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1장 1-17절
설교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
설교자 : 송다니엘 목사님
공관복음서(마태, 마가,누가)는 보통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도입, 초기 사역, 후기 사역, 수난, 부활. 마태 복음도 이에 따르는데, 1:1-4:11까지는 도입 부분, 즉,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세례를 다루고, 4:12-11:1까지는 초기 사역을 다룬다.
마태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는 그의 구속사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자주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사역 안에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가리켰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14)와 비슷한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계획하시고 예언하신 구원에 대한 약속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므로 그는, 믿는자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구원의 복음 역사가 이 세대(아이온)가 끝날 때까지(마 28:20) 펼쳐진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마태는 우리에게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무엇보다 마태는 자신이 교사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교사와 성경의 가르침은 그에게 중차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이 구약을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단지 교사만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 즉 전체의 구속사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참조: 11:29; 13:52; 23:8 이하; 23:34; 28:20).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도 교사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I. 제목(1:1)
우리는 본 복음서를 마태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교회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복음이란 하나밖에는 없으므로 마태가 전한 복음서라고 하는 것이 옳지만, 간단하게 마태복음이라고 부른다. 즉, 복음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복음인데, 네 명의 기자가 같은 것을 기술했으므로 복음이 4가지 모습이 있다고 하면 좋겠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무엇이라고 명명했을까? 그는 바로1절에서 다음과 같이 명명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
개역개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NIV, KJV도 개역개정과 같다. 물론 „역사책“이라는 말은, „기원의 책“(족보, 계보)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맥과 복음서 전체의 구상으로 볼 때에, 이 번역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책[1]이라고 한다.
이 짧은 제목은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된 것이며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이며, 그 중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이 이 구속사에서 가장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마태는 1절에서 아브라함-다윗-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함으로써 지금 구속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구약을 연결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즉,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떻게 완성되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창 3:15에 약속된 여자의 자손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구원 사역을 이루었는지를 나타냈다. 그는 간접적으로 자신이 지금 성경을 기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책 제목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책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하는데, 구약에 따르면 그분은 세상의 마지막에 오실 구속자요 구원자이시다. 마태는 이것으로써 구약이 기대하고 예비하라고 가르친 그분,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 5:39를 보라!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과 „아브라함의 아들“로 소개하는데, 단순하게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이기 때문에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므로, 이곳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것은 짧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아들“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메시아적 칭호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마 9:27; 12,23; 15:22; 21:9,15; 22:42ff). 그러므로 마태는 이곳에서 두 개의 메시아 칭호를 연결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스라엘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시아 칭호가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는 단지 이곳에서만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러므로 마태는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이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창 12:3; 18:18; 22:18; 참조: 26:4; 28:14; 행 3:25; 갈 3:8ff). 그러므로 마태가 벌써 제목에서부터 밝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한 약속된 축복(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창 22:18의 말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에서 네 씨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사도는 갈 3:16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구약에서 빈번히 약속된 메시아이시면서, 또한 특별히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방인을 포함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메시아시라는 것을 마태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써 전체 복음서의 구상이 그 윤곽을 드러냈다. 즉, 이 복음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열방의 구원인 예수님에 대해 보도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일관성 있게 예수님의 선교명령까지 보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이렇게 구원의 복음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했는데, 마태는 이 말을 무슨 의미에서 사용했을까? 전체 28장은 예수님 생애 전체를 기술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을 선별적으로 기술했다는 의미이다. 고대 교부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정확하게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먼저 윤곽을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했다. 아무튼, „복음서“는 예수님의 단순한 생애 기록이나 말씀 모음집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최대한 드러내고, 인간의 구원에 관계되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보도에는 오류가 없을까? 오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어 기록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그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지도하셨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 기록은 절대적으로 신빙성이 있다.
그 외에도 그는 그의 삶의 목격자이다. 그는 예수님과 동거하고 그분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직접 듣고 보았다. 그는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수없이 보고 듣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이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귀중한 고백이 들어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신 것이다. 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원시교회의 경배의 중심이 되고 예배의 중심이 되셨다.
