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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유다서

유다서 1장 11-13절 유리하는 별들에게 - 이민재 목사

by 재영구리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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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유다서 1장 11-13절
설교제목 : 유리하는 별들에게
설교자 : 이민재 목사님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옛날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사람들 얼굴을 그리려다 보니 동그라미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왜 그리려고 했냐구요?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본래 모습을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다는 게 대체 뭔지 나름대로 밝혀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지난 번 숨빛향기(93호)에 그렸던 동그라미 기억나시는지요. 세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었습니다. 다음은 첫 번째 동그라미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 안타깝게도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어둠의 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짙고, 깊고, 두텁습니다.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어둠의 전염력 또는 팽창력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상상을 초월하는 전염력으로 순식간에 주변을 어둡게 물들일 수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오늘 집에 들어가셔서 인상 북 쓰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보십시오. 집안이 금방 썰렁해질 겁니다.

이 마음의 어둠이 세상을 어둡게 물들이고, 역으로 어두워진 세상이 마음을 어둡게 오염시키면서 어둠의 향연은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과 휴대폰은 이 어둠을 증폭시키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태안 앞바다를 검게 오염시키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어둠이 마음과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이 어둠의 압력 또한 엄청납니다. 그래서 사라진 것 같다가도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어느 틈엔가 마음을 꽉 채웁니다.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폭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엽기적이며 잔인한 범죄들은 다 이 어둠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마음의 어둠

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바울 사도는 이 어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라 하기도 하고,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람”(벧전4:3)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딛3:3)였다고 하면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런 상태에서 구원받았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유다서에는 또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11-13)”

이것은 각종 이설로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인데, 예수를 진심으로 마음에 모시기 이전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도 적절합니다. 유다서를 쓴 사람은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 같습니다. ‘구름’, ‘가을 나무’, ‘물결’, ‘별’ 같은 낭만적인 자연을 소재로 하여 진실한 신앙이 없는 사람을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에서는 허무하고 공허한 삶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는 게 보입니다.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에서는 뭔가 하느라고 애쓰기는 애썼는데 변변히 내놓을 것 없는 메마르고 황폐한 삶이 느껴집니다.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에서는 품위도 격조도 그윽한 존재의 향도 없는 무례한 인간군상의 격한 몸짓들이 연상됩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에서는 허무하고 황폐하며 그악스러운 삶을 살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마침내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의 절망이 뼛속 깊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이상에서 예를 든 모든 성서 구절들이 바로 ‘믿음으로’ 예수를 마음에 진심으로 모시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점점 광란으로 치닫고 있는 어둠의 향연에서 탈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그래서 향락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깊은 어둠의 수렁일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지식과 문화와 예술을 추구하기도 하고, 도덕과 윤리를 철저하게 실천하기도 하고, 종교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적 수행방법을 통해 어둠의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자기 노력’으로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순진한 생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마음의 어둠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이나, 실천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적 수행들의 분량은 정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대양의 물을 숟가락으로 떠내려고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무한을 유한으로 극복하려는 헛된 시도라고나 할까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식과 윤리와 종교적 수행 같은 자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오늘날 비지성적이며, 비윤리적이며, 비수행적인 한국 기독교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노력 없이 요행만 바라는 신앙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 없는 수행과 예수 영접 이후의 수행의 차이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어둠을 이기려면 무한한 빛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죽음을 극복하려면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무한한 더러움을 씻어내려면 무한한 샘물이 필요합니다. 무한한 불의를 물리치려면 무한한 의가 필요합니다. 유한한 빛과 유한한 생명과 유한한 샘물, 그리고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유한한 의(義)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한한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무한한 빛, 영원한 죽음을 극복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무한한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는 무한한 샘물, 무한한 불의를 물리칠 수 있는 무한한 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유한의 모습으로 임재한 무한, 인간의 몸으로 화육(化肉)한 신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니 그런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성경은 줄곧 예수가 그런 분임을 증거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 빛이심에 대하여]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예수, 영생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 샘물 또는 생수이심에 대하여]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예수, 무한한 의이심에 대하여] 내가 가진 의는 율법(도덕․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 영생, 샘물, 하나님의 의 등으로 묘사하는 성서의 구절들입니다. 이것은 교리나 이론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을 때 어둠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라는 순결한 인간 앞에서 편견 없이 마음을 열었을 때 그들은 어둠의 수렁에서 자유로워지는 체험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한 구원의 생생한 경험을 전달하려고 애썼던 것이고, 예수를 믿으라고 그토록 줄기차게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예수를 믿는 사람, 그분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을 모셔들인 사람에게는 빛이 비췹니다. 영생이 주어집니다. 생명수가 흘러 넘침니다. 하나님의 의가 주입됩니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이 바로 다음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운데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작은 동그라미가 무한한 빛의 통로요, 영원한 생명의 문이요, 영원한 샘물의 수로요,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숨빛향기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이] 동그라미는 굉장한 겁니다. 하나님과 영원과 초월을 향해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문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영생과 내세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하나님 나라와 천국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가운데는 마음 속에서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신 분이 여럿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식(철학)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여러 가지 종교적 수행은 아무 소용없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합니다. 필요하고 말고요. 그러나 그것은 다음 단계에서 더 쓸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모신 사람들이 성화의 길을 걸을 때 더욱 유용한 것이지요.

숨빛 다음의 차이를 유념해 주십시오. ‘예수 없는 지식/도덕/수행’과 ‘예수와 함께 하는 지식/도덕/수행’의 차이를. 제 판단으로, 전자의 결말은 깊은 실존적 좌절입니다. 물론 그것은 대양의 물을 숟가락으로 퍼내야 하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엄습하는 좌절입니다. 물론 후자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얘기가 되니 다음으로 미뤄야겠습니다. 오늘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 열고 그분을 마음 중심에 모셔들이는 것이 엄청나게, 무지무지하게, 절대적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그것처럼 엄청난 변혁과 근본적인 혁명은 없다는 것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으로 맺어야 하겠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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