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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사야

이사야 53장 1-9절 고난 받으신 예수님 - 조용기 목사 설교

by 재영구리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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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이사야 53:1∼9
설교제목 : 고난 받으신 예수님
설교자 : 조용기 목사님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이성과 경험을 너무나 아득히 뛰어넘는 사건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는 아연 실색하고 마음이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할 말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지금부터 2600여 년 전, 하나님의 선지자인 이사야가 경험한 사실이 이와 같은 것이었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계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시되 그것도 아기 예수로 오셔서, 이 땅에서 성장하시고 장성한 이후에 인류를 위한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올라가 몸 찢고 피를 흘려 처참하게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임이라는 하나님의 장엄한 가르침이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계시를 보고 난 다음에 너무나 상상을 초월하고 믿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외치며 말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 사건을 내가 아무리 전한들 누가 이것을 참으로 믿어주겠느뇨,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팔이 나타나서 기사와 이적을 베풀어도 잘 안 믿어 주는 세상에 내가 이러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해서 누가 이 사건을 믿어 주겠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상세하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우리가 2600년이 지나간 오늘 이 시대에 찾아볼 때에 얼마나 상세하게, 얼마나 감격적으로 예언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이사야가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에 예언한 사실이 이제 2000년 지난 오늘 이 시대의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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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죽으심까지 고난의 역경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예수님의 태어나심이 연한 순 같이 태어나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로서 장엄하게 하늘의 구름을 타고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정 반대로 이사야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연한 순같이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연한 순이란 어리고 연약한 아기로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태어난 환경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말했습니다. 마른 땅에서 줄기가 나온 것은 햇빛에 시들어지고 바람에 날리는 연약한 줄기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마른땅 같은 나사렛 빈촌의 무명의 가문에서 바짝 마른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을 상세히 이처럼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기로 태어났을 때, 그 어린 아기를 보는 사람마다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이는 과연 전대에 미물의 어린 아기다, 이는 정말 우리가 지금까지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어린 아기다' 이렇게 감탄할 아기로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어린 아기로서 어린 순 같이 마른 땅에서 낳은 줄기같이 태어나매 사람들이 찾아와 보아도 그에게는 귀동자의 고움과 옥동자의 늘씬함이 없는 가장 평범한 어린 아기, 소위 우리가 요사이 말하는 보통 사람의 아기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흠모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외면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그 예언 말씀 그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볼 때에 그는 베들레헴 버린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놓여 있는데, 그 어린 아기를 보러온 목자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어린 아기보다 특출한 것은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하늘의 천사들이 와서 노래부르고 천군이 예수 그리스도 구주의 탄생하심을 예언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렇게 영화롭고 흠모한 모습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 이사야는 너무나 상세하게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란 멸시와 천대, 박대를 겪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인에게는 위험한 선동자로서 늘 감시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왔기 때문에 혹시 예수가 민족주의자로서 민중 봉기 선동을 일으켜서 로마 정부에 대한 대항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끊임없이 로마의 첩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감시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이단자로서 배척을 받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고 하나님과 자기는 동일하다고 말함으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환란으로 몰아쳐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정식 교육이 없는 자로 낙인을 찍고 무식한 자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멸시했습니다. 귀족에게는 예수님은 바로 비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이가 나겠느냐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오고 감을 무시하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렁뱅이 취급을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고 갈데 없는 방랑자와 같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방랑하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예수님을 거지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물론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천민이요, 소외되고, 버림받고, 고통 당하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만 따라 다녔기 때문에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무시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그리스도는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생은 간난 신고의 쓴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이부자리를 갖다놓고, 좋은 옷 갖다놓고 자고 깨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거처가 없었습니다. 새도 들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주님은 방랑자의 삶을 살면서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방랑자의 삶이란 절대로 행복하고 편한 삶은 아닌 것입니다. 그는 언제 맛있는 음식, 좋은 의복을 입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방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구미에 맞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곳에 가나 주는 대로 잡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구미에 맞는 맛있는 진미를 예수님은 잡수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좋은 옷을 입고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것은 누가 좋은 옷을 때때로 만들어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통으로 짠 의복을 한 평생 입고 다닌 것입니다. 