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요한복음

요한복음 14장 12-14절 근심을 덜려면 기도하라 - 옥한흠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6.
반응형

설교제목 : 근심을 덜려면 기도하라
설교본문 : 요한복음 14:12-14, 16:23-24
설교자 : 옥한흠 목사님

지난 20여 년 동안 교회에 나와 도 기도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마음 고생을 하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기도할 장소를 찾지 못해 마당 이 곳, 저 곳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제 마음이 얼 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 양관을 지으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 분이 있다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와서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 전용실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비디오를 통해 보 셨지만, 누구든지 우리 교회 성도면 와서 하루 종일 아니면 밤새도록 하 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분 위기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옆방에 서 기도하는 소리가 가능한 들리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했는데 어느 정 도 효과가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래 전부터 우리 교 회 안에는 기도의 열기가 달아오르 고 있는 것을 봅니다. 중보기도실에 서는 중보기도단이 매일매일 시간을 맞추어서 함께 모여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 니다. 예배 드리고 있는 바로 이 순 간에도 중보기도단이 예배 실황을 비디오로 보면서 설교자를 위해, 또 예배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부, 청년부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면 의례 뜨거운 기도 소리로 진동하는 것을 저는 자주 목격을 합니다. 하 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기도에 열 심을 내는 뜨거운 분위기를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는 사상 최악의 무신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 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눈 으로 분명히 목도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마귀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시대에 우리 모두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열두 명 의 제자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 회를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사 도들처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 는 일에 전념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 청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지난 5주간 동안 사랑의 교회가 지난 20년 간 하나님이 주신 소명대로 특별히 힘을 쏟아온 사역 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리고 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리는 페스 티발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페스티발로 내년부터 우리가 시작해 야 될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또 하나 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주말 교회 프로그램과 영성 훈련 프 로그램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런 페스티발을 하는 마당에 말씀을 통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기도 할 때 어떠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일이라 고 저는 확신합니다.

근심이 많은 인생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제자들 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권면하신 말씀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 용이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떠 나시면서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 게 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4장 1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 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내용의 목적이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 십시오. 그들은 3년 동안 미친 사람 들처럼 예수님만 따라 다녔습니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어떻 게 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 다.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해방자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 자다. 지금까지 기다린 메시아다. 이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을 좇 았던 사람들이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 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예수 가 지금 처형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 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민족 반역 자로 몰려서 처형을 당하면 그 선생 을 따르던 제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생명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한 근심에 눌려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는 도무지 떨치고 나갈 수 없는 근 심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 다. 이것이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었 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 갈 길을 갈 수 없 으셨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 마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 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에 있는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입 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 흔 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 만들기 위 해서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첫 마디에 예수님의 심정이 고스 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에 근 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모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주기를 원하셨 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27절과 16장 6절, 20절로 23절 말씀 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도리 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 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덜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단단히 붙들어 주기 위해서 여덟 가지 실제적인 권 면을 주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 도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근심해 보지 않은 사 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근심이 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좋 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의했습 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반쪽 의미 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좋지 않 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내일의 문제를 놓고 염려하는 것도 근심이 지만, 이미 눈앞에 터진 일을 가지 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도 근심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앞의 일만 놓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 에 벌어진 일을 놓고도 근심을 합니 다. 이런 점에서 근심에서 면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이 이런 명언을 남겼습 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 람은 낮에는 너무 바빠서 근심할 틈 이 없고 저녁에는 너무 피곤해서 근 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그 럴 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도 사실은 허점이 많습니다. 왜냐하 면 인간이란 존재는 아무리 바빠도 근심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아무 리 피곤하여 잠이 쏟아져도 꿈속에 서 마저 근심 때문에 악몽을 꾸기 때문입니다.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인생이 어찌 할 없는 팔자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10층에서 탔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약 간 이상한 기질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왜 그 렇게 좋은 지 모릅니다. 짧은 시간 이지만 쉴 수 있을 것 같고, 저 자 신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금방 끝나고 말았습니다. 엘 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 멈추어 서더니 어떤 아주머니 타는 것이었 습니다. 이사 온지 그렇게 오래 되 지 않아서 저하고 안면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인상도 그렇게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부인이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옵니다. 생소한 남자와 생소한 여자 가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것은 현대 문명이 주는 고약한 스트레스입니다. 불과 30초밖에 안 되는 시간임에도 제게 는 3분이나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 졌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인상을 주어서 다음에 언젠가 전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넵 니다. 엘리베이터가 3층쯤 내려왔을 때 제가 그 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 다.

