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유다서 1장 11-16절
설교제목 : 가인과 발람과 고라
설 교 자 : 유관지 목사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기록한 편지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6절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야고보․요셉․시몬․유다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에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 3장 21절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이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을 보면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이름이 나온 다음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도의 어려움과 전도의 묘미를 동시에 봅니다.
가장 가까운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 것은 전도의 어려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것은 전도에는 열매가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일입니다.
유다는 한 교회를 지도한 것이 아니고 여러 교회를 돌아 다니며 지도한 순회목회자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목회는 이같이 순회목회의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순회 전도한 교회 하나에, 또는 여러 교회에 구원이란 무엇인지, 기독교의 기초적인 진리는 어떤 것인지를 써 보내고 싶어했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정하던 차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급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교인들을 유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거짓 교사들, 악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싸워 이기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다서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이와 같이 교회에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위기의 산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목격하고 직접 배워서 교인들에게 전해 주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지도력에 위기가 생겼습니다. 이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 바로 복음서들입니다. 말 대신 글로써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층의 교체가 복음서의 기록이라는 위대한 일을 이뤄 냈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참고하는 「월간목회」라는 잡지 10월 호 권두언을 보니까 "한국교회 빅뱅이 오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5년 내지 10년 이내에 한국교회 100대 교회 목회자가 거의 은퇴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빅뱅이라는 것입니다. 대교회를 무명의 소장 목회자들이 담임하게 되어 개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기고 교회들은 재통합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고 교회내에 새로운 유목민들이 발생해서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이뤄지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다기능 역할 분담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이같은 빅뱅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대폭발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권두언의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한국교회의 지도층 교체라는 위기도 잘 극복되고 오리혀 교회 발전과 성숙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규는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게 했고, 갈라디아교인들의 배신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가해지는 박해는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탄생하게 했고 재림문제를 들러싼 갈등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단인 영지주의의 교회 침투는 요한서신들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성경은 이와같이 위기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IMF라는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이 이기가 국민적 각성과 단결, 거품 제거, 검박한 기풍 조성들의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경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성적인 문란이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을 세가지 타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있는대로 가인 형, 발람 형, 고라 형입니다. 여기 "가인의 길에 행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 고라의 패역을 좇았다" 하는 것은 가인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 발람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 고라와 같은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 이런 뜻입니다.
이 세 가지 형태는 오늘날 우리 교회 속에서도 흔하게 찿아볼 수 있습니다. 아니 내 안에서도 찿아볼 수 있습니다.
가인 형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사람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지금 '이 세가지 형태는 오늘 날 우리 교회 속에서도 흔하게 찿아볼 수 있다, 내 안에서도 찿아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내게 형제 살인자의 요소가 있단 말씀입니까?" 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인의 가장 근본적인 잘못을 무엇입니까? 잘못된 예배를 드렸다는데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했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은 창세기는 유목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기록되었는데 가인은 농경문화의 산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풀이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양을 제물로 삼으려면 그 양을 죽여야합니다.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이 따르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희생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가인에게는 무엇인가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가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나?' 살펴 보아야합니다. 반성해야 합니다. '동생의 제물은 어떻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잘못을 고쳐서 다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심히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혈기(血氣)입니다.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왜 내 제사는 안 받으시는 것입니까!' 했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야하는데 자기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아벨을 죽였습니다. 끔찍한 범죄입니다. 예배 후의 범죄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됩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은 물론 나쁜 것입니다. 예배 후의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더 나쁩니다.
오늘날 우리 예배에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없습니까? 예배 후에 오히려 더 나쁜 일을 하는 일들은 없습니까?
없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통방송을 들으면 "어디서 접촉사고가 났는데 운전자끼리 시비를 가리느라고 그 부근이 지체가 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때로는 물고기 표지 붙인 차의 운전자끼리 심하게 시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화평에 대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교회 주차장에서 먼저 빠져 나가려고 길을 막고 뒤에서는 빵빵 거리고 하는 광경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잘못되면 다른 것도 모두 잘못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는 정성을 다하는 것인데 그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것은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가인은 바로 이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다음은 발람 형입니다. 발람 형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질의 유혹에 약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물질의 유혹으로 신앙적 양심을 굽히는 사람입니다.
