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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2장 1-7절 웰빙 교회 비전(1) 에베소 교회 - 이동원 목사

by 재영구리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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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계  2장 1-7절

설교제목 : 웰빙 교회 비전(1)에베소 교회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최근 우리 한국 사회를 강타한 유행어중의 하나가 웰빙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소위 웰빙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웰’(well)은 ‘잘’이라는 뜻이고 ‘빙’(being)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건강이라는 뜻만으로 통용되지만 본래 이 단어는 아름답고 풍성하게 존재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동일하게 이런 의미를 담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샬롬이 우리 말로 번역될때 주로 ‘평화’라는 단어로 쓰여 지지만 본래의 의미는 매우 심오한 것으로 우리네 삶이 관계된 모든 영역에서 질서와 생명, 기쁨으로 충만한 존재의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로 웰빙인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우리 개개인의 존재가 웰빙이기를 소망하고 우리 교회의 존재도 웰빙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 교회는 2005년 첫 주로 이제 탄생 11주년을 맞이합니다. 11년전 우리 교회가 탄생할 때 먼저 정식으로 탄생예배(1994.1.9)를 갖기전 두달여 동안 우리는 요한 계시록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7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가 어떤 비전을 갖고 존재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인가를 묵상한바가 있었습니다. 실로 11년만에 우리는 다시 동일한 본문을 묵상하며 향후 10년 동안 다시 어떤 모습으로 우리 교회가 성숙해 가야 할 것인가를 기도해 보고 싶습니다. 20세기 세계 교회의 최대 화두는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세게 밀려온 교회 성장 운동의 파도속에 한국 교회의 성장은 최고의 세계적인 모델 케이스가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 성장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리한 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국 교회는 적지 않은 역기능적인 상처를 안고 아파하는 모습이 되어 교회 안팎에서 제기된 비판의 고통을 직면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성장이상으로 성숙이 중요해 졌고 특히 교회건강이 최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우리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아마도 본문은 성경에서 교회의 주되신 분이 친히 교회에 대한 소견을 직접적으로 밝히신 유일한 본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1세기의 주님의 사도 요한은 로마의 도미시안(Domitian) 황제(AD81-96년)의 기독교 핍박시절 전도하다가 붙잡혀간 현재의 그리스 영토인 밧모섬(터키 영 에베소에서 약 80km)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주일에 동굴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 존재하는 당시의 7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계시의 음성을 듣고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계1:9-11) 그것이 바로 계시록2-3장의 내용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7교회는 바로 당시의 모든 교회 아니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서 선택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소아시아의 7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수 있어야 합니다. 이 7교회를 향한 요한의 편지는 대체로 일정한 틀을 지닌 형태로 전개됩니다. 먼저는 각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발신자인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다음으로는 각 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 끝으로 경고와 권면 그리고 약속(이기는 자에게는--)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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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먼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피고자 합니다. 본문2:1에서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20에 의하면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곧 교회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교회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이십니다. 주께서 각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시지만 그들을 오른손 곧 능력의 손에 붙잡고 계신이는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여러분과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된 소명을 감당해 올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교회를 붙잡고 계신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중 에베소 교회를 사도 요한이 먼저 언급한 이유는 요한이 편지를 쓰던 밧모섬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고,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였고 일종의 신 로마(New-Rome)였던 때문일 것입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의 시작은 바울 사도가 그의 제 2차 선교 여행중 들렸고 제3차 선교 여행중 선교 전략상 이 도시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이 곳 에베소에서 약 2년 반을 머물며(바울이 한 곳에 가장 오래 마물렀던 도시)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함으로 시작되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며 디모데를 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는데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1세기 말 다시 디모데가 이 곳을 떠나면서 사도요한이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이 곳에 AD67년을 전후하여 이 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이 에베소에는 터키에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사도 요한 기념 교회(요한의 무덤이 그 곳에 있음)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2.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받았던 칭찬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주를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봉사를 바친 행위, 달리 말하면 그들의 복음 전도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수고였고, 그런 와중에서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며 주님의 간섭하심을 기다린 인내였고 그리고 둘째로는 바른 신앙의 교리를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사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의 전도로 알테미스(다이아나)신전 주변에서 여신의 우상 신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자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하게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위축되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전도했고 인내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에베소 교회는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교리적인 확신위에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의 무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들이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집사중 한 사람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전6:5)를 중심으로 한 무 율법주의적 방종에 빠진 무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방종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방종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칭찬들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에베소 교인들은 주님의 책망이 필요했던 치명적인 한가지 약점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3.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받았던 책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인간의 모든 사랑은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뜨거운 첫 사랑도 식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주님 사랑, 성도 사랑도 그렇게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지했던 그 따끈했던 사랑도 언제인가부터 식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진리의 정통성을 사수하려고 타인들의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감시하면서 서로간의 불신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게 믿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것임을 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균형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놓칠수가 있고,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을 놓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것으로 무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없는 진리는 결국 인간을 진리게(질리게?) 하는 것입니다. 