"요즘 살기가 괜찮으세요?"

그 랬더니 그 부인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었습니 다.

"아니에요. 새로운 근심이 또 생 겼어요."

그리고는 문이 열리자마자 허둥지둥 뛰어 나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래, 저게 인 생이다. 넓은 아파트에 살고, 겉모습 은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 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묵은 근심을 가지고 고생하다가 조금 살만해지니 까 또 다른 새로운 근심이 들어오고 하는 게 인간이야' 하고 생각했습니 다. 이것은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 하는 느낌이 아닌가 합니다.

반응형


근심을 될 때 기도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번 이상 근심 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고 권면하 고 계십니다. 14장 13절, 14절과 15 장에,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나중에 우리가 하나 하나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기 도하면 정말 근심이 날라 가는가?"

제자들의 형편을 보면 예수님의 말 씀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 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해 서 당장 근심이 날라 갈 수 있을 만 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 입니다.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 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 살렘에서 마음놓고 걸어 다닐 수 없 게 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고 해서 금방 근 심이 날라 가겠습니까? 우리의 경험 을 놓고 보아도 우리가 무슨 근심거 리를 안고 고민할 때 기도한다고 해 서 금방 근심이 없어져 버리지는 않 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가 아스피린이라는 약 과 같지 않나 하고 생각할 때가 가 끔 있습니다. 두통이 날 때면 우리 는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먹습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먹으면 서너 시간 정도는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 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머리가 지긋지긋 아프기 시작하면 또 한 알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이 쌓이는 것 같으면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 하는 그 순간에는 마음이 평안해지 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눈을 뜨 고 나면 또다시 근심하기 시작합니 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개가 손님 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 갑자기 짖으 면서 튀어나오듯 근심이 우리에게 확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시적인 진통효 과를 가져다주는 아스피린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도가 그런 효과를 주는 데서 끝났다면 기도는 벌써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 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미 폐물 처리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도가 아스피린 같은 것이라면 처음에는 속아서 몇 번 해보겠지만 계속 해 봐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면 누 가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돌 이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세상이 악 하고 더러울수록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욱 새로워졌 습니다. 기도에 아스피린과는 비교 도 안 되는 그 이상의 효력이 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근심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기 때 문에 기도해 본 성도들은 이렇게 말 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십니 다. 성경을 보아도 기도하라고 하시 지 않아요?"

기독교 역사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우리 신앙생 활에 있어 기도가 이처럼 중요한 요 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절대 우연 이 아닌 것입니다.

근심이 몰려 올 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을 통 해 입증을 했습니다. 제 경험을 통 해서도 저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 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얼마 동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진짜 정신없는 일을 한번 당해 보세요. 한동안 정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기도도 잘 안됩니다. 솔직한 심정입 니다. 눈을 감기는 감아도 기도가 안됩니다. 김진경 박사는 북한에서 한 40일 억류되어 있을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 가 안 나오더랍니다.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판에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저 녁까지 주기도문만 수백 번 계속 외 웠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도문의 능 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 고 간증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궁지 에 몰리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 러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은 견디다 못해서 마침내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골방을 찾게 됩니다. 기도 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집니다. 이내 근심이 밀려와서 불안 해지면 또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 나서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낮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 다. 이렇게 자꾸 기도하다 보면 놀 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이었구나.'하고 새삼스 럽게 깨닫게 되는 신비한 세계가 우 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 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 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 키시리라."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러나 이 말씀은 약간 비약된 것입니 다.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 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 러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염 려가 되면 모든 간구와 기도로 하나 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다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 다. 염려하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약속의 말 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면 정말 희한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 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천국의 평안을 안겨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되 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 다음에 눈을 뜨면 근심거리가 여전 히 남아 있습니다. 염려가 됩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논한다면 나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 입니다. 기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근심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하 나님의 평안이라고 하는 햇살이 비 쳐 듭니다. 하나님께서 근심이 더 이상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그 손으로 내 마음을 굳게 붙들어 주시 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손에 붙들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하나 하나 해 결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 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금방 울던 사람을 금방 웃게 만드는 무슨 요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무조건 없애주는 무 슨 묘약도 아닙니다.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신비스러운 저항력을 길러 줍니다. 마음에 평안이 밀려들 때도 근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그 근심에 짓눌리지 않게 만드는 저항력이 됩 니다. 우리는 이 저항력 때문에 근 심 가운데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태산처럼 우 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그 무시무 시하던 문제가 희한한 방법으로 하 나하나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 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싶으면 기도하라."

