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1장9-20
설교제목 : 웰빙교회 비전(8)밧모섬에서의 주일
설교자 : 이동원 목사님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제일 손해보는 일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그 편안한 환경을 축복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둘째로, 그렇게 자라다가 어려운 환경을 갑자기 대면하면 당황하고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준비가 없었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나 순탄한 신앙 환경 안에서 자라난 분들은 그것을 축복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신앙생활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 전개되면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고 방황합니다. 예컨대 갑자기 한 사회안에 정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제약받고 억압받고 박해받는 상황이 전개될 때 너무나 많은 준비 없었던 성도들은 신앙을 등지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이것은 한국 땅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일본 천황에 대한 신사참배가 강요되면서 이를 거절한 모든 성도들은 투옥되었고 다만 양심을 져버리고 타협한 교인들만 형식적인 교회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6.25를 전후한 공산치하에서도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 땅에서는 진정한 신앙인들은 철저하게 박해당하고 다만 북한 정권에 편승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위 국가가 관리하는 두 세개의 교회에 출석할뿐 대부분의 참된 신앙인들은 지하교회의 형태로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AD95년을 전후하여 로마의 도미티니아누스(도미시안) 황제 말기 그는 자신의 제국 통치의 누수현상을 만회하고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방침의 첫째 희생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외에 누구도 경배의 대상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당시 소아시아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였던 사도 요한이 체포되어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오게 된 것입니다. 이 사정을 그는 본문 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리고 그가 이 섬에서 주일을 맞이했을 때 그에게는 두가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첫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고 둘째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어느날 우리가 자유롭게 교회당에 나아와 주님을 예배하게 되지 못할 상황을 만난다면 동일하게 직면해야 할 두가지 질문입니다.
1.무엇을 해야 하는가?대답은 여전히 주일을 기억하고 주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내가--"라고 강조한 것은 그가 이 유배지에서도 얼마나 주일을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은 한 주의 첫째 날이며 안식후 이튿날 곧 주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날에 모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공동체의 승리를 피차에 격려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예배의 날이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 모든 날이 주의 것이지만 특히 이 날을 기념하고 구별하여 떡을 떼며 주님을 예배했던 것입니다. 마치 십일조의 정신이 우리가 소유한 십분의 십 전체가 주의 것이지만 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구별하여 드린 것처럼, 일주일 모든 시간도 주의 것이지만 일주일중 주께서 부활하신 하루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며 공동체의 예배를 갖기로 한 것입니다.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전20:7)라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요? 지금은 사도 요한이 이 낯선 고난의 섬-밧모에서 유배생활을 하지만 어떻게 주일을 잊겠으며 주일 예배의 감격을 잊을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본문에 직접적으로 사도 요한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10절에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는데 요한 계시록에서 이런 표현은 대부분 예배 상황을 전제로 한 경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계시록4:1-2에서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는데 4:10에 보면 이어서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함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혼자 예배했는지 유배된 죄수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함께 예배했는지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를 떠날 때 에베소 교인들은 요한 사도를 돕도록 요한의 제자였던 푸로코로스(행전6:5-브로고로/예루살렘 7집사중 1인)를 함께 동행시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요한, 푸로코로스 그리고 몇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밧모섬의 암굴에 엎드리어 주일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때 요한에게 계시가 임했고 요한은 그가 받은 계시를 푸로코로스에게 구술하여 계시록을 기록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밧모섬에는 사도 요한이 주를 예배하고 계시를 받은 장소를 "계시 동굴 교회"로 보존하고 있고 같은 지역에 후대에 세워진 신학교가 남아있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조건속에서도 우리 주변에서 믿는 성도들을 찾아내어 함께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밧모섬의 주일 예배가 드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당이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당의 문이 닫히면 우리의 삶의 모든 처소가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우리는 이 훈련을 3월 20일 주일에 하게 될 것입니다.)