늘 떠돌아다니니 그 삶의 고생스럽기가 말로다 할 수가 없고, 가는 곳마다 핍박과 고난을 당하셔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신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일생을 간난 신고로써 이 땅에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자라'고 말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질고로써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영이 병든 사람, 마음이 병든 사람, 육신이 병든 사람, 생활에 병든 사람,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사로써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은 기피하고, 유대인은 멸시하고, 학자들은 천시하고, 귀족은 멸시하고, 부자는 그를 가까이 아니 했지만,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떼를 지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그 주위에 병자들이 몰려오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질고를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병들어서 고통하고 고민하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열두 제자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칠십 인의 제자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으며, 나중에는 최후의 명령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도 예수님은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질고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질고를 치료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병 고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질고를 무시하고, 기독교가 병자를 위한 기도를 그친다면, 그것은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되기를 그친 교회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방랑 전도사로서 그는 가는 곳마다 거처 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귀히 여기지 아니했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이 '우리조차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필요 없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조차도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생이란 이와 같은 간난 신고를 겪으며 살았지마는 그러나 수많은 앓는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슬픈 자, 외로운 자들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치료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돌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성경은 우리에게 여실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느니라』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의 얘기를 계속 들어 보십시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대속의 생애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 성경에 친히 기록한대로 진짜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는 '실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가상이 아닙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은 그 등이 찢어지고 채찍으로 그 살이 갈기갈기 파헤쳐져 선지피가 줄기줄기 흐르도록 얻어맞았었습니다. 그는 몸부림을 쳤습니다만 성경은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저가 상함 받기를 원하사 우리의 질고를 당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병을 미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병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몸이 찢어지고 살이 파헤쳐지고 피를 쏟기까지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의 시조에 "여보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서러워라 하거든 짊을 쫓아 지실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짐을 진자가 그 짐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이 짊어져 주면 자기는 가볍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했었으니 오늘 여러분의 질병의 슬픔을 모두다 예수께 맡겨 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슬픔을 당했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마음속에 슬픔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린 이 세상에 살면서 가슴이 찢기는 수많은 슬픈 경험을 합니다. 이 슬픔을 예수님은 담당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슬픔을 알아주랴, 누가 나의 찢긴 가슴을 알아주랴, 누가 나의 마음의 고난을 알아주랴'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슬픔을 당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슬픔 가운데 오셔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여러분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밝히 말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 당한다고 하였노라' 예수님의 고난 당한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하나님께 버림받아 고난 당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계시를 우리의 중심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를 질고에서 놓아주실 수 있고 우리를 슬픔에서 놓아주실 수 있는 위대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라고 말했었습니다. 예수께서 수족이 찔리셨습니다. 머리는 가시관으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랬다고 말씀합니다. 허물 된 생각과 허물 된 행위 때문에 예수께서 찔리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허물이 없는 사람 보았습니까? 이 세상에 크고 작은 허물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다 인생은 허물 지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을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대신 찔리신 것입니다.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온 몸이 얻어맞아 상했습니다. 그는 주먹으로 맞아서 얼굴이 붓고 수염이 뜯기고 눈이 터지고 온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맞았던지 이사야서 52장 14절에 말씀하기를『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보고 '저렇게 맞을 수가 있느냐, 저렇게 얼굴이 부어 오를 수가 있느냐, 저렇게 상처투성일 수가 있느냐' 무리가 보고 놀랄 정도로 예수님은 상처를 입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상처와 영혼의 상처를 동시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같이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모두다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악을 주님이 다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오늘날에 와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면, 주께서 그 흘리신 보배로운 피와 상처 입은 몸으로 우리의 허물을 제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과 수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끝까지 죄인입니다. 용서받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데 용서하실 분은 우리 주 나사렛 예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종교인이 와서 훌륭한 종교를 주었고, 철학을 주었습니다. 또 도덕을 주었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죄악과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죽어서 갚아준 이는 우리 주 나사렛 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외쳐 말하기를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만이 우리의 용서요, 구원이요, 희망이요,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또 계속해서 말씀합니다.『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했었습니다. 예수께서 왜 징계를 받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인데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자격 정지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는 범죄 했기 때문에 징계를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징계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징계 받은 우리 인류를 대신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었습니다. 