이것은 진리입니 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왜 기도가 이와 같은 엄 청난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줄까 요?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 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 문에 기도는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키워주고 나중에는 그 모 든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 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 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 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또 15장 16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장 23-24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 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 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 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 리라."

이 모든 구절이 무엇을 말합 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말은 한자로 '명'(名) 인데, 저녁 석(夕)자 밑에 입 구(口) 자가 붙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글자를 놓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夕) 사람들의 얼굴을 잘 분별하지 못할 때 입으로(口) 소리를 내서 사람을 찾는데 필요한 것이 이름이다."

그 럴 듯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름은 더 나아가 그것의 주체가 되는 사람 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 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신 그분을 가리킵니 다. 그만큼 주님의 이름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우리는 그 의 피조물입니다. 만드신 자와 만들 어진 자, 이 두 존재 사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 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자를 만난다든지 창조자를 찾아간다는 것 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는 죄 가운데서 날마다 죄만 짓고 사는 죄인들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아무리 헤매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길로 가 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 리는 그 해답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멀 고 먼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계로 만드시고 자 중간에 채널을 하나 마련하셨습 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보십 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 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 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유일한 중보 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 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채 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 게 자기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조건 소리친다고 하나님이 들 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처럼 불상 앞에서 천 번을 절 한다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 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 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이 붙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 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중보자 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중보자가 되시 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나의 기도가 어 떤 기도이든 간에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도록 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 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예수 이름이 붙인 기 도는 거절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얼마 나 기뻐하셨는지 그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사 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 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 니라."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 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이 름인지, 거짓 선지자들도 이 이름을 가지고 능력을 행했습니다. 하나님 을 엉터리로 믿는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희한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의 이 름으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예수 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 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른다 하십 니까?"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 한 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 리가 이러한 대단한 이름을 들고 나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기도 를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이야 기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한참 남 북 전쟁에 휘말려서 많은 사람이 죽 어가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농촌에 있는 청년이 징집 을 받아서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런 데 너무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고 두 려워서 그는 탈영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해 체포되어 사 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 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는 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 다. 그야말로 삶의 의욕이 다 사라 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 고민하던 그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대통 령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한번 탄원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만나러 백악관을 찾아갔습 니다. 그러나 경비들이 이 시골 남 자를 들여보내 줄 리 만무했습니다.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바 람에 그는 길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비탄에 빠져 있는 그를 측은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소년 하나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그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년은 느닷없 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 아듣다가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그 소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그를 수위실로 데리고 가더 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가 데리고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랬더니 모든 수위들 이 아무 소리 않고 그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를 대통령 이 집무하는 집무실로 데리고 가더 니 링컨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 니다.

"아빠,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세 요. 너무 가슴 아파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그 소년이 대통령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대통 령이든 누구든 간에 아들은 언제든 지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 예수의 이름 부르면 우리 자신이 마치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하 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 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둘째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 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요한복 음 14장 13-14절, 15장 7절,16절, 16 장23절을 보면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 지'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티안 '(tian)인데,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서 기도를 가려서 듣지 않으시겠다 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든지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께서 가리지 않고 다 들이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몰 라서 잘못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 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그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기 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 구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에 100 퍼 센트 일치하는 기도만 해."하고 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 으로 가야될 사람이든지 아니면 하 나님이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입 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런 완벽한 기도를 드리지는 못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땅 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 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는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도와주셔야 됩니다. 염려에 막 짓눌려 보십시오. 그 기도가 무 슨 조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매달 리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 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중소기업 사장이 은행에서 대 출을 받기 위해서 서류를 들고 가다 가 돌아서서 도장은 빠진 데가 없는 지, 이름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보 고 또 보듯 신경을 곤두세워서 기도 하라고 하셨다면 우리 중에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 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를 과연 들어 주실까? 안 들어 주실까?'하는 것이 도리어 염려가 되면 혹 떼려다 가 혹 붙이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감사하게 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리지 않고 다 들어주시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한번 여러분 자신의 기도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큰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 는 내 마음의 감정에서부터 시작해 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큰 일까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다 양합니까? 우리에게 이 모든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롬 스미스라고 하는 분이 신구약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기도 목록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는 위대한 하 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를 목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제가 세어 보니까 328가지나 되더라 구요. 그 가운데는 날 죽여달라는 기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 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별의별 기도 가 다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 다. 성경 안에 이렇게 다양한 기도 제목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른 데 있 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 어주시겠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자가 어떻게 근심 때문에 희생을 당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자기를 죽여 달라는 기도도 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에 짓눌려서 병들고 절망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완벽하게 구하지 못하 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응답이 약속된 기도