발람은 누구입니까?
돈을 사랑한 탐욕스러운 주술가(呪術家)입니다. 글쎄요, 좋게 표현하면 종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예언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주술가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방부족들을 격파해 가며 가나안을 행해 가는데 모압 왕 발락이
두려워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그래서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너는 모압 왕 발락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는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이 이런 엄중한 계시를 받았으면 단호하게 행동해야 할텐데 우물쭈물, 발락에게 왔다갔다합니다. 모압왕 발락이 베푸는 환대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민수기 22장에서 25장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한 사람" "상급을 위해 범죄할 용의가 있는 탐심 많은 자" "나귀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교사가 학부형의 많은 촌지를 받고 학생들의 성적을 공평하게 평가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 것도 나쁘고, 법관이 돈에 좌우되어 재판을 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것도 잘못이고 공직자가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제일 나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발람처럼 돈에 끌려 신앙양심을 굽히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부패 가운데서도 가장 지탄 받는 것이 성직매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도 그와 비슷한 행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 안의 선거에서 금품이 오간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립니다.
어느 교회의 학생 하나가 교회에 잘 나오다가 어느날부터 교회에 발을 끊어 버렸습니다. 학생회장이 찿아가서 이유를 물으니까 예배 시간에 자리가 꼭 차서 예배를 드리는데 늦게 들어오는 교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권사님이 설교중에 들어 오셨는데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거 안내하는 아무개 집사님, 여기 앞에 빈자리가 있으니 이리로 안내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돈많은 교인들을 환대하는 것이 상처가 되어서 안나간다고 했습니다. 학생회장은 그 후배를 잘 설득 해서 교회에 나오게 했습니다. 그 학생회장은 지금 목사가 되어 있는데 그 일을 기억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청량리중앙장로교회를 오래 담임하셨고 지금은 원로목사님으로 계시는 임택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 우리 교회로 오시면 사례도 더 드리고 대우를 잘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청빙을 했다고 합니다. 장로님들이 이 소리를 듣고 목사님에게 찿아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에서 대접을 잘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말 대우 잘 해드리는 그 교회로 가실 것입니까?" 목사님의 대답은 "저기 소시장에 가면 장사꾼들이 소의 무게를 달아보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소는 돈을 더 주고 사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목사이지 소시장의 소가 아니오!", 그래서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 교회에 젊은 교육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은 한국교회의 중견지도자가 되었는데 당시 담임목사님의 이같은 일을 보고 바른 물질관을 갖게 되었다고 자주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물질의 바른 사용에 특히 조심해야합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도 아셔야합니다. 물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먼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물질관에서 온 일입니다.
이 수지에 목양교회 다음으로 큰 감리교회가 교회당을 짓고 이사 와서 어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수원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대광교회인데 원래 서울 시흥동에 있다가 92년에 교회건축을 결의하고 100일 철야기도를 한 뒤 건축헌금을 작정했다고 합니다. 2년 전 크리스머스 무렵에 수지에 약 1,000평 넓이의 땅을 10억 원에 구입했고 작년 9월에 기공해서 19억 원을 드려 약 500평, 700석 규모의 아름다운 교회당을 잘 지어 어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입당예배에서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하고 지금 셋집살이를 하는 분들이 여럿이고 전교인들이 패물은 거의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분이 건축헌금을 위해 또 5천 만 원의 빚을 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 성도들은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고라 형입니다. 고라 형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라는 누구입니까?
광야에서 무리를 지어 모세에게 대항한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대해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에게 욍이 되려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항의 했습니다. 노예생활 하던 이집트, 세속문화가 지배하던 그 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민수기 16장을 보면 됩니다.
오늘날 사회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종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를 사회를 구성하는데, 문화를 구성하는데 하나의 필요한 요소처럼 여깁니다.