그가 고통의 극치 가운데서 외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완전히 버림을 당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그를 통해서 다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죄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쫓겨 나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징계를 받음으로 이제 그 댓가로써 우린 하나님과 화목 되고, 그 댓가로써 우리는 가시와 엉겅퀴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의 예비한 은총의 세계 속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더 강조해서 말하기를『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우리가 병 낫기를 원하시기에 이 대속의 장에서 3번이나 연달아서 주님께서는 우리 병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데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병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우리의 저주를 주께서 처리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살아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들의 실상과 대속의 은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억울하게 짊어지고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얼마나 억울한 심정이 생깁니까?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내가 왜 억울하게 속죄양이 되어야 하느냐'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진짜로 다 양 같아서 제 멋대로 그릇 행하여 다 죄를 수없이 지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의 극치에 처했을 때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하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네 스스로 구원하라,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믿겠노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려오시면 우리가 올라가서 못 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면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피하면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원해서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 올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오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고난의 마지막 잔까지 다 마셔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죄악을, 여러분의 죄를, 저의 죄를, 여러분의 불의를, 저의 불의를 예수께 담당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대신해서 그 죄와 불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를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큰사랑을 베푼 예수 그리스도를 짓밟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다면 그 이후에 하나님께 당할 심판의 무서움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큰사랑을 배반하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서 뻔뻔스럽게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와 같은 크나큰 고통을 당한 주님을 무시하고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 중에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의 그 날에 우리의 무지와 우리의 완악함과 교만과 반역함에 대해서 처절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처참한 고난을 당할 때도, 얼마나 장엄한 침묵을 지키면서 그 고난을 감내했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서 주님은 주먹으로 얻어맞고 수염을 뽑히고 침을 뱉고 그리고 눈가림을 당하고 발길로 체이고 때림을 당하고 했지만, 그 많은 사람이 예수께 고소해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빌라도의 뜰에 불려가서 총독에게 심문을 받을 때 총독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고소하는데 왜 너는 대답하지 않느냐?" 예수님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려고 발버둥친다면 대답하겠는데 우리를 위해서 죽기로 결심을 하셨기 때문에, 죽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무슨 대답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장엄한 침묵으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해서 말하기를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이 아무 소리 없이 끌려가고 털 깎는 자 앞에서 털을 깎아도 양은 버둥대었지만 물지를 않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의 한계점을 또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졌건만 그 세대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곤욕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사람들은 그저 예수께서 잡혀서 죽는 범죄자로 생각했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양이 되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질 못합니다. 누가 이 세대의 범죄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 당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이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오늘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믿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주전 600여 년 전에 예언한 사실이 십자가 후 2000년이 된 오늘날의 우리들이 아는 역사적 십자가 사건보다 더 분명하게, 이사야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고, 여러분과 저를 하늘까지 올리기 위해서 처참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용서받고 천국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의 내일의 소망을 향해서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당하고 천 번, 만 번 심판 받아야 마땅할 영혼들입니다. 아버지여, 우리는 의로움도 없고 거룩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더러움과 추함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 성자 예수를 보내 주셔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이 아픕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간난 신고로 꽉 들어찼습니다만,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질고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십자가의 삶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불평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묵묵히 그 고난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몸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시고 생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 우린 구원을 받고, 이제 우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철없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업에 훼방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오늘 이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가슴을 찢고 회개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진실로 우리 잘못 ale은 것을 회개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의 탐욕스러운 삶을 찢어버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참으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경외하고 주를 위해서 시간 드리고, 몸 드리고, 물질 드리고, 희생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까' 탐욕스러운 생각만 하게 하지말고,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내가 하나님께로 기쁨만 받으려 하지말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천 배, 만 배로 감사하고 보답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위선자들이 되지 말게 도와 주시옵시고, 엉터리 신자들이 되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속속들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 죽으심으로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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