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1장 1-17절
설교제목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설교자 : 윤석준 목사님
서 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입니다. 이 문구는 마태복음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전체 복음서의 시작문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약성경 전체를 시작하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이 문구가 복음서의 시작이요, 동시에 신약성경 전체의 시작이라는 말은 곧, 이 복음서와 신약성경 전체가 사실은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신약 시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라고 특징지어질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 모든 초점이 예수님께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신약성경을 펼칠 때 제일 먼저, 이 책들의 주인이시며 모든 구속역사의 성취자이신, 우리 주님의 족보를 만나게 됩니다.
왜 신약성경의 첫머리에 족보를 기록했을까?
그런데 왜 성경은 신약성경의 제일 첫머리를 족보로 시작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창세기나 다른 구약의 족보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족보는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기점 역할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신약성경의 시작 부분에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부터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신약’시대는 그 이름에서부터 ‘구약’시대와 다르듯이 새로운 시대입니다. 성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린다”라는 점을 족보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래서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점은, 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성격은 이 족보를 소개하는 첫 문장에서 과연 누가 언급되었느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인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단 일반적인 점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언급되었을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볼 점들이 참 많습니다.
1) 아브라함 : 일단 일반적인 점에서 생각해 보자면 아브라함은 소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들만의’ 조상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 이삭 쪽만이 이스라엘이 되었고, 서자였던 이스마엘은 보통 아랍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죠. 야곱의 형제로 에서도 있습니다. 에서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된 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기원으로 하는 열 두 지파들 뿐입니다. 민족적으로만 보자면 이스마엘 계통과 에서의 계통들의 조상도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이 언급된 것이 단순히 ‘민족의 조상’을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 족보가 씌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단순히 민족의 조상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첫 시초가 된 인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물론 셈의 후손들이 믿음으로 살았지만, 아브라함은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세상 제국에 대항하여 하나님께서 ‘신인류’인 교회로 부르시기 위하여 특별히 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특별히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조상”(롬4:11)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을 특징짓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18절) 의로 여기심을 받은(22절)” 기독신앙의 대표자....로 인식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이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언급이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믿는 자의 조상을 통해서, 즉 믿음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실 수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믿는 자’였던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끈’을 통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어떤 도구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의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절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문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어떤 도구를 통해 오시는지를 발견합니다.
2) 다윗 : 그러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을 보여준다면, 다윗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으로 언급된 이유는,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왕’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은 사울이었죠. 이스라엘에서 다윗이 가지는 위치는 단순히 ‘처음’이라거나 ‘성군’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주고 있는 다윗의 지위는 가히 독보적입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13:14; 행13:22)이라고 쓰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로보암’이 이후 악한 왕들의 표본이 되었듯이 다윗을 왕의 모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9장 4절, 5절 같은 곳에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실 때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면...그 왕위에 오를 사람을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말씀의 뜻은 영원히 주어질 왕위가 ‘다윗의 후예’일 것이란 말로써 이런 말의 뜻에 의하면...이스라엘 나라의 왕은 실은 다윗의 뒤를 이은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윗은 ‘왕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시대가 지나면서 “이후에 오시게 될 진정한 왕이신 분”에 대한 기대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슬픔과 고통의 역사였고, 열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리저리로 휘둘리는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진정한 왕’을 보내셔서 실로....‘우주적 구속’을 완성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장차 오실 참 왕’의 기대는 중요한 성경의 주제이고......그래서 이러한 장차 오실 왕은 주로 이전 왕들 중 가장 이상적 왕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을 닮은’ 왕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에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자”(사11:1)일 것이며, “다윗에게서 나는 의로운 가지”(렘33:15; 23:5)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꼐서 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했던 것은 이런 선지서들을 통해 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만 보아도 9장, 12장, 20장 등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마태복음 1장 1절의 말씀을 볼 때, 그분께서 진정 자기 백성들을 위한 참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을 처음 여는 구절이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모든 자들의 표상’이시며, 또한 그러한 모든 자기 백성들의 ‘왕 되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실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한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언약의 성취자 그리스도
오늘 말씀에 보시면 분명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는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로는 ‘마쉬아흐’,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메시야’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 ‘마쉬아흐’이고....같은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생각하자면,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직분자들에게 행하는 일이었으므로 예수님께 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예수님께서 ‘왕’이시거나 ‘제사장’이시거나 ‘선지자’시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이보다 더 넓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란 이렇게 단순히 ‘기름 부음을 받은 직분자’의 의미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기름을 붓는 일이 직분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지는 분에 대한 종말론적인 기대가 증가되었습니다. 결국 오실 마쉬아흐, 즉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로 통치하는 궁극적인 왕이실 것이라는 생각이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 예를 들어 시편 18편 50절 같은 곳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마쉬아흐’, 즉 ‘그리스도’시지만.....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이 왕은 단순히 “한 왕이 세워질 것이다”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장래에 대한 대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시편 2편에서도 그렇습니다. “열방들이 분노하며 허사를 경영할 때”(1절), 하늘에서 웃으시는 하나님께서(4절) 세우신 진정한 왕(6절)은 이 시편에서 “기름 받은 자”, 즉 마쉬아흐, 그리스도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편에서 ‘마쉬아흐’는 단순히 ‘한 왕’이 설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성취하실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신약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직분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장차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속하실 의로운 통치자이신 분”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언약의 성취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오실 메시야께서 어떻게 사람 아브라함과 사람 왕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아브라함의 자손?
