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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 - 김영하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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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1장 1-17절
설교제목 :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의미
설교자 : 김영하 목사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의 족보를 읽다가 성경을 덮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생소한 외국인의 이름에 질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족보의 의미를 바로 깨달으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1.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는 왜 다른가?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래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 속에서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인이나 병자들 가난한 자들과 같은 소외계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누가는 여인들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독자가 데오빌로 각하라고 되어있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자신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읽혀지기를 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절)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아브라함 이전까지 추적하지만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족보를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는 유대인들을 자신의 독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자신들의 조상인 만큼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단군을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태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제사장 집안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마태가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써 그 당시 사회상황을 누구보다 더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는 다짐도 여러 번 하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양심이 있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 청년 예수가 나타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라 다닙니다. 분명히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Chanel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보니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세리 일을 정리 하여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로마의 세금 정책이 너무나 야비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악랄한 정책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던 차에 예수님이 자신의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들려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태는 미련 없이 자신의 직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양심의 자유를 얻는 진정한 자아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봅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면서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 출세하고 싶다는 명예심, 재력이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이기심, 여기에 민족도 없고 양심도 없고 체면도 없었습니다. 동족이야 죽건 말건 자신의 삶의 목표는 거짓 자아가 이끄는 대로 맡겼습니다. 예수님의 방문(마9:10)은 마태에게 쓰나미와 같은 폭발력을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거짓 자아가 부서지는 사건입니다.

뜨거운 불속에서 순금은 순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를 예수님에게 둔다면 아무리 용광로 같은 어려움이 온다하더라도 그 신앙은 더욱 순수해집니다. 병이 들면 육체를 의지하지 않기에 더욱 영이 맑아집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가져가시니 찬양하리로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신앙이 됩니다. 어려움과 핍박은 신앙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자녀들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욥은 하늘나라에 갔으니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욥은 몸에 병이 들어서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기초를 하나님께 둔 사람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시험이 오면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진정한 자아를 찾고 멋있는 마태복음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만약에 마태가 자기의 욕심대로 세리의 직책을 지켰더라면 일생은 많은 부와 안락을 누리고 살았겠지만 평생을 동족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양심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서 결단을 내렸을 때 그의 삶은 청사에 길이 빛나고 영원한 천국에서 기쁨으로 사는 행운아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면 우리에게도 놀라운 도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자신의 동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멋있는 복음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천국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것을 결심하십시다.

이번 금요일 날 학생들과 함께 천동초교에서 축구를 배우고 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국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축구를 하다말고 좇아갔습니다. 한국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디서 왔느냐? 미국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질문 공세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영어 예배에 오라고 했습니다. 마침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왔더군요. 한국에 온 지 2개월이 되었구요. 날더러 영어를 perfect하게 구사한다고 칭찬을 하더군요. 미국인이 인정하는 영어를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잘한다는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학생들이 날더러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어떻게 모르는 사람한테 접근을 하느냐 하면서 신기해 합니다. 그러나 신기할 일도 특이한 일도 아닙니다. 전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1945년 7월 일본 총리 스즈키 간타로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공식적인 발표는 연합국측이 공식 채널을 통해 최후통첩을 할 때까지 미루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 때까지 시간을 벌어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에 대하여 일본 내각은 모쿠사츠(묵인)의 입장을 견지한다고 모호하게 답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취지는 답변을 당분간 보류한다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모쿠샤추(묵인)란 ignore(무시한다) or no comment (언급을 삼간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언론과 라디오 그리고 Tokyo의 영어방송은 포츠담선언의 거부로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3일 만에 Truman 대통령은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였고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됨으로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람의 한마디 말이 얼마나 중요하며 잘못되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여론을 부글부글 들끓게 한 쇠고기 수입협상도 영어를 잘못 이해하는 오역 때문입니다. 1975년 2월 중국 랴오닝성 하이청에서 거위가 날아다니고 겨울잠을 자던 뱀들이 기와 나왔습니다. 지진 조짐이라고 보고 100만 주민을 대피시켜서 2-3일 뒤에 일어난 7.3의 강진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7월엔 탕산에서 잠자리와 새 수만 마리가 떼 지어 수백 미터를 날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눈 여겨 보지 않고 있다가 며칠 뒤 대 지진이 발생하여 27만명이 죽었습니다. 이번 사천 지진도 이미 두꺼비들이 수백만 마리가 사람들의 발에 밟혀죽고 차에 치어 죽으면서도 한 방향으로 모두 피신한 사건을 주민들이 불안해하였지만 당국은 산란기 이동이니 환경이 좋아졌다는 소식이라고 반겼다고 합니다. 자연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종말의 때는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우리는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하면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태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을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오해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이냐 영원한 천국이냐 중요한 기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태의 생애를 보면서 깨달았으면 합니다.