이렇게 되다 보면 종교가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받는 대접을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우리는 종교를 인정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개방정책을 취하는데 개방사회에서는 종교도 필요하다니 우리도 인정합시다", 중국이 그렇고 북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이 교회당 건축을 반대하고 교회 앞에 와서 시위를 벌이고 교회진입로를 가로막는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교회의 영적인 권위가 이렇게 무시 당해도 좋은 것인가?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이렇게 무시하는 이 사회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를 갖게 됩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교회 안에서조차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어지럽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군목무를 공군 사병으로 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공군 다녀온 분들이 많이 계신데 가만히 보면 제가 제일 고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병 126기인데 혹시 저보다 더 고참 있습니까?
여기에 같은 체험을 가진 분들이 많겠는데 공군의 훈련소가 대전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가 둔산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훈련소는 사천으로 이전했습니다. 훈련소 -기술교육단이라고 했습니다만- 연병장 한 가운데 활주로가 있었습니다. 식사하러 갈 때 이 활주로를 돌아가지 않고 가로질러 가면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활주로를 가로질러 가다가 적발되면 가혹한 기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활주로의 중요성과 권위를 공군이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냐?" 이것이 기합을 주는 이유였습니다. 조종장교들에게 적발되면 정말 무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타당한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활주로를 건너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고 활주로 경비 나가서는 졸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보초를 서곤했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권위는 교회 안에서 지켜야합니다. 그래야 밖에서도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해줍니다.
고라는 이 것을 무시했습니다. 민수기 16장 1절을 보면 고라는 제사장 부족인 레위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앞장 서서 영적인 권위를 지켜야 할 사람이 오히려 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가인 형, 발람 형, 고라 형의 거짓 교사들은 교회에 들어올 때 요란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만히 들어옵니다. 여기 4절을 보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몇이라고 했는데 숫자는 많지 않지만 강한 전파력을 가진 몇입니다. 누룩과 같이 퍼져 나갑니다.
이 거짓교사들은 앞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더 강하게 날뛸 것입니다. 지금 세기말(世紀末)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다서를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신문이 다시 배달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를 퍽 놀라게 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영생교 신도들이 집단 분신자살을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인데 영생교가 이 이름을 가지고 가서 앞으로 교회 안에서는 영생이라는 말을 쓸 때 좀 멈칫하게 될 것 같습니다. 1992년 「기독교대연감」에 실린 "한국교회사전" 편을 보니까 영생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열여덟 개 있고 영생 제일 교회도 있고 영생중앙교회도 있습니다. 모두 복음적이고 건전한 교회들인데 주변에서는 도맷금으로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참고로 1992년 한국교회 사전에는 목양교회가 전국에 열두 개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수십 개가 넘을 것입니다. 이 주변에도 세 개가 있는 것을 지나가면서 보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가인적인 요소, 발람적인 요소, 고라적인 요소는 없습니까?
내 마음 속에 잘못된 예배, 자기중심적인 예배,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예배 후에 선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퍅한 일을 하는 일은 없습니까?
물질의 유혹에 우왕좌왕하는 일은 없습니까?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는 일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가인, 발람, 고라가 어떻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가인은 악의 표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설가 황순원 씨는 공산주의자들의 행패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쓰면서 제목을 「카인의 후예」라고 했지요.
발람은 저주 받을 이름으로 성경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4절에서 16절까지를 보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발람을 나귀보다 못한 존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땅이 갈라져서 고라와 그에 속한 사람들이 음부에 빠졌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가인 적인 요소, 발람적인 요소, 고라적인 요소가 있으면 우리는 그런 그런 물결이 밀려들어올 때 쉽게 휩쓸립니다. 교회가 위기에 빠집니다.
지금은 그런 위험이 많은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이런 요소들을 경계해야합니다.
바른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물질에 깨끗해야 하며 물질사용의 우선순위를 잘 지켜야합니다.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합니다.
이같은 일들을 잘 지켜 이 어려운 때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여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여러분과 저, 컴퓨터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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