡히게 한 사건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 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마28:18).
예수님은 사역적 특성에서 제사장(祭司長)적 특성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제사장입니다 (히5:6, 7:17).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대신 제사를 드려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하면 짐승을 끌고 성막으로 왔고 제사장은 짐승에게 손을 얹고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게 한 다음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각을 떠서 제단에 불살라 드렸습니다. 짐승을 대신 잡아 피 흘려 죽게 하면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죄값은 사망이라고 했고,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는 그들에게 있어서 사망(죽음)은 피흘림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고 드린다 할지라도 죄가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더욱이 원죄까지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짐승을 잡지 않고 자기 몸을 드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므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9:11-12).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성소와 지성서 사이에 있는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죄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지시고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마9:2).
예수님은 사역적 특성에서 선지자(先知者)적 특성도 가지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전하는 직분이었습니다. 선견자(先見者)는 계시를 받은 사역이 강조된 이름이고 선지자(先知者)는 계시를 전달하는 사역이 강조된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성품과 사역에 대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진리를 나타내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가리워 졌던 진리가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 사역을 하시므로 다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존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요14:9).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영적으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명을 가졌습니다 (벧전2:9, 계1:6). 왕처럼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해야 하고 제사장처럼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고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성령께서 함께 해 주셔야 하고 자신의 희생과 헌신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Εμμανουηλ)은 요셉에게 알려 준 이름이지만 B.C.800년 경에 이사야 선지자에게 알려 준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7:14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출처 곧 본질적 존재와 관련된 명칭입니다. 그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창세 전부터 하나님으로 계신 분입니다. 미가서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삼위(三位: 세 신격)으로 존재하는 데 우리는 그 삼위를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요한복음1:2-3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2에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1:15-17에도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8:22-31에도 창조자가 날마다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26, 3:22에는 하나님이 창조 사역에서 의논하는 듯한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을 보면 성자 예수님이 성령 하나님과 창조사역에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수신자가 이방인입니다. 헬라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사건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다만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영원 전부터 절대자 혹은 초절자 혹은 지배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에서 사용하는 초절자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가 '로고스'(λογοs)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태초부터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λογοs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말씀'(λογοs)이 육신(σαρξ)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빌2:6-7).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먼저 있었던 자라고 했습니다 (요8:58). 또한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했습니다 (요14:9).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셨지만 그가 보낸 성령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마28:20, 요14:16).
② 이사야7:14 예언의 배경
본문 23절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한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은 이사야7:14의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말씀의 인용이라는 점에서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7:14의 말씀은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왕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앗수르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왕을 책망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에 대한 징조로 한 말씀입니다. 곧 그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왕에게 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백성과 함께 하실 것에 대한 구원사적 예언의 의미를 함께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하스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왕은 왕정시대에 남왕국 유다의 12대왕으로서 요담왕과 히스기야왕의 사이에 있었던 왕입니다. 아하스는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 통치하게 됩니다. 그는 그는 성전의 기구들을 파괴하고 각 성읍에 산당을 짓고 우상 바알과 몰록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서진 정책을 꾀하던 때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앗수르를 저지하기 위해 동맹하고 유다왕 아하스에게도 동맹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거절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스라엘왕과 아람왕은 유다를 공격합니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왕과 아람왕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은을 뇌물로 주고 도움을 청합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서진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빌미를 얻어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람왕 르신을 죽입니다. 그 후에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까지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다까지 공격을 하게 됩니다. 결국 유다왕 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유다도 정치적으로 앗수르의 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왕에게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을 책망합니다. 이스라엘왕과 아람왕이 유다를 공격한 것은 유다 아하스왕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는 차원에서 허락한 것이므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7:14절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가 아하스왕을 책망하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하스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상숭배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므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고 남 유다도 앗수르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상태로 전락될 것을 내다보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 (삼하7:12-16) 때문에 유다 왕통을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처녀)이 아들을 낳아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하기 전에 아하스왕과 유다가 앗수르 수하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멀리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구원사적 예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징조로 처녀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그는 다윗의 혈통을 이은 평화의 왕으로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영영히 세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왕에게 한 말씀은 구원사적 예언으로 성취되기도 하지만 그 원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자를 징계하시지만 절대로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범죄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여 망할 길로 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의 신실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대하시는 사랑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③ 이사야7:14의 '처녀' 논쟁
본문 23절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사야7:14의 인용입니다.