2. 왜 다섯 여인이 등장하는가?

마태는 예수님이 왕으로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명예의 전당인 예수님의 족보에 형편없는 여인들을 등장시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쓰레기 같은 자신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니 이렇게 멋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서까지 쓰는데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지 않는 여인들의 믿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나오는 여인은 다말이라는 여인입니다. 유다 집안에 메시아의 계보가 연결된다는 것을 안 다말은 자신의 태를 통해서 메시아를 낳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첫 남편 엘이 자식도 없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오난과 관계를 맺지만 씨를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난이 악하다고 죽여 버립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서 결국 씨를 받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조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만 여기서 다말의 신앙을 봅니다. 즉 자신의 태를 통해서 메시아를 낳겠다는 신앙 말입니다.

둘째 여인은 기생 라합 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기생 라합은 손님들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삽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고 매일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바산과 옥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살려 보냈습니다. 자신의 동족과 친척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겠다는 믿음의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는 인정이나 사정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인은 룻입니다. 룻은 아무 소망이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오는 모압 땅에서 태어난 이방여인입니다. 엘리멜랙(여호와는 나의 왕)가정에 메시아 라인이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끝까지 나오미는 좇아갑니다. 그래서 나오미 가정에 가까운 친족 보아스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가 나옵니다. 물론 족보에 바세바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아의 아내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장군의 아내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메시아 라인을 잇겠다는 믿음을 가진 여인이라고 해석해 봅니다. 다윗은 많은 아내가 있었고 후궁들도 있었는데 왜 남의 아내를 범하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지만 바세바의 믿음의 계략에 빠진 것이라고 봅니다.

마지막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죽음을 무릅쓰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여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최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는 여인들이 명예전당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 이 여인들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3. 낳고의 반복되는 의미는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면서 “낳고”라는 이야기가 반복하여 나오니 금방 지루해집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탄생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인의 결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과 피 흘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숙연해집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피 흘리는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나를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와 계획과 섬세한 보살핌에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4.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미운 오리새끼, 루이 17세, 라이언 킹, 신데렐라, 콩쥐 팥쥐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진 우리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라고 봐야 합니다.

융은 페르소나(persona)가 사람의 영혼을 가리고 있다고 봅니다. 즉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쓰고 다니는 이 가면은 어느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규정되어있는 자아상에 적응하고자 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면은 실제의 자기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라는 것입니다. 그 가면 아래는 그 사람의 경험적인 존재인 자아 곧 에고(ego)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에고의 의식 속에는 지각, 아이디어, 기억, 생각, 감정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에고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지 못하면 악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살아가든지 옆으로 도피하는 히키코모리 인생, 아니면 교만의 사슬에 매이든지 불법 시기 질투 탐욕 우상숭배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persona에서 벗어나서 참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참 자기는 자기의 원천인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지만 거짓 자기는 자기 영혼을 잃고 외부의 복을 쫓아다닙니다. 이것이 불행의 요인이요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로 받아들였을 때 족보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삶을 살게 되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태를 변화시킨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나를 변화시켰고 마태처럼 인생을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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