이런 생각은 성경에서 온 것입니다.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말씀은 창세기 14장의 사건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이 점을 말합니다. “조상 아브라함은 노략물 중 좋은 것을 취하여 십분의 일을”(히7:4)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사건을 히브리서는 해석하기를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7절)고 하였습니다. 즉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으므로 멜기세덱이 더 크고 높은 자라는 뜻이지요.
실로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영원히 제사장으로 있는 분”(3절)이라는 신비한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안에서는 제사장이 레위 지파인데, 이 레위 지파도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어서(10절),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에게 예물을 바쳤다(9절)고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도 이 ‘영원한 제사장’에게 예물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바로 앞장인 6장 20절에 보면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즉....히브리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라는 점입니다. 7장은 사실 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멜기세덱의 예를 들면서 ‘이스라엘이 모든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모든 아버지 아브라함조차도’ 그분 그리스도께는 머리를 조아리며 예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는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께서 오늘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분께서, 아브라함이 머리를 조아리며 예물을 바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까요?
2.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부터 46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읽음)
* 44절의 “주께서 내 주께”는 두 ‘주’ 때문에 혼란을 줄 수 있는데...시110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오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런 것보다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분이라는 차원에서 이 질문을 응대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성경을 들어 그들의 짧은 성경이해를 질타하시고, 이 사실을 그대로 반박하십니다.
주님께서 예를 드신 성경은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던 사실을 언급하십니다. 그리고는 물으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5절)
이 말씀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보면 성경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명백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도 다윗의 자손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다윗의 자손도 아니다....하지만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성육신, 자기 비하
우리가 이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다”라고 하는 성경의 구절들을 찾고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읽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는 우리가 앞서 살핀 대로 “그분이야말로 믿음을 통해 오시는 진정한 왕”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 ‘믿음’과 ‘왕’이 드러난다면,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시편 2편에 언급한 대로 “열국을 철장으로 심판하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겨우 인생일 뿐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기록된 점에서 비참함을 읽습니다. 차마....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후손 정도가 되실 수 없는 분이신데, 실제로 그렇게 후손으로 오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왕의 하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논법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왕되심’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도 좋고 훌륭한 교훈입니다. 하지만.....동시에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도’, ‘다윗의 후손도’ 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땅 위에 어떤 인간들의 후손으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비참함도 함께 읽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족보의 아이러니입니다.
더러운 족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뿐만이 아닙니다. 족보를 유의하여 보셨습니까?
이 족보 안에는 더럽고 추잡한 일들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고대 근동 국가들의 역사 기록의 특징은 자기 나라의 수치와 비참은 기록하지 않고 위대한 업적만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고대 근동 뿐만이 아니라, 현대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까발려서 자기 민족과 국가의 수치를 커다랗게 써놓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족보를 한 번 보십시오. 저자 마태는 성령님의 영감을 통해서
- 며느리와의 불륜, 그것도 창녀인줄 알고 음행을 했던 유다의 이야기(2절)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 더러운 음행의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들 중 성군이라 추앙했던’ 다윗에 대해서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왜 족보는 그 많은 다윗의 치적은 모두 묻은 채 ‘남의 아내를 가로챈 비열한 왕’으로 다윗을 그리고 있을까요?
- 11절 이하에는 이스라엘이 정말 파묻어 버리고 싶은 바벨론 포로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외국 나라들에게 포로로 끌려간 이야기를 버젓이 적고 싶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점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 ‘더러운 족보’를 통해서 태어나셨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지만, 사실상 주님의 족보를 훑어보면...주님은 단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던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과 ‘음행’과 ‘간통’과 ‘전쟁포로’로 얼룩져 있는.....더러운 역사를 통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들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이 모든 사람들을 ‘그분의 조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겸허히 ‘그들의 아들’로 태어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인간들의 죄악된 역사를 고소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제3자가 아닙니다. 혹여 모르겠습니다....성부 하나님은 제 3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인척’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패하고 더러운 조상의 이야기는 제 3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육하기 전에는 제 3자의 이야기 였을지도 몰라도.....성육하시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이 사실을 다 지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서, 동시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가?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면서, 동시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원하여 짊어지신 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영광을 입은 그대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교리문답 제 6주일 16문답이 대답하듯이, 중보자가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친히 이 짐을 자원하여 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구를 바라볼 때, 이 어구의 낯선 불일치,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어떻게 인간의 후손이실 수 있는지....에 대한 이 불일치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발견해야 합니다. 치욕과 더러움으로 칠해져 있는 족보를 바라보면서 그 인간의 더러움과 아픔을 짊어지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정 리
요즘 공부를 위해서 철학책을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설명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다.”
물론 이 말은 성경에서 철저히 기초했다기 보다는 철학자의 철학 논리 가운데서 나온 말입니다. 하지만....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이러시다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라이프니츠의 말을 제 식으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 세계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하나님께서 지극히 선하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예전에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지나친 의만 요구하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단순히 엄격하기만 한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이 세계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단순히 법의 엄격성만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라면, 아담이 첫 범죄를 행했을 때 공정하게 저울추에 얹어, 처음 언약하신대로 모든 세계를 폐기처분하셨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유지하셨고, 아들을 보내셔서 이 인간들이 행했던 죄를 청산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야말로....참으로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기록을 읽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주님께서 실로 얼마나 큰 자기 비하를 통해 인류를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비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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