 

4.그러면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서 배워야 할 웰빙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첫 사랑의 열정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비밀을 본문에서 가르칩니다. 본문 5절의 권면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비밀을 배울수가 있습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비밀입니다.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Remember and Repent) 첫 사랑을 잃어가는 부부들에게 상담자들은 종종 추억 여행을 권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첫 키스를 나누었던 곳, 프로포즈를 했던 곳-이런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문득 그 첫 사랑의 감회를 되찾고 우리의 사랑의 언약을 기억해 낼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주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 그 곳으로 기도의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주님에게 드렸던 약속과 결단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언약, 그 결심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봉사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통하던 그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부부 사랑의 식어감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부부의 의사소통의 상실로 지적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열정을 상실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도 주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지적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슨 큰일을 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에게 차라리 한가지 일 주님 바라보는 일에 집중했던 마리아에게 너는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신 바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웰빙교회는 첫 사랑의 감격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사랑으로 가슴이 뛰는 성도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의 소망 때문에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릴줄 아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 시대 성도들의 주님 사랑이 욘 사마의 열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어찌 욘 사마를 예수 사마에 비교할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를 위해 조건없이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목숨을 버리신 분이 아닌가요? 그 사랑의 자각 때문에 그 사랑 나누기 위하여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교회라는 공동체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는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고 가르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1)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그렇게 가르친 이유는 그의 사랑하는 주님이 마지막 이 땅을 떠나기전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며 가르쳐 주신 다락방의 교훈을 잊을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13:34-35) 이런 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구체적인 대상과 실천 마당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교회는 탄생 준비를 위해 모인 1993년 11월 14일에 65명이 모였습니다. 이제 2만여명 가까운 출석 성도로 성장한 우리 교회가 아직도 그 초기 교회의 사랑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과제일까요?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이 바로 셀 교회 곧 목장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들 2만명의 교인들의 처지를 서로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속의 교회인 작은 목장 교회안에 들어가 12명 미만의 식구들을 나의 영적인 가족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거기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우리의 이웃들의 발을 씻겨주며 서로의 상처를 안고 사랑을 배워가며 치유를 경험해 가는 그 곳-거기에 바로 우리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사랑은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일회성 행사를 지향하고 우리의 믿음과 삶의 마당인 목장 교회를 지원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더욱 더 나아갈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교회는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그리는 웰빙 교회가 될 것입니다.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가 죽은 후(AD 96년) 사도 요한은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을때 전승에 의하면 그의 18번 설교가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몸이 불편하여 제자들이 부축하여 설교단 의자에 앉게 하면서 “선생님, 오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하면 그는 백발의 노구로 두손을 들면서 “소자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그것은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도 아직도 주님 가르치신 사랑뿐입니다. 웰빙 교회는 그 사랑이 넘쳐흐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웰빙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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