이사야7:14의 '처녀'에 대한 논쟁은 유명합니다. 아마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알마'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 합니다. 처녀와 관련된 히브리어는 '알마'와 '뻬뚤라'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마'는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뻬뚤라'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헬라어는 '네아니스'와 '파르데노스'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네아니스'(νεανιs)는 결혼의 유무와 상관없이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파르데노스'(παρθενοs)는 성적 경험이 없는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7:14에는 '알마'로 기록되었습니다. 70인역(LXX)에서는 '네아니스'로 번역하지 않고 '파르데노스'로 번역했습니다. 본문 마태복음1:23의 '처녀'도 헬라어 성경에 '파르데노스'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는 젊은 여자로 되어 있지만 의미적으로는 처녀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알마'가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관용적으로 처녀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창24:43, 출2:8, 시68:25, 잠30:19, 아1:3, 6:8). '알마'와 같은 어근을 가진 남성명사 '에렘'은 결혼 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더욱이 '알마'가 유래된 '알람'은 남자와 격리되어 순결하게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들에서는 대부분 젊은 여자(woman)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virgin)로 번역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가복음1:34에서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라고 한 상황을 보거나 본문 마태복음1:19부터 나오는 요셉의 반응을 보면 보면 이사야7:14과 본문 마1:23의 '처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정혼과 결혼의 관습을 보면 유대인은 정혼(약혼)을 한 다음 1년 정도 기간을 가진 다음에 결혼을 합니다. 정혼은 오늘날 약혼보다 강한 구속력을 가졌습니다. 정혼을 한 자는 '아내'와 '남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고 (신22:23-24, 본문 19절), 정혼 기간에는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는 과부가 되었고, 정혼 기간에 부정을 저지르면 결혼 기간의 부정과 동일하게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신22:23-24).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혼 기간에 있는 두 사람이 결혼과 같은 법적 구속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혼 기간에는 서로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관계는 결혼식을 하면서 남편이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 이후에 성적 결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갈등하고 관계를 조용히 끊으려 했습니다. 자신이 정혼한 기간에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요셉의 행동은 예수님이 천사의 말대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 처녀인 마리아에게 잉태했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18절).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원죄를 가지지 않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그것은 원죄를 가진 죄인들에 대한 죄를 담당할 수 있는 구속자가 될 자격이 있는 분임을 암시해 줍니다.
④ 요셉의 의로운 행동
요셉은 정혼한 상태에 있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절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하는 표현으로 보아 요셉이 능히 알아차릴 만큼 외적으로 표시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았든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리아와의 정혼 관계를 조용히 파기하려 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양심상 부정을 저지른 사람과 결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마리아가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드러내어 자신이 참 유대인됨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마리아를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율법을 생각하면서 (신22:20-24). 차라리 드러내지 않고 이혼증서만 주어서 관계를 조용히 끊으려 했을 것입니다 (5:23).
요셉은 의로운 자(δικαιοs)였습니다. 요셉은 율법에 대해 공의로운 자였습니다. 평소에 율법대로 의롭게 살았습니다. 유대인답게 살았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아내 마리아를 재판에 상소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인해 임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드러내면 가정이 파괴된다는 사실 앞에 갈등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죽는 것을 원치 않고 그 배 안에 있는 생명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임신하게 한 상대(요셉이 생각할 때)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마리아 집에서 데려오지 않은 상태이므로(결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使者)가 꿈을 통해 나타나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혼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로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은 부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르므로 나단이 다윗에게 그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게 하겠다고 한 사무엘하7:12-16의 내용이 이루어 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그리스도가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 이사야7:14의 내용이 성취된 것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도 알려 주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의 사자가 지시한대로 아내를 데려왔고 그렇지만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는 않았습니다 (24-25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의 잉태 사건을 통해 의로움을 나타냈습니다. 첫째는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 한 것을 보면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존심과 율법에 대한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고 사람을 살리려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을 보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특히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적용된 사실을 알려 줄 때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온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안 다음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넷째는 마리아를 데려온 다음에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제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結言>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오신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족보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아울러 족보 속에서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적 신앙을 가진 네 여인도 암시적으로 소개했습니다.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 예언을 성취한 것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의 관계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의 의로운 행동도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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