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17절
설교제목 : 뿌리
설교자 : 조향록 목사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17)
오늘은 우리 한일교회의 36돌 생일을 함께 자축하면서 이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 우리교회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고 오늘까지 키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으로 이 교회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섬기시기 위해 온갖 수고를 다하신 여러 성도님들과 전임 교역자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헌신과 봉사로 심혈을 다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먼저 가신 선배 성도님들을 더욱 기억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외에는 누가복음 3:23-38절에 있는데, 누가복음 족보와 마태복음 족보는 서로 틀린 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으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마태복음 족보는 민족 조상 아브라함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그 이름도 약간 서로 틀린 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하나는 어머니 계통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계통이라고도 하며, 또 하나는 왕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 계통으로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학설들도 꼭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 성서 속에서 가장 재미없는 대목이 어디냐 하면 바로 이 예수의 족보입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이나 성경을 읽는 분은 이 족보대목에 와서는 슬쩍 뛰어 넘어 그 다음부터 읽습니다. 하나(마태복음)는 \"누구를 낳고 낳고\" 하며, 다른 하나(누가복음)는, \"그 위는 … 그 위는\"하며 위로 올라가도록 쓰여있고, 혀 돌리기도 힘든 이름들은 읽기도 힘들고 듣기도 거북스러운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재미도 없고 거북스런 족보를 왜 하필이연 이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요한복음 21:25에 보면 \"예수의 행한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복음서에는 그 주옥같은 말씀 그 진주 같은 행적에서 추리고 또 추려서 기록했음이 명백한데, 왜 이 재미없고 지루하고 거북스러운 족보를 꼭 기록해 넣어야만 했을까요? 필경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경에서 족보의 신학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족보는 왜 필요했던가?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시니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쓰면 될 일인데,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신이 잉태됐다 하면 그만인데, 왜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필요했으며, 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복음서 기자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파할 목적(kerygma)으로 쓴 이 복음서에 예수님의 족보를 꼭 써야만 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도 옛날 사람들은 자기 조상, 건국 조상, 민족 조상, 종교의 교주 등을 높이느라고 오히려 인간의 혈연전승의 방식이 아닌 알에서 나왔다거나 하늘에서 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느니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그 족보를 기록하여 누구누구의 후손인가를, 즉 그의 인맥의 뿌리를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환상적인 분이 아니요, 철저히 역사적 존재라는 증거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지 환상적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우주만물 중에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구원하시며 계속하여 창조해 가신다는 증거이며, 역사적 사건과 현재적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신앙역사의 뿌리며, 오늘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근거입니다. 족보가 없는 종교는 미신종교요 족보가 없는 신앙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둘째, 이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여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 위대한 인물들이 기라성과 같이 있습니다. 실로 명문귀골(名門貴骨)의 가문이며 자랑스러운 가계입니다. 그런데 또 이 족보에 적힌 이름을 보면, 그 속에는 다말, 라합 등 기생의 이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불륜의 여인, 룻과 같은 이방 여인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혈통만의 역사는 비록 예수님의 족보라고 해도 한편으로 자랑할 것이 있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역사가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혈육을 가진 인간은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총을 입기 전에는 완전함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거의 역사만을 자랑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는 수가 있고,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자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주의자들의 범하는 과오요, 이스라엘 민족과 바리새교인들이 자기 조상 자랑만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오만한 생각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누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 없이는 하나님 앞에나 사람들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다는 겸손이 이 족보의 교훈의 둘째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나는 아무 교회 장로요 집사니까\', \'나는 그만 하면 구원받을 만하니까\', \'나는 목사로 한 평생을 일했으니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누구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은총만이 그를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십자가 속죄의 은총아래 있음을 지극히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이 족보를 보면 셈 종족은 장자 계승권을 철칙으로 하는데, 여기서 보면 장자 계승권을 지킨 것이 아니라 신앙계승권을 지켰다는 점입니다. 역사란 뜻으로 이어지는 것이요, 자식은 부모의 뜻을 받은 자식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서 아담의 맏아들은 가인인데 그는 빼고 아벨 대신에 낳은 셋을 계승시켰고, 아브라함의 큰 아들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인데 순종의 아들 이삭을 계승시켰고, 이삭의 맏아들은 에서인데 하나님과 씨름하여 새 이름을 얻은 차자(次子) 야곱을 계승시켰습니다. 참된 역사란 뜻으로 이어져야 하고 신앙을 계승하는 때야만 그것이 바른 역사 바른 가문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나 그 민족사회나 개인의 가문이나 간에 그 조상의 바른 뜻과 참 신앙이 이어지는 족보, 신앙으로 이어가는 참 역사를 지어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바로 이러한 관점, 즉 신앙 역사적 관점에서 애써 재해석하고 설명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새로운 민족 해석에서 얻은 뜻과 신앙의 결정체요, 신앙과 뜻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권을 이어간다함을 밝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를 뜻과 신앙으로 보는 바로 이 관점에서 철학과 역사의 신학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이삭 된 것, 야곱이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 대를 계승한 것은 그의 신앙으로 이어졌음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신앙으로 이어지는 때 그것이 우리 가문의 바른 역사가 된다함을 인식하고 신앙의 역사를 계승시키도록 힘써야만 하겠습니다.
