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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17절 성탄의 뿌리 - 김광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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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태복음 1장 1-17절
설교제목 : 성탄의 뿌리
설교자 : 김광선 목사님

설교 준비가 잘 된 주간은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내가 은혜 받은 말씀을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감이 주일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설교 중에서 가장 어려운 설교가 절기 설교입니다.

성탄절에 관한 성경의 본문은 한정이 되 있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아마 성탄절 설교를 50번 이상 했을 것입니다.

같은 설교를 반복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올해도 한 달전부터 성탄절 설교를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태복음 1장을 읽다가 놀랄만한 성탄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기 한달 전부터 상점과 호텔, 음식점에는 크고 작은 산타 할아버지와 썰매 모형물들, 예쁜 방울들과 별들, 그리고 꼬마전구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츄리같은 장식물들이 눈에 띕니다.

마치 이런 이미지가 성탄절인 것처럼 마음을 점령합니다.

교회마다 성탄절 이브 행사로 바쁩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그 옆에서 지긋이 보고 서 있는 요셉, 큰 별을 보고 멀리 동방에서부터 낙타를 타고 오는 동방박사들, 들에서 한밤중에 양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 탄생을 알려 주는 천사들은 빼 놓을 수 없는 연극의 소재들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새벽송’역시 성탄절의 단골손님입니다.

한국의 12월 말이 얼마나 춥습니까?

그 추운 한 겨울 밤새 새벽송 돌면서 교인들 잠 못 들게 하고, 새벽송 끝나면 장로님 댁에 가서 얼은 몸 녹이면서 게임하고 아침에 떡국 먹고 성탄예배에 가면, 얼마나 피곤한지 졸음이 밀려오는데 정작 중요한 성탄예배를 거의 절반 이상이 졸면서 비몽사몽간에 드리곤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탄에 대한 기억들입니다.

여기에 장사꾼들이 성탄대목을 보기 위해 상업적인 성탄절로 만들어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성탄절은 선물을 돌리는 날, 그리고 놀고먹고 여행가는 휴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탄의 분위기는 기독교의 진리가 집대성 된 성탄의 본질과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탄의 본질을 잘 알고 다가오는 성탄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I. 창세전에 언약된 성탄

성탄절은 이천 년 전 저 유대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성탄을 계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대표적인 인물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 기록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위는 노아고 노아의 위는 셋이고 셋의 위는 하나님이 첫 번째 창조한 사람 아담까지 거슬려 올라가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전 인류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 하실 때 이미 둘째 아담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실 성탄을 계획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2-14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오실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들기 전부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여 택한 자들을 구속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창세의 계획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허용하신 것이라는 것에 연구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허용 정도가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작정 섭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것이라면 선악과를 애초부터 안 만들었으면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것이라면 왜 선악과를 가장 많이 왔다 갔다 하는 통로인 동산 중앙에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차라리 동산 가장 끝 보이지 않는 위험한 절벽에 만들어 놓았다면 아담이 따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담이 선악과를 다 먹지 않는 것이라면 선악과의 모양을 흉측하게 만들어 놓으면 될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보는 순간 입맛이 떨어지고 만질 때 날카로운 가시가 박히게 만들었다면 따 먹을 생각조차 안할 텐데 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뱀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게 만들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께서 아담을 한국 남자로 만들었다면 뱀이 정욕에 좋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보는 즉시 잡아 뱀탕을 해 먹었을 텐데 아니었잖아요.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어떤 우연한 사건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그의 전능하심과 영원한 예지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벌레 한 마리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짐승의 발에 밟혀 죽는 것 역시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통치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기 중에 먼지 하나 이동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 쉬고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것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심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을 사단이 찾아와 타락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단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망가뜨릴 수 없습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사고치고, 사단이 사고 치면 깜짝 놀라 뒷수습이나 하는 그런 무계획적이고 무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이 타락할 것을 계획하시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존재 본질을 알게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저나 여러분들 가운데 죄인 이고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의와 거룩을 열망하지만 실제 우리의 속은 온갖 부정과 부패로 물들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번번히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실제에 대해 절망하고 비통해 합니다.

이 모든 비극은 우리의 시조 아담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근본적인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내 의사와 상관이 없이 죄인이 된 것처럼 내가 의인 되는 것 역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6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심을 받은 결과 회개하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결과 이 땅에서 예수 믿어 의인으로 사는 것이고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쓸데없는 수고를 하시느냐?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스토리는 이 사실을 실감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살고 있고,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스토리의 분위기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뜻대로 빨리 죽어주지 않자 미리 유산을 달라고 할 정도의 탕아였습니다.

그가 탕자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유산을 받은 즉시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탕자의 기질로 인해 그는 그의 집에 있는 가족들과 종들에게도 무자비하게 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뜻대로 재산을 주어 나가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탕자를 잘 알았습니다.

집을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아버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가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예견대로 탕자는 나가자마자 허랑방탕하여 술과 여자와 쾌락으로 재산을 다 날려 버렸을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지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흉년까지 겹쳐 노숙자로 굶어 죽어갈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원하던 목표였습니다.

아버지의 예견대로 탕자는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맞아 줍니다.

그를 불쌍해서 맞아 준 것이 아니라 원래 아버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옷을 다시 입혀 주고, 아들의 반지를 다시 끼워주고, 아들의 신발을 다시 신겨 주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입니다.



탕자는 그 날 이후로 참 아들이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어떤 집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아버지의 집에 사는 것이 얼마나 복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1장 30-32절에,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신 이유는, 타락을 허용하신 이유는, 죄를 지어도 가만 두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속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여 은혜로 살게 하시려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며 칭찬한 인물이 있습니다.