셋째는, 기도하면 반드시 받을 것 이기 때문에 기도는 근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을 보 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 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 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 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앞부분은 약간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의 아들 되신 그분을 직접 모시고 자고, 먹고 매일 다니는데 무엇 때 문에 엎드려서 기도하겠습니까? 그 러니까 제자들은 기도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고 나면 제자 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기 만 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응답은 근 심을 삽시간에 날려 버립니다. 금방 받는 응답이든 오랜 기다림 후에 받 는 응답이든 간에 응답이 임하면 우 리 가슴에 기쁨의 샘이 솟구치고 그 기쁨의 샘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근심을 싹 쓸어 냅니다. 할렐 루야! 우리가 기도해서 이러한 기쁨 을 체험하기만 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7일부터 일주일 동안 교회 중보기도단, 수양관 중보기도단, 주 일날 예배를 위해 특별히 중보 기도 하는 중보기도단에 참가한 인원은 총 478명입니다. 중보기도단에서 제 목을 내 놓고 같이 중보 기도함으로 써 응답 받은 내용들을 담당 교역자 가 갖다 주어서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응답을 해 주시는지요. 그 기도 내용을 보면 정말 '무엇이든지'입니다. 가지각색 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18년 동안 남편이 교회를 피해 다니면서 안 믿고, 최 근에 들어와서는 부부 사이에 심각 한 문제가 터져서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그 문제 해결할 길이 없어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중보기도단에 내어놓고 기도 를 부탁했는데, 기도하는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 까? 남편이 자기 발로 우리 교회 상 담목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끝난 것 아닙 니까?

또 어떤 집사님은 자기 집에 값 비싼 예술품이 있는데 요사이 경기 가 안 좋으니 팔고 싶어도 안 팔려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 팔아서 특별 헌금도 하고 싶은 데요 팔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다 가 잘 안되니까 중보기도단에 그 제 목을 내놓았나 봅니다. 그런데 중보 기도단에서 그 기도제목을 놓고 기 도하는 가운데 그 물건이 팔리게 되 었다고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 아 닙니까?

어떤 분은 치매로 고생하는 친정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찾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단에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 제목을 두고 기도하는 동안 산에서 어머니를 찾았다고 합니다. 금강산 인지 북한산인지 모르지만 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니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 회사담보물로 잡 혀서 날라 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중보기도단에서 열심히 기도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됐다고 고백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전세 문제를 가지고 돈을 받지 못해서 어 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 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 를 냈는데 그만 뺑소니차로 고발이 되어서 참 난처한 처지가 됐다고 기 도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하나님께 서 기가 막히게 해결해 주셨다고 고 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뺑소니차가 된 데서부터 시작해 서 남편 문제까지 얼마나 가지각색 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기도도 가리지 않고 때를 따라 응답 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면 가슴이 불이 붙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 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근심이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너, 왜 그렇게 공을 좋아하 냐?"하고 묻는다면 멍청한 질문입니 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열심히 사랑을 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랑 하 냐?"하고 묻는 것은 멍청한 일입니 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 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 하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줄 것이 다. 너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근심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주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 약 속 받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를 매우 부자연스럽게 여기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오만 가지가 눈앞에 다 나옵니다. 친구하고 수다 떠는 것은 1시간도 짧게 여기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 을 못 견딥니다. 기도하는 것을 너 무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 들은 아직 믿음이 어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기도가 자연 스러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근심 이 있을수록 기도는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근심을 해결해 준다는데 왜 내가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을 합니까? 아 버지, 어머니가 다 책임져 준다는데 자녀가 방에 앉아서 금식을 하면서 입학금 걱정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 십시오.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짓입 니까? 비록 집안이 어렵고 힘들어도 아버지가 책임지고 학교를 보내주신 다고 하면 그것을 걱정 끝입니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아버지의 약속을 듣고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하 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 다.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 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이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나오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근심을 끌어안고는 청 승맞게 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삽 니까? 왜 기도하지 않느냐 그 말입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도 하십시오. 기도를 하시되 기도가 밥 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처음에는 아스피린 먹는 것처럼 기 도를 해도 여전히 염려가 남아 있어 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계속 기도하면 나중 에는 희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를 체험 해야 신앙의 진수를 알게 됩니다.

내년에 IMF가 어느 정도 해결 될 지 모르지만 한번 밑바닥을 치는 위기는 올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쳐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 도하면 아무 염려 없습니다. 무엇이 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기 때문 입니다. 할렐루야.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