넷째, 이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서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했으나, 누가복음 족보는 아브라함을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본래 유대 민족은 선민사상을 가져 매우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소수민족이었습니다. 이방인 이방 민족은 자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다른 민족과는 혼인도 하지 않았고, 혼인을 했을 때에는 죽이기까지 했고, 또 다른 족속들을 때로 씨도 남기지 않고 진멸(殄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족보의 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는 예수님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인류의 시조 아담에 이어졌다는 것, 즉 우리는 모두 인류 공동체의 일원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인간은 색깔, 언어, 지방, 민족, 국가 간의 장벽을 쌓고 \'나와 너는 다르다\'는 남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남은 적이라는 생각에 굳어져 있는데 여기 이 족보를 기록하는 신앙사상을 실로 위대하고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한 부모의 피를 받은 한 형제자매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보수적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인류보편의 국제주의를 따르며, 지방색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 즉 이 지구상의 교회는 하나요, 하나의 교회로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교회일치의 최고의 이상은 인류의 일치, 즉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한 부모요 형제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사는 인간 가족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지방색 남녀차별 등 모든 차별과 장벽을 철폐하고, 그것들이 반 기독교적 요인임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오늘 세계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인류의 적대감과 전쟁 대결을 풀게 하고, 화해를 조성하고 평화를 증진시키며 사랑과 협동의 국제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 족보는 아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맨 나중에 그 이상을 하나님으로 끝냅니다. 즉 이 족보는 그 제1 선조를 하나님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민족 어느 가문이 자기가문 자기 민족의 제 1선조를 하나님으로 한 가문이나 민족이 있습니까? 실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그때부터 그는 그의 가문의 제 1선조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하나님의 자손으로 그 역사가 새롭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문에서 처음 믿은 교인은 그 가문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며, 2대 교인은 이삭이요, 3대 교인은 야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 1선조로 모신 가문과 민족은 이미 그 뿌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과 창조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이며, 그 뿌리에서 나오는 축복의 진액을 받아 싹을 내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에 보면 예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가 56대요, 하나님까지 넣어서 77대가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77을 완전 수라 합니다. 그러니 이 족보의 뜻은 인간이 아무리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 다윗과 같은 건국의 조상이 있다 해도, 그것은 절반을 약간 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은 아무리 신앙인이요 종교적이라고 해도 인간 역사에는 하나님이 첨가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인간이 아무리 유명한 학자요 성인이라 해도, 거기에 하나님이 첨가되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고 영웅호걸로 점철되었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적 문화와 역사라 해도 거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첨가되지 않으면 완전한 역사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분에 의해 진행되고 그분에게로 좇아가는 하나님 중심주의에 서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임을 분명히 확인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사고나 행위나 우리 존재 자체나 목적이나 우리 생의 의미에 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완전치 못하다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한 가문의 역사에 하나님이 제1 선조로, 한 민족의 역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때부터 그 역사는 온전한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8:20절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축복이 기독자가 받은 축복 가운데 최고 최대의 축복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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