성경비판학에서 지상의 예수와 승귀된 예수님을 구분하는데, 이곳에서는 지상의 예수님은 누구인지 잘 알 수 없다고 하거나 그가 누구였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즉, 예수라는 자가 누구인지 크게 상관이 없어도 우리는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경배하면 된다고 한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이 말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무 의미도 없는 이 말을 소위 과학적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석학들이 신학대학에서 만들어낸 이론이다. 서구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을 받아들여서 기독교가 도깨비를 숭배하는 이상한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환상을 본 것도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 비로소 자신이 익히 알고 있었던 구약의 약속,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 모든 것, 즉 그분의 탄생, 삶,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전환점이 일어났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우리를 이러한 역사의 전환점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우리는 떨리는 심정으로, 또한 큰 기대를 가지고 그가 기록한 역사, 땅에서 인간으로 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보고자 한다.
II. 예수님의 기원 (1:2-17)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기원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1절과 연결시키므로,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족보)“로 해석하고 2-17을 족보의 내용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는 1절을 마태복음 전체 제목으로 보았으므로, 1절과 2-17을 분리하여 이 본문을 계보가 아니라 기원으로 본다.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가 되기가 어려운 이유는, 예수님의 가족 계보가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부분적으로는, 단지 매우 중요한 인물만 언급했을 뿐이다. „...의 아들“, 혹은 „낳다“라는 말도 꼭 좁은 의미에서의 „아버지 – 아들“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후손임을 나타낸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벌써 1절에서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아들“, 혹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불렀다. 예수님과 그들 간의 사이에는 거의 1000년, 2000년의 격차가 있다.
좀 어려운 문제는, 마태의 가족 계보와 누가의 것(3:23-38)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누가는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아담 및 하나님으로까지 올라간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내려온다. 밑으로 내려오는 족보는 전형적으로 히브리적이다(참조: 창 5:10; 11:10; 역상 1-8). 이것을 통해 볼 때에, 마태복음이 히브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와 누가의 계보에서 17명의 이름이 공통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숫자상으로 마태 계보의 40%에 해당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두 계보가 거의 같다. 이것은 룻 4:17-22와 역상 2:3ff의 가족계보를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부터는 계보가 갈라지는데, 마태는 역상 3:10ff를 따른다. 이곳에서는 일단 스알디엘까지 열거하는데, 몇 명은 생략되었다. 그다음에 그는 스룹바벨을 언급했는데, 그는 에스라 3:2,8; 5:2에 따라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한다. 여기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서 마태와 누가는 서로 만난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갈라진다. 바벨론 포로부터 요셉의 시기까지 이해하기가 가장 어렵다.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누가는 다윗 이후 나단을 통해 계속 내려가는데, 역상 3:5에 따르면 밧세바의 아들도 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다.
계보에 나타난 이 상이점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다. 아마도 역상 3:19이하 에스라 3:2,8; 5:2에서 볼 수 있는 인척 결혼(신 25:5ff)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태가 누가가 서로 다른 목록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보를 통해 예수님의 조상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거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은 신약에 분명하게 증거되었고,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다.
가족 계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번의 분기점인데, 이것은 6절의 다윗에서와 11-12절의 바빌론 포로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계보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마태는 17절에서 이것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계보의 첫 부분은 2-6까지이다. 마태가 누가처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미 창 12:1-3의 아브라함 약속에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님 계보에 나오는 자매들을 통해 메시아가 인류 전체에 관계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부분에서 자매 3명이 나오는데, 이는 다말과 라합, 룻이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는 둘째 부분에서 마리아는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한다. 자매 이름이 유대인 족보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다. 복음서가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은 배울 수 있다:
첫째로, 이 세 명의 자매는 죄를 지은 여자들이다. 다말은 (목적이 이해할만할지라도) 창녀 행위를 했고(창 38:13), 라합은 그가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창녀였다(수 2:1ff; 히 11:31; 약 2:25). 룻이, 밤에 술을 마시고 타작마당에 누워있는 보아스에게 간 것은 윤리적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다(룻 3:6ff).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했다(삼하 11-12). 마리아는 전혀 잘못이 없음에도 유대인으로부터 간음녀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참고: 마 1:18ff).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죄로 물든 자매들의 후손이었다. 그분은 죄로 연속된 인간의 계보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자매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그분의 구속의 계획에 포함하셨다!