2.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는가?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대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만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주님은 외로운 유배지 밧모 섬에서 주를 예배하는 요한을 만나 주셨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는 나팔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다가 오셨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무릎꿇어 기도하며 경배하는 동안 갑자기 등뒤에서 커다란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 놀랜 요한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묻습니다. 음성은 세 갈래로 갈라진 천장 바위틈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자라 하시더라"(계1:8) 그날 요한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주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본 환상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그가 교회를 다스리는 주님이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2)그가 역사를 다스리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 전체계시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주님을 경배할 때에도 저는 동일하게 이렇게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지금 요한은 그가 섬기던 교회 현장을 빼앗긴채 유배되어 밧모섬에 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섬으로 유배되어 떠날 때 요한은 "아니 주님 당신의 교회들을 이렇게 버리십니까?"라고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보여진 환상은 그가 뒤에 두고 온 소아시아 7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 촛대 사이로 주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다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었습니다. 12-13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이 환상의 의미는 다시 20절에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무슨 뜻입니까? 그가 여전히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와 지도자들을 붙들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만 교회는 결코 인간적인 지도자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지도자는 쫓겨나고 교회의 교인들이 다소간 흩어지고 위축될 수 있지만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교회편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히 마태16:18에서 "내가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미 계1:8에서 예수께서는 그가 전에도 있었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올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다시 17절에서 그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8절에서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 곧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그가 19절에서 요한에게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분이 보여주시는 역사를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바로 이 비밀을 기록한 책입니다. 계시록에는 역사의 과거에 일하신 주님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요한이 이 계시를 받던 당시의 교회의 현실이 그대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역사의 비밀이 또한 기록되고 있습니다. 소위 7인봉이 차례로 열리면서 7나팔이 불어지면서 이어서 7대접이 쏟아지면서 이 세상 역사속에 넘쳐나는 죄악들을 심판하는 전쟁, 기근, 온역. 자연의 재앙들로 신음하는 지구의 역사가 증언되고 있습니다.그러나 계시록의 역사는 결코 비관적이 아닙니다. 흔히 계시록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같은 류의 비관적인 종말의 책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보편적입니다. 그것은 계시록을 피상적으로 잘못 읽은 것입니다. 사실 계시록의 핵심은 죄악과 심판의 역사의 한 복판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더럽혀진 교회, 더럽혀진 성도들도 이 땅에는 적지 않지만 주님은 여전히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도들을 사용하셔서 거룩한 승리를 선포하게 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소아시아 7교회를 향해 보내어진 요한의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기는 자에게는--"라는 표현은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를 기대하는 주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석가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그의 계시록 주석에서 계시록의 열쇠구절을 11:15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롯 하시리로다" 헨드릭슨은 계시록의 주제를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맞습니다. 때로는 세상에 의해 경멸받고 핍박받는 예수의 교회-그러나 이 교회만이 세상의 소망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비록 요한 사도는 그가 섬기던 소아시아의 교회들에서 단절되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다스리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는 순간 외로운 밧모섬의 암굴에서 형제들과 다시 작은 공동체-목장 교회를 만들고 주일마다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 그들의 모임안에서 새 역사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라고 강요했던 황제 도미시안은 AD96년 마침내 살해되고 요한 사도는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소아시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또 한번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가 승리한 것입니다.3.1운동이 일어났던 해는 1919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상실한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때가 1910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3년 앞선 1907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소위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부흥을 경험하며 한국 교회는 뜨거워졌고 순결해 졌으며 담대해진 것입니다. 교회사가인 민경배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 교회사"에서 이때 있었던 부흥운동이 일체하의 민족사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한국 교회는 민족적 시련의 비극에서 헤어 나올수 있는 힘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장차 계속해서 계속해서 겪어야 할 숱한 험로를 지나, 절망밖에 안보이는 국운에 맞서 지긋히 발 딛고 정도에 나가는 힘과 예지와 담력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한국 기독 교회사,p.260) 다시 말하면 이런 교회가 경험한 부흥의 힘 그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는 일제시대의 고난을 승리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목장 교회 주일을 통해 우리 교회가 이런 부흥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 교회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민족의 구원과 소망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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