성군 다윗입니다.

언제 다윗이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까?

기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믿음이 충만할 때?

뭔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성취했을 때?

아닙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이 있은 후에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밧세바와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 회개한 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 때 하나님께 이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의인이란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탕자를 집을 나가게 했고, 아담의 범죄를 허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오직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게 하시려고 예수를 보내신 창세 전의 계획인 것입니다.



II. 언약대로 이루어진 성탄

마태복음 1장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놀라운 족보의 기록입니다.

소위 ‘도통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았다!

핵심을 알았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전체를 꿰뚫고 지나갑니다.

마태복음 1장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입니다.

일부 어떤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을 전혀 다른 책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은 구약성경 전체를 끌고 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탄을 계획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세상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돋보기에 빛을 모아 한 곳에 모으듯이 세상 역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점으로 BC와 AD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창22:17-18에,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단을 꺾고 온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네 씨가’ ‘네 씨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3:16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신 약속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에게 세 가지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자손과 땅과 통치’의 축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다스리라”(창1:28)고 했습니다.

언약하신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년부터 구르가온교회에서는 ‘성경필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체를 노트에 쓰는 것입니다.

한 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유행을 했었습니다.

읽는 것 보다 쓰는 것이 더 정성이 들어가고 집중이 되고 은혜가 되겠죠.

하지만 아무리 많이 읽고 쓰더라도 핵심을 모르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르가온교회 김진출 안수집사님은 인도에 와서 성경전체를 네 번 타이프를 쳤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직한 고백은 타자 실력은 많이 늘었는데 깨닫는 것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핵심을 모르면 그렇습니다.

핵심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재미없는 것입니다.

안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난 몇 달간 갈라디아서 강해 설교를 들으면서 핵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 어디를 읽어도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도가 통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조부들에게 하신 삼대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을 나열한 것입니다.

홈 페이지에 설교 전문이 올라가 있으므로 여러분들은 다시 메모를 해서 성경의 전체 구조와 핵심을 꼭 숙지하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뚜벅 뚜벅 걸어서 내게 오신다“는 영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버리고 인간 철학을 의지하고, 심리학을 의지하고, 저급한 신비주의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이처럼 한국교회가 혼란스러워 진 것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민수기 30장까지는 ‘자손’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야곱의 76명의 가족이 수백만명으로 불어 나는 과정을 기술했습니다.



민수기 31장부터 사사시까지는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심으로 국가를 세우게 하시는 과정을 기술했습니다.



룻기에서 에스더까지는 ‘통치’에 대한 약속의 실현 과정입니다.

다윗 왕국을 통해 통치를 실현합니다.

욥기에서 아가서까지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시편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잠언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전도서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비성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는 예언을 통해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을 기술한 것입니다.



구약에 계시된 삼 대 언약을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어질 영원한 삼 대 언약에 대한 표상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게 될 것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려고 택한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언약을 성취하신 내용입니다.

그 성취 방법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사역과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사역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는 예수님은 직접 오셔서 자신이 바로 언약의 성취인 하나님이 아들 메시야임을 직접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설립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까지는 교회를 진리로 양육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빌레몬서 까지는 교회를 진리로 무장시킴으로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유다서까지는 교회의 투장으로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최후 승리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탄은 언약하신대로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약속실현인 것입니다.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때 지금 나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이 삼 대 언약이 이루어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 땅에서 이 삼대 언약을 이루십니다.

‘자손’ ‘땅’ ‘통치’의 축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누리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잘 되게 하십니다.

자녀들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직장과 사업을 통한 물질의 축복을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되기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리더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삼 대 성취들은 영원한 축복에 대한 예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망해야 할 것은 영적인 삼대 축복입니다.



1. 자손 : 나를 통해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비전입니다.

2. 땅 :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선교가 이루어지는 비          전입니다.

3. 통치 : 성령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살게 됩니다.

          하늘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언약대로 이루어진 성탄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언약들은 지금 내게 이루어지는 언약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된 것이며, 놀라운 축복인지요!

성탄이란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III.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계시된 성탄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이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어떤 식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원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했던 당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여자가 족보에 들어간다는 것이 놀라울 일일뿐더러 더 놀라운 것은 블란서의 잔다크나 우리나라 유관순처럼 어떤 위대한 일을 한 여인들이 아니라 문제 많은 여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다말, 라합, 롯,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3절에 보면 다말이라는 여인나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은 여인입니다.

5절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은 여리고성에서 기생일을 하던 여인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굉장히 얌전한 번역입니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매춘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절에 라합과 함께 나오는 또 하나의 여인이 있습니다.

룻입니다. 

룻은 다른 여인에 비해 아주 현숙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압이라는 이방여인입니다.

모압사람들을 유대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개처럼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실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야의 아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는 밧세바입니다.

다윗과 간통한 여인입니다.

하필이면 그 여인이 낳은 아들 솔로몬이 다윗 왕국의 후계자가 됩니다.



보통 인간의 기준으로 보아도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이 황금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정말 의아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혹시 마태가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족보를 기록했을까요?

사람들은 자기의 과거 상처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런 추하고 어두운 일들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을까요?

마태는 이 족보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이 족보에 기록된 인간들의 모든 죄를 다 짏어지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비록 어두운 과거나 상처가 있다할지라도 예수께서 그것을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며칠 후에 다가오는 성탄절의 뿌리와 본질을 알고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히 왕을 뵈옵는 마음과 경배할 예물을 가지고 합당하게 성탄절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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