둘째로,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자매는 모두 이방인이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사람이었다. 밧세바는 역상 3:5에 따르면 이스라엘 여자 같은데, 헷 사람 우리아와 결혼했으므로 헷 사람으로 간주된다(삼하 11:3; 23:29). 가나안 족속은 창 10:6에 따르면, 함족이고, 모압 족속은 창 19:37에 따르면 셈족이며, 헷 족속은 창 10:15에 따르면 함족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분의 기원에 따르면 창 10장의 민족계보로부터 볼 때에 여러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고 있다. 단지 야벳 사람만 없을 뿐이다(창 10:2ff). 이렇게 볼 때, 또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의미가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함의 자손이 비록 노아에 의해 저주를 받았을지라도 예수님 안에서는 저주가 없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자가 되신다. 선교에는 경계가 없다.
계보의 둘째 부분은 6-11까지이다. „바벨론 포로“나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회당과 율법사(서기관)가 생겼다. 그때부터 새로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이 형성되어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배 이래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요 1:49; 19:19), 다윗 혈통을 가진 왕은 사라졌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역상 3장과 비교할 때, 3명의 왕의 이름이 누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요아스, 아마시아, 아사리아 왕이다. 마태는 아하시아를 „웃시야“라고 하는데, 웃시아의 다른 이름은 보통 아사리아라고 하며, 이는 한참 후대의 왕이다(왕하 14:21-22; 15:1ff; 역상 3:10ff; 역하 26:1ff).
그러나 셋째 부분의 중심은 16절에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곳에서는 이제 더이상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요셉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모든 마태복음 사본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낳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이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눅 1-2; 요 1:14-18; 갈 4:4; 히 7:3; 계 12:1ff.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마태가 18절 이하에서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약혼녀이면서도 부인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법적으로 자기 아들이 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법적으로 본다면, 요셉이 온전히 예수님의 아버지이다. 그 결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된다. 그분이 이적으로 탄생했다고 해서 그분을 다윗의 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롬 1:3). 자연과 기적, 역사와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이곳에서 하나로 만난다.
17절은 별도로 고찰해야 한다. 마태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조상을 열거한 바에 따르면, 42대(3x14)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빠짐없이 열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가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숫자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3은, 3위인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는데, 마태는 복음서 마지막에, 즉 28:19의 선교명령에서 이 숫자를 다시 한 번 사용했다. 즉, 마태는 이 복음서를 삼위로 둘러쌈으로써, 즉 삼위로 시작하고 삼위로 끝냄으로써, 자기가 지금 거룩한 문서(성경)를 집필했음을 선포하였다.
14는 신성한 수(완전수)인 7이 두 개가 들어있다. 7은 창조의 마감의 숫자이다(창 2:2-3). 7은 둘째 창조의 완성의 숫자이며(히 4:4ff),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숫자이다(계 5:1,5; 8:2; 10:3; 15:1,7). 따라서 마태는 7을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완성의 숫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14(2x7)에서 2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2는 이스라엘과 이방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벌써 1절에서 다윗과 아브라함에서 2라는 숫자의 중요성을 나타냈다. 그 외에 이스라엘과 열방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한 곳은 다음과 같다: 롬 1:16; 고전 1:24; 갈 2:9; 엡 2:11ff; 계 7.
정리하면, 마태는 3x14 = 3x7x2의 관계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을 위한 자신의 구속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숫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지혜서 전통이다. 숫자를 통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에 지나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되며, 단지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한도 내에서만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마 17 외에도 요 21:11; 계 13:18, 그리고 다니엘, 스가랴와 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도 숫자가 나오는데, 이 경우에도 우리는 성경이 지시하는 한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나에게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창세에 이미 예비하시고(엡 1:4), 아담에게 약속하시고(창 3:15), 아브라함으로부터 역사 안에서 시작된 이 구속의 역사가 2000년 간의 믿음의 선조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준비된 것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이 되어 나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을 구원시키고, 이제 이 사역이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나의 구원과 나의 삶이 있다. 나는 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감격적인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전환점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그 시점에서 비로소 나에게 알려지고, 내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영접함으로써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그 계획의 효과가 나에게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의 존재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하나님의 긴 구속사의 하나의 작은, 그러나 매우 귀중한 초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감격적인가? 우리는 매일 이러한 사실